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500.

시편 시 42:1-3.

찬송 13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원시인들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아름다운 벽화를 그렸습니다, 유난히 길고 음산한 겨울로 유명한 독일에서 많은 훌륭한 음악이 만들어졌고요.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비어 있는 공간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시간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라고요.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도 어떤 공간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참 많이 달라질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데요. 지금 여러분은 어떤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1019일 방송>

 

2. 대림절 첫째 주일의 복음서 눅 19:28-40을 본문으로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앞두고 나귀새끼를 타신 메시야를 묵상합니다만, 뭔가 한쪽 가슴이 텅 빈 것 같고 시린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노래로는 나귀새끼 운운하지만, 마음으로는 준마를 타신 주님을 상상하는 때문입니다. 썰렁한 마구간을 외치면서도 실상은 따뜻하고 흥겨운 크리스마스 파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지킬 수는 없을까요?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메시아의 상징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28-36).

나귀를 보신 분들이라면 나귀의 왜소하고 불결하며 초라함을 떠올릴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제게 베데스다 못을 알려준 소년이 타고 있던 나귀와, 중국 소주의 한 공원에서 여행객을 태워주던 작은 마차를 끌던 나귀가 떠올랐습니다. 두 나귀 모두 눈에는 눈곱이 잔뜩 끼어있고,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나귀새끼를 타신 것은 세상 사람들로 나귀에게 주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씻기고 빗질한 기름기 번지르르한 준마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기에 딱 알맞은 나귀새끼를 타셨으니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메시아로 오시는 길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이란 가난하고 병든 연약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기뻐하고 환영해 줄 메시아는 나귀새끼를 타시는 분이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했다는 하나님은 평범한 사람들을 훨씬 더 사랑하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을 그들은 찬양으로 맞아주었습니다(37-38).

천만 다행스럽게도 예루살렘의 소시민들은 나귀를 타신 메시아를 환영해 주었습니다. 만에 하나 나귀새끼까지 타시면서 세상에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더라면 이 무슨 낭패입니까?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나님께는 영광.”이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제가 1970년대 한국 기독교회의 이상한 현상에 대해서 몇 차례 언급한 일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예수님을 맞고 싶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배금사상과 출세주의에 깊이 빠져있는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윤리의 이중성, 성적 타락, 그리고 이웃 사랑 없는 성장제일주의의 비호감을 눈떠야 하겠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빛과 소금의 모습으로 돌아서게 될 때, 나귀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메시아의 길을 막아서는 훼방꾼들을 맥추지 못하게 하셨습니다(39-40).

들켜버렸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탄 기독교인의 속내를 말입니다. 제가 신학생 시절에 배운 감동적인 문장 하나는 “No Cross, No Crown!”였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걷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 또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힘들고 어려울 때는 큰 위안이 되고 용기도 주었는데, 나이가 들고 교회가 힘을 얻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효과적인 목회가 하나님의 뜻이려니로 바뀌더니, 그렇게 비판하던 가난뱅이 목회를 벗어던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초라하고 가난뱅이의 입술로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품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단호했습니다.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고 말입니다. 입술로도 삶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은 위선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3. 지난 26일자 1번이 24일자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이만방 묵상식구가 귀띔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493.

시편 시 40:8-10.

찬송 23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화 <노트 북> 기억하세요? 여기서 보면, 석양이 지는 호수위에서 주인공이 노를 저으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최고의 사랑은 영혼을 일깨우고, 더 많이 소망하게 하고, 가슴엔 열정을, 마음에는 평화를 주지. 난 너에게서 그걸 얻었고, 또 너에게 영혼을 주고 싶었어.” 전 이 장면 보면서 아, 정말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요. 삶에 희망을 주고 마음에 행복과 열정을 주는 그런 사랑. 영화 속에서 나올 것 같은 그런 최고의 사랑을 한번쯤 꿈꾸어보는 계절이 바로 이 가을이 아닐까 싶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019일 방송>

 

2. 오늘은 교회력으로 마지막 주일이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 주일입니다. 내일부터는 교회력 상으로는 새해가 됩니다. 오늘 사도서간문 유 1:20-25을 본문으로 아름답고 아름다운 권면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이라는 뜻을 가진 권면은 설교에서 자주 듣는 단어입니다. 아름다운 권면을 듣고 힘씁시다.

