묵상자료 7612.

시편 시 67:5-7.

찬송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이 통한다는 것은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지요. 생각이 같고 마음이 같아야 말이 통하게 되는 것인데요. 결혼 전에 궁합을 보는 분들 많습니다만, 검은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결혼생활을 잘 하기 위한 조건, 그러니까 진정한 궁합은 바로 대화에 있다고 하지요. 즉 서로 말이 통하는 것이 진정한 부부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서로 죽이 맞는 이야기 상대야 말로 최고의 인생 반려자가 될 수 있겠지요. 이런 관계는 좋은 친구나 동료의 조건이기도 할 겁니다. 마음이 맞아 말이 잘 통하는 상대, 주위에 많이 계신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27일 방송>

 

2. 사순절 셋째 주일의 구약 에스겔 33:7-20을 본문으로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을 율법의 종교 혹은 도덕의 신앙이라고 부르고, 신약을 은총의 종교 혹은 믿음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도덕이라는 면과 신앙이라는 면을 가지고 있는 때문입니다.

 

성경은 율법과 은총의 양면성을 강조하지만, 모두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합니다(15-16).

한국에 개신교회를 전한 청교도들은 공자의 유교에 버금가는 도덕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반 대중으로부터 경계심을 풀게 하였고, 심지어 환영을 받았습니다. 교육과 의료 그리고 사회사업에 치중하는 것을 보고, 구한말 조선의 지도자들이 유교나 천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개종하기도 하였습니다. 김구, 이승만, 안창호 등이 그런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도덕과 윤리를 바탕에 두지 않은 종교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이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규범들을 말합니다. 일반종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사람 앞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지켜야 할 규범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규범을 지킬 주체(主體)가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그 규범을 제대로 지킬 수 없어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은총은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인간은 이를 믿고 의지할 따름입니다.

 

율법은 죄를 예방하고 깨닫게 하며 회개하고 새롭게 살라 가르칩니다(10-14, 17-20).

성경이 가르치는 죄는 목표를 이탈하는 모든 생각과 행실을 말합니다. 살인과 위증만이 아니라, 학생이 공부하지 않는 일이나, 일꾼이 자신의 역할에 불성실한 것들이 모두 죄입니다. 그래서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 결과의 참담함을 알게 하고 깨우치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살 수 밖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회개란 잘못된 삶을 뉘우치고 정 반대 방향으로 돌이키는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율법이 무력해지고 있다 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인정되는 황금만능의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죄인지 깨달아야 하고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화려했던 소돔과 고모라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죄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한 멸망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오늘의 설교자들도 회개를 강조해야 합니다.

 

은총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를 믿고 의지하는 삶이 최상의 인생살이입니다(10-14, 17-20).

아직도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력구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수렁에 빠진 인간이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듯, 죄 가운데 빠져 사는 인간이 스스로 살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첫 단서가 하나님의 사랑인 은총의 발견입니다.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죄와 죽음 아래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살려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죄와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과 끝까지 기다리고 참으시는 긍휼하심으로, 우리 인생들을 용서해 주시는 구원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은총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총과 긍휼의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일 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605.

시편 시 66:5-7.

찬송 49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침이 좋은 이유, 그것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고민이 있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가도 아침이면 새로운 힘이 생깁니다. 어젯밤에 절망적으로 느꼈던 일도 아침이면 새롭게 해결해 보고 싶고, 어젯밤에 어둠에 거려져 있던 세상 모든 것이 환하게 들어나면서 우리와 가깝게 다가옵니다. 월요일 아침, 새로운 희망의 느낌으로 힘차게 시작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25일 방송>

 

2. 사순절 둘째 주일의 사도서간의 말씀 빌 3:17-4:1을 본문으로 당신은 어느 나라 시민입니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2천 년대 들어서면서 국제화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예인을 중심으로 국적 논란이 큰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상반된 문제들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민권을 따져야 하겠습니까?