 

우리의 삶이 고귀한 믿음의 터 위에 있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20).

이른바 한류의 세계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우리 한국 기독교회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했다며 분노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기독자들의 윤리의 이중성이 낳은 불신감, 교회 지도자들의 성폭력 현상,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등 비호감이 적나라하게 연출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세속적인 것으로, 기독교회가 무엇을 가르쳐왔는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꼴찌가 되지 않고 1등이 되며, 성공과 출세에 신앙의 목표를 둔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을 십자가와 부활의 신앙이라고 요약합니다. 1등이 아니라 꼴찌가 되는 것이며, 성공과 출세가 목표가 아니라 바보가 되고 희생하는 삶을 사는 신앙을 말합니다. 고난과 배고픔의 길로 알고 출발했는데, 성공과 출세에 목표를 두었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바른 신앙의 바탕으로 방향을 바꾼다면 우리 교회도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를 권면합니다(21).

얼마 전 어느 중견 목사의 설교를 시청하면서 큰 일이다 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사랑과 일반 종교가 말하는 사랑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반 종교가 말하는 사랑은 사람이 주체가 되는 인간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적 사랑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사랑은 언제나 반쪽 사랑입니다. 앞만 사랑할 뿐 뒤는 사랑하지 않고, 건강과 아름다움 그리고 능력과 장점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한계가 있고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앞과 뒤, 건강과 병듦, 아름다움과 부끄러움, 장점과 약점을 모두 아울르는 온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인간의 부끄러움과 약점 때문에 더 큰 사랑을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위로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연약한 이웃들을 돌볼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23).

사도의 권면은 행동하는 사랑의 실천을 권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서울 YMCA의 총무를 역임하셨던 현동완 선생의 삶을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1950년 중반 한국동란 후의 시대상을 생각하며 들어야 합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것은 가난한 조국의 달러를 아낄 수 있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세계 평화를 위해서이며, 하루 한 끼 금식하는 것은 고아들을 돕기 위해서라며, 쓰레기장이었던 난지도에 오두막을 짓고 남은 생을 살았던 실천적 지도자였습니다. 아동문학가 권 정생선생은 평생 경북 안동 일직 조탑안길의 작은 교회 종지기로 가난하게 살면서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쓰며 살았습니다. 어린이들의 바른 글쓰기를 가르치신 이 오덕 선생님, 땅이 살아야 사람이 살 수 있다며 정농법을 가르치신 풀무원의 원 경선 선생님 등은 사람과 자연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았던 우리 시대의 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486.

시편 시 39:3-5.

찬송 2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지만요, 쌀이나 액체의 양을 잴 때, 한 홉 두 홉하는 홉이라는 단위가 있지요. 한 홉은 목마른 사람이 단숨에 마실 수 있는 물의 양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또 논 한 마지기할 때의 마지기는, 하루 동안 열심히 일해서 갈아엎을 수 있는 땅의 면적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었다고 하네요. 사람마다 단숨에 들이킬 수 있는 양이 다를 것이고, 하루 동안 해 낼 수 있는 일의 양도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복잡하고 정밀한 현대 사회에서의 도량형으로 적합하지 않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긴 했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런 것들이 지극히 사람 중심이었던 것 같지요. 그 무엇보다 사람을 우선케 했다는 점에서는 공감이 듭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1018일 방송>

 

2. 교회력 마지막 둘째 주일의 구약성경 단 12:1-3을 본문으로 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80년대 초에 겨울 방학을 이용해서 미국 신학대학원에 유학할 때, 한국의 군사정부에 대해서 쥐죽은 듯 지내는 한국 교계 지도자들을 성토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역사의 한 복판에 사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서 관망하는 사람 사이의 괴리를 느껴야 했습니다. 설교가 감시당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소리에 무차별 구금되고 삼청교육대를 선전하던 시절 말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구별됩니다(1).