 

시민권과 정체성(identity)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 혼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미국 이민가정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국내 유명 대학병원 교수로 재직 중 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합니다. 세인트루이스의 부자동네에 살만큼 소위 성공한 분으로, 자식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뉴욕 대기업에 취직했다 했습니다. 어느 날 사무실 동료들이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자신을 동양인이라며 비하하는 내용이었다 합니다.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아니었던 것입니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친이 한국에서 일했던 대학교 어학원에서 한국어와 한국사를 공부했다 합니다. 마침내 말과 얼인 정체성을 되찾았다는 얘기였습니다. 미국시민권을 얻고 그 문화에 잘 적응했다고 서양인이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정체성은 본질이고, 하늘 시민권은 그 증거물일 뿐 입니다. 정체성을 잃은 사람에게 시민권은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겠습니다(17-19).

바울 사도는 눈물을 흘린다는 말까지 하면서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많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다 고발합니다. 그 증거로 자기 뱃속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세속적 성공과 출세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한심한 목사들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많은 사람 앞에서 설교했다 자랑을 하는가 하면, 진중 세례라며 3천명 5천명 숫자를 채우기 위해 재세례를 주저치 않는 황당한 일도 자랑하는 현실입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십자가를 메고 가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삶의 목표가 신분상승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으로 주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삶 말입니다. 주님이 예로 드신 선한 사마리안이 되는 일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이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 하나님의 은총입니다(3:20-4:1).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을 본받아 말할 수 있는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전 15:10)라고 말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용서함을 받은 것도, 구원받은 백성으로 천국 시민이 된 것도, 그리고 다른 모든 은총도 말입니다. 많은 분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 ,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는 항상 기억할 찬송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우리에게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것 외에 없습니다. 그것이 세상 속에서 전도하는 일이며 세상 사람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교우가 있었습니다. 평생을 감사합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 분입니다. 마침내 부산 보훈병원을 시작으로 평생 약한 이웃들을 섬기는 삶을 실천하셨습니다. 감사와 찬양이 빠진 봉사나 섬김은 무늬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598.

시편 시 64:5-7.

찬송 3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께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고통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몸은 자라고 마음은 자라지 않는 식물인간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요. 우리는 고통 때문에 몸과 마음이 힘들기도 하지만, 또 결국 그 고통이 우리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고, 용기와 의지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거겠지요. , 여러분 어떠셨습니까? 이번 일주일 많이 힘들었습니까? , 그렇다면 힘들었던 것만큼, 내 마음도 단단하게 채워졌겠구나 생각하시면서, 오늘은 편안한 휴식 취하면서 나를 위한 시간으로 보내보시면 어떨까요?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211일 방송>

 

2.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로, 복음서 눅 4:1-13을 본문으로 시험을 이기는 비결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으셨는데, 우리의 삶에는 긍정적인 시험과 시련 뿐 아니라, 부정적인 의미의 유혹도 꼬리를 물고 따라다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험과 유혹은 이겨내야 합니다.

 

첫 번째 악마의 유혹은 돌멩이로 떡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3-4).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가장 묵직한 화두는 번영과 성장입니다. 기술 문명이 세상의 온갖 문제들을 다 풀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막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고, 바닷물로 식수를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화석 연료에서 얻는 에너지가 아니라 아예 태양의 축소판을 만들어 영구적인 에너지를 확보하려고 연구 중이라 합니다. 의학계에도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치고 있는데, 인체에 가깝도록 돼지를 키워서 맞춤형 장기교체를 할 수 있을 것이라 합니다. 통계와 확률로 대변되는 자연과학은 물론 상담과 재판에 응용되는 인문과학도 이른바 인공지능(AI)의 도움으로 더 이상 머리를 싸매고 암기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돌멩이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의 결과물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통제할 수 없는 인간성의 폭발로 한 순간에 바벨탑이 되고 말 것임을 기억해야합니다(고켈, 십자가와 인간, p. 21).

 

두 번째 악마의 유혹은 힘을 얻기 위해서 우상에게 항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5-8).

아무리 개화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인류는 힘의 논리가 나라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악마의 유혹은 천하만국을 호령하고 왕노릇 하는 달콤한 미끼를 들고 자신에게 엎드리라고 합니다. 수 천 년 전 동양의 석학인 공자와 맹자 같은 분들은 인간이 계몽을 하면 훨씬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제는 우상을 끼고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합니다. 3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될 조짐이라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싸움에서는, 어이없게도 인간의 야만성이 그대로 투영되고 있습니다. 가장 고매하고 모범이 되어야 할 대통령 후보들이 온갖 구설수로 부끄럽기 짝이 없어서, 앞으로 고개를 들고 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생활도 인격도 품위도 함량도 한참 모자라는 사람들을 앞에 놓고 저울질해야 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참으로 불쌍하게 보입니다.

 

세 번째 악마의 유혹은 가짜 신앙으로 흔들고 넘어트린다는 것입니다(9-13).

어느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신천지 out!” 이란 스티커를 보았습니다. 한국 개신교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집단입니다. 기성교회에 침투해서 교회를 분열시키고, 교회 자체를 빼앗는 일을 한다는 이유를 들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도 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가짜 신앙, 엉터리 신앙이 활개를 칠 때 이런 해괴한 주장을 합니다. “예수가 밥 먹여주느냐?” 저의 백부님이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의 진검승부를 마술을 부리거나 신앙을 왜곡하는 것으로 몰고 갑니다. 땀 흘려 일해야 밥을 먹을 수 있고, 예리한 칼날을 무시하면 살을 베이고 피를 흘립니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합격할 수 없습니다. 요행을 바라게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가짜 신앙은 진짜 신앙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고 지도자는 가르치고 성도는 따라야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591.

시편 시 62:1-4.

찬송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람에게는 경계선이 없지요. 강물에게도 경계선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월 역시 경계선이 없는데, 그 세월에 금을 그어서 시간의 흐름을 표시한 것은 바로 우리 사람들이지요. 시간의 경계가 또 한 번 바뀌었습니다. 이제 2월이지요. 2월의 꾸는 꿈은 어떤 빛깔일까요? “동네 꼬마들과 놀아주는 것이 나의 가장 큰 포부다.” 이렇게 말한 어느 노 작가의 꿈이 떠오르는 2월 첫날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21일 방송>

 

2. 오늘은 주님의 산상 변모주일로 구약 신명기 34:1-12을 본문으로 모세의 죽음에서 배울 것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태어남은 기쁨으로, 죽음은 슬픔으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면 생과 사는 모두 다 기쁨이며 축하할 일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때문입니다. 그런 눈으로 모세의 죽음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살게 될 땅을 바라보는 임무를 수행했다는 점입니다(1-4).

가끔 왜 사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고 자문해 보기도 합니다. 가장 흔한 대답은 먹자고.”라는 슬픈 대꾸가 들렸습니다. 모세의 생애에서 저는 소명의 수행이라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소명을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나 모세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독특한 소명들을 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일생의 대부분을 이 소명을 깨닫는데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합니다. 흔히들 모세는 자기 민족을 노예의 삶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소명을 받았다 정리합니다. 대단한 임무를 수행한 인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80년을 준비했고, 40년 동안 실천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훤히 바라볼 수 있는 느보산 비스가 봉우리에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자신의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된 위인이었습니다(5-8).

서울 의대의 한 교수는 인간의 건강한 수명을 120년이라고 주장하면서, 모세를 그 예로 들었습니다. 눈도 밝고, 정력도 떨어지지 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입니다. 모세를 수명의 표준으로 생각한 의사다운 관찰입니다. 저는 모세다운 죽음을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야훼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었다는 것입니다(32:48-52). 그리고 죽음에 대한 해석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들이 시내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샘에서 하나님을 배신한 일이라고 말씀합니다(20:1-12). 목마른 백성들의 형편을 말씀드렸을 때, 하나님은 므리바 샘가의 바위에게 말하라는 말씀대로 순종한 것이 아니라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도록 했던 일화입니다. 하나님께 행한 불순종은 그 어떤 죄과보다 치명적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눈이 밝고 정력이 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판결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후계자를 세우는 임무까지 충실하게 수행한 점입니다(9-12).