사람에게는 겉마음과 속마음이 있습니다. 상황이 힘들고 급할 때는 곧 위기의 순간에 속마음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러니까 평소에 가장 많은 생각을 품은 것이 속마음이고, 사람들 앞에서 꾸미는 마음이 겉마음입니다. 다니엘서는 구약의 묵시록이라고 불리는데, 역사적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바벨론 포로기의 힘든 시절에 나온 묵시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표제어가 <끝날>이라고 돼 있습니다. 세상 끝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살이는 시련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로병사가 모두 시련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최악이며 최후의 시련이 있을 것인데, 그것을 성경은 세상 끝날 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시련은 모든 사람들 앞에 닥쳐올 것입니다. 개인적인 종말이든 우주적인 종말이든 이런 시련을 당할 때를 위해서 삶의 순간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제대로 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절망의 한복판에서 영생에 이르는 지혜자와 수치를 당할 어리석은 자가 나올 것입니다(2).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입구에는 커다란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관리자가 없는 듯 보이는 공동묘지는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여기저기서 뼈들이 불거져 나올 것 같았고, 나무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보다 더 황량한 절망에서 사람들이 깨어난다 말씀하십니다. 최후의 부활의 아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종류의 사람들이 보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영생의 부활을 하는 사람과 영원한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부활하는 사람이 그들입니다. 이 최후의 부활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에게만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 이외에 다름이 없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구원은 물론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3).

모든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도토리 키 재기 하듯 조금씩 형편과 처지가 다를 수 있지만, 삶의 얘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크롬웰 장군의 삶이나 밀 이삭을 도리깨질 하는 촌로(村老)의 삶이 비슷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삶의 목적과 방향에 따라서 그 최종 목적지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날 것입니다. 궁창의 별처럼 빛나는 사람과 그와는 정반대인 부끄러운 사람으로 나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옳은 곳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빛나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 혼자 잘 살아보겠다는 사람은 여전히 천국에서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힘들고 연약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야말로 천국에서 살기에 합당한 인물입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나라가 천국인 때문입니다. 디킨즈의 스쿨이지 영감이 재산을 포기한 이유가 예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479.

시편 시 38:1-3.

찬송 307, 311, 31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에는 단 두 가지 규칙만 존재한다. 첫 번째 절대로 포기하지 말 것. 두 번째 첫 번째 규칙을 절대 잊지 말 것.” 유명한 재즈 음악가 듀코 엘링턴이 남긴 말입니다. 오늘날의 듀코 엘링턴의 명성 뒤에는 이렇게 평생 동안 간직해온 삶의 규칙이 있었는데요. 그가 얘기한 두 번째 규칙처럼 실패가 다가왔을 때,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또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018일 방송>

 

2. 교회력 마지막 셋째 주일의 복음서 막 12:41-44을 본문으로 올바른 헌금관을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 안팎으로 헌금의 목적과 용처에 대한 사회적인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구전토라인 <미쉬나>는 예루살렘 성전 여인의 뜰에 13개의 연보 궤가 있는데, 6개는 자원연보 궤, 7개는 목적연보 궤였다고 합니다.

 

헌금의 첫째 원칙은 자원하는 것이었습니다(41-42).

예수님이 관찰하신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헌금하는 모습은 자원하는 것이었습니다그런가하면 고린도교회에 권고한 사도 바울의 헌금 모금은 상당히 부담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고후 8:2, 9:11). 예배가 무엇인가를 애매모호하게 이해하는 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기독교 예배는 일반 종교처럼 자신들의 신에게 복을 받기 위해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기독교 예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풍성한 은총에 감사하는 기본 정신이었고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의 만남이고 교제인 것입니다그러니까 은총을 베푸시는 하나님과 그 은총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예배자가 교제하는 일입니다그래서 예배는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식인 구성이 아니라쌍방 소통식의 구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예배자의 내용인 기도찬송감사가 철두철미하게 자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헌금의 두 번째 원칙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43).

본문에는 대표적인 두 종류의 예배자가 소개되고 있습니다한 종류는 가난한 과부라는 인물이고다른 한 종류는 부자라는 인물입니다예수님은 헌금하는 사람들을 주목하셨는데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 궤에 넣었고부자는 많은 돈을 넣었다고 했습니다여기서 렙돈이란 동전은 당시에 발행된 가장 작은 단위의 동전으로마키비 왕조(주전 175-140)가 유대를 통치하던 시절에 발행된 최초의 동전입니다그런데 이를 보신 주님은 과부가 누구보다 많은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그에 비해서 부자는 액수는 많으나 자신의 넉넉함 중에서 매우 작은 것을 헌금했다 말씀하셨습니다헌금 액수의 단순 비교가 아니라그들 각자의 삶에 비례했을 때 누가 최선인를 평하신 것입니다우리가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가 예 있습니다찬송을 부를 때기도를 바칠 때그리고 감사의 예물을 드릴 때 최선을 다할 이유입니다.