한 유명 명리학자가 수천억을 소유한 부자들을 상담한 얘기 중에는, 의외로 행복한 사람이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명예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했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서민들이 훨씬 더 낙천적이고 행복하게 살고 있더라는 얘기입니다. 이는 분수를 아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성경의 말씀과 맥을 같이하고(4:11-12), 공자의 <논어> 술이 편에 나오는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행복이 그 안에 있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모세는 자신의 역할이 끝나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명을 따라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어쩌면 노욕(老慾)에 찌든 추태를 부리느라 그 시시한 업적들을 비석이나 책으로 남기려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저의 한 성도의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제 쉬고 싶습니다.” 라는 마지막 인사처럼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584.

시편 시 59:12-13.

찬송 15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올 해를 시작하면서 나무가 하나 없는 작은 무인도에 배를 타고 들어간 분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 들어가서 그 분이 하고 나온 일은 그 나무 없는 무인도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온 것이었지요. 그 뒤에 그 분이 작가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 구절은 인생에 달리 대단한 무슨 대단한 수가 있겠나? 잘 될 때까지 사랑하는 일 밖에.” 였다고 합니다. 나무 하나 없는 무인도에 나무 한 그루를 심는 마음, 잘 될 때까지 사랑하는 그 열심을 우리들 마음에도 옮겨 심어보고 싶습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7125일 방송>

 

2. 오늘은 주현절 후 일곱째 주일로 사도서간 고전 15:21-26절을 본문으로 신앙의 종결 : 부활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두 핵심 주제는 십자가와 부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십자가, 그리고 그 십자가를 정당화하는 부활이라는 의미입니다. 부활신앙은 힘써 증거할 기독교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의 주인이십니다(21-22).

기독교 신앙을 집대성한 인물을 사도 바울로 꼽는 것은 주저할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바울의 위치가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일각에서는 어리석은 문제 제기도 합니다. “바울에게서 예수에게로!”라는 식의 문제의식 말입니다. 민중 신학의 공헌도 있습니다만, 이런 시각은 가장 비판받을 주제입니다. 바울은 단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를 뛰어 넘으려고도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도 무방하다고 외쳤던 인물입니다(3:8-9).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문선명의 주장처럼 실패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 때에 그 예표가 나타났습니다. 모리아 산의 이삭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절규는 이삭도 분명히 했을 외마디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희생하는 십자가의 길을 일찍부터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 사랑의 극치입니다(25-26).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부활을 꿈꿉니다. 고난 없는 영광도 꿈꿉니다. 이것은 어리석음이고 자기 성찰에 대한 태만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양심을 가진 모든 사람의 고백입니다. 인간이 낙원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혹독하게 받아야 할 죄의 값을 선언하셨습니다. 흙을 파서 먹거리를 생산할 고통과 자손을 낳기 위한 해산의 고통 등 말입니다. 생존을 위한 단순한 고통에서부터 가까운 가족들 속에서 부대끼는 수많은 아픔과 이념과 피부색 그리고 수백 가지 욕망에 붙들린 싸움들에 이르기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이런 슬픈 세상에 하나님은 십자가에 숨겨진 사랑을 품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이 아니라, 죄와 허물로 수렁에 빠진 아들을 감싸 안아주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먼저,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음에 부활합니다(23-24).

죽음 다음에 무엇이 이어지느냐에 대해서 사람들은 침묵합니다. 길고 긴 인류의 역사는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계와는 달리, 인간계는 단 일회적 존재라는 문제 앞에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흙으로 빚어지고,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진 생령이라고 말씀합니다(2:7). 그런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까지 인간을 흙에서 시작 흙으로 끝나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하나님의 생기로 활동하게 된 생령이라는 인간의 근원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37:5-6)에 부활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환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부활신앙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다음은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활의 새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다리는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577.

시편 시 58:4-5.

찬송 51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식탁에서 아이가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엄마, 나는 둥그런 숟가락이 될 거예요. 숟가락은 둥글고 부드럽지만, 포크는 날카롭게 사람을 찌르지 않아요. 나는 따뜻한 숟가락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숟가락 같은 사람, 포크 같은 사람, 어린 아이의 해맑은 표현이 재미있으면서도 너무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모나지 않게 둥글고 부드럽게 다른 사람에게 퍼줄 수 있는 숟가락 같은 사람.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25일 방송>

 

2.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의 복음서 눅 6:17-26을 본문으로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한 삶을 살려고 고군분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것도 결국은 행복한 삶을 누리려는 수단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은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우리 앞에 세워놓고 분별하라 하십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혼란을 느낀다면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20-26).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와 성공을 찾으라고 합니다. 출세와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철썩같이 믿는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꼬리가 되지말고 머리가 되게 해달라.”거나, “아프지 말고 건강하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달라.”는 기복신앙인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너무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천국의 주인이라 하고,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그리고 미움을 받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니 말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유한 사람, 배불리 먹는 사람, 웃고 있고 칭찬을 듣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가 아닙니까? 이런 때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행복의 정의는 물론, 행복 자체도 우리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해야 가능하니까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20-23).

제가 시골생활을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보내주시면 공부를 잘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입니다. 예상한 대로 실패했습니다. 사람들은 공부를 잘 하는 방법보다는 당장 기말고사에서 성적이 오르는 선행(先行)학습을 기대했습니다.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면 공부가 재미있어 지는 기적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우는 사람, 미움을 사고 내어 쫓김을 당하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행복을 주고 싶어 하시는 사람들이란 바로 그런 사람들인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이란, 소유가 아니라 나눔이며, 혼자 사는 길이 아니라 함께 사는 길이며, 거짓과 불의를 먹고 마시고 딩구는 게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서 힘써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눈치챈 사람들이 있었는데, 슈바이쳐, 테레사, 현동완 등이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24-26).

마태복음서 5-7장엔 천국에 관한 설교가 있는데, 천국 시민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번에는 불행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 부자가 되지 말아라. 배불리 먹지도 말아라. 웃고 떠들지도 말아라. 사람들의 칭찬에 목을 매지도 말라는 말씀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씀하시는 것일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슬프게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행복을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정신을 일깨워주는 소설이 있습니다. 찰스 디킨즈가 쓴 <크리스마스 캐럴>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소설가 톨스토이는 자신의 거대한 토지를 소작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조선조 초기의 명재상 맹사성은 가난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감동적인 일화를 남겼습니다.

 

3. 오늘은 왕십리루터교회에서 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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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570.

시편 시 56:10-11.

찬송 267, 374, 3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좋은 약속이나 데이트 있으신 분들, 아침부터 무척 설레시겠지요? 그 기다림의 과정이 길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과의 약속도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그렇고, 아니면 오늘 중요한 발표가 있는 경우도 있겠고요. 정작 그 순간보다 설레고 짜릿하게 느껴지는 기다림의 시간들이 있을 텐데요. 떨리고 행복했던 첫 데이트의 순간을 떠 올려보면서 기다림의 순간을 채워보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123일 방송>

 

2. 주현절 후 다섯째 주일의 구약 이사야 6:1-13을 본문으로 소명(召命)에 응답하는 삶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그가 누구든 자신의 할 일을 위해서 삶을 출발합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하며, 성경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뜻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며, 저마다의 고귀한 역할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직접계시가 필요한 시대가 있었습니다(1-5).

구약에는 사사를 비롯해서 제사장과 선지자들 그리고 왕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곤 하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신비한 환상을 통해서 입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의 직접계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그리고 삼손과 기드온 사무엘과 엘리야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사야 등이 그런 인물들입니다. 신약에도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밧모섬의 요한도 이런 직접 계시를 경험했던 인물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정경으로 확립되기 전에는 직접계시가 필요했습니다. 직접 계시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알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직접계시는 매우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과 환상들을 바르게 전할 엄중한 책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된 현존인 정경이 확립된 이후에는 성경이 직접계시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1:1).

 

하나님의 부르심인 소명은 책임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하십니다(6-10).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는 극적인 장면을 읽었습니다. 이 구절만 떼어놓고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인간의 결단과 응답으로 가능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먼저 인간의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선행(先行)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들 출생의 신비처럼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자신의 성별(性別) 재능 그리고 올곧은 의지와 성실성 등을 계획하거나 준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여기 있으니 저를 보내십시오.”라는 이사야의 응답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반응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운명 혹은 숙명이라는 말로 대체하지만, 우리들은 이를 소명이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며 힘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소명을 확신할 때, 삶의 목적과 책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소명을 따르는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11-13).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힘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또 무엇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우리들 크리스천은 자신의 소명에 따르는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고백합니다. 독을 짓는 이나 빵을 굽는 이가 평생을 그 일에 소명의식으로 일했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해도 됩니다. 크리스천 여부를 떠나 운명적인 삶을 제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들, 성별이나 재능 그리고 의지와 성실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두어야 합니다. 저의 부모님은 농사꾼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함으로, 저의 선생님은 건강한 민주시민을 육성하는 일로, 그리고 다른 이들은 저마다의 본분에 충실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한 삶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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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563.

시편 시 55:15-17.

찬송 5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이 흙이라면, 감정은 물뿌리개다.” 이러한 비유를 봤습니다. 똑 같은 말이라고 해도, 감정을 적절하게 살피면서 할 수 있다면, 부드러운 흙처럼 잘 스밀 수도 있겠지요. 반대로 자갈이 많은 흙처럼 거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말하고 싶은 내 기분만큼이나,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면서 해야 할 말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18일 방송>

 

2. 오늘은 주현절 후 넷째 주일로 사도서간문 고전 13:1-13을 본문으로 “사도를 통해 가르치는 위대한 사랑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야기를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살핀다는 것은 어패가 있을 수 있지만, 어쩌면 사도 바울보다도 더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은총을 사랑이라고 꼽았습니다(1-3).

성경은 은총이나 은혜라는 말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 인간에게 베푸시는 선물과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누릴 수도 가질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을 최상의 은총의 선물로 구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심지어 천사의 말을 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는 말이 아니면 요란한 꽹과리 소리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온갖 신비와 지식을 갖추고 산을 옮길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자기 재산을 나누어주고 누군가를 위해 불속에 뛰어든다 해도 사랑이 없는 일이면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하는 가장 작은 것도 어떤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위대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인 사랑은 엄청난 자제력을 준다고 말씀합니다(4-10).

사랑을 마음에 가득 품고 살아가는 사람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가깝게는 여러분의 어머니입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참으시고, 부드러우시며 시기 자랑 교만 무례 욕심 성내거나 앙심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덮어주고 믿어주고 희망하고 끝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잘 아는 지인은 많은 형제자매들과 살았습니다. 고생하신 어머니를 위해서 첫 월급을 받으면서부터 일정한 생활비를 드렸는데, 그 많은 돈을 아끼고 모아서 망나니 동생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고 있었습니다. 그 지인은 어머니께 잘못하시고 계시다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망나니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다 답하셨다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 감춰진 사랑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자신의 살과 피를 다 주고 싶은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양면성을 가진 인간을 함께 아우르는 사랑입니다(11-13).

대부분의 사랑이야기는 사랑스러운 면 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다분히 감상적인 내용들입니다. 보고 싶은 점만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양면성을 함께 사랑할 것을 의미한다고 사도는 이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나, 다윗이 궁 안에 있는 수많은 여인 중에서가 아니라 남의 아내인 밧세바를 겁탈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야를 넓히려는 뜻보다 정반대의 또 다른 모습이 있음을 직시하라는 암시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모리아로 가는 내내, 뜻 모를 번민의 밤을 보내야 했지만,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릴 아들을 생각하는 수천수만의 시간들이 있음을 깨우쳐야 했습니다. 성군 다윗에게도 음흉하고 야비한 인간들의 욕망을 까발려 공개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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