 

헌금의 마지막 원칙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행동입니다(44).

며칠 전 지인 목사님들과 긴 차담(茶談)을 하였습니다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정신에 대해서 성토를 하였는데그 중 하나가 감사의 실종이라고 했습니다부모의 은혜나 스승의 은혜는 물론이고 국가나 민족의 은혜 그리고 이웃과 동료들의 은혜가 실종됐다는 것입니다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 안에서 회자되기는 하지만입에 발린 말이 됐다고 말입니다제가 부산을 방문하면 꼭 찾아오는 시각장애인 제자가 있습니다택시비를 두 배나 내면서도 그것 또한 감사하다 말했습니다그분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다고 말입니다원망할 것이 저보다 수십 배가 많아야 할 텐데도 감사할 것이 저보다 수백 배가 많았습니다부서지는 파도의 흰 물결을 보고 싶지 않으냐 물으면자신은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해서 아름다운 천국을 그리고 있었습니다악한 사람들조차도 천국의 시민으로 대하고 있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472.

시편 시 37:18-20.

찬송 1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레포츠가 된 번지 점프. 이 번지 점프는 원래 남태평양의 단호아트 섬의 원주민들의 성년식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지요. 단호아트 원주민들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질 수 있을 만큼의 용기를 가져야만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번지 점프를 성년의 의식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뛰어 내릴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헤쳐 나가지 못할 어려움도 없겠지요.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 입니다. 번지 점프대에 올라선 단호아트 원주민들의 희망과 용기,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08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스물 셋째주일의 사도서간문 히 9:11-14을 본문으로 제사장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히브리서는 구약 배경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큰 문제는 메시야의 오심을 놓고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것과, 신앙의 중심을 율법과 복음으로 나누는 데 있습니다.

 

구약을 신약의 그림자로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회의 성경관입니다(11).

그리스도는 <중략>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0:4) 이 구절을 근거로 더 이상 구약은 필요 없다고 주장한 마르키온 이란 이단자가 있었습니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 성경인용이 위험한 실례가 되었습니다. 흔히 구약을 예언으로 신약을 성취로, 혹은 구약을 그림자로 신약을 실체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이해입니다. 구약의 안내가 없다면 신약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고대 세계의 신앙생활을 엿보게 합니다. 죄는 반드시 무거운 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생명을 지불해야 하는 희생제는 죄인에게 섬뜩하게 합니다. 정교가 분리되지 않던 시대에는 종교재판이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18세기까지의 유럽 세계에서 나, 현대의 아랍세계에서는 종교재판이 최고의 사법기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는 엄격하게 다루었습니다.

 

제사장이 자신을 제물로 바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12-14).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형편과 문제를 변호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엄하게 전하기도 합니다. 이런 중간자의 입장에서 제사장의 주된 임무는 인간이 지은 죄의 경중을 따져 그에 합당한 제물을 바치도록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할 수 없는 안타까운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죄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날 뿐 아니라 그 결과 반드시 죽어야 할 처지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말리고 벌을 주어도 절망과 죽음으로 달려갈 뿐이었습니다. 모든 제사장을 대표하는 예수님은 이런 어리석은 인류를 대신해서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사람의 극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십자가는 고통과 형벌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빛을 내고 맛을 내는 교회의 희생이 절실합니다(14).

1980년대 중반 어느 여름 교수 수련회가 열린 충청도 수안보 어느 커피숍에서 미당 선생을 만났습니다. 누군가가 근황을 묻자, 토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위해 칠순의 나이에 러시아어를 배우려고 유학을 떠나련다 했습니다. 그 토스포예프스키가 궁금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반역자로 몰려 사형 집행장에서 처형당하기 직전에 황제의 특사로 풀려난 경험이 있었고, 그 후 4년의 시베리아 유형생활에서 신약성경 속의 예수님을 만나 크리스천 작가로 수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죽음 직전에 만난 예수님은 자신을 남김없이 인류를 구원하는 제단에 목숨을 바치신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정신의 바탕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본연의 자세로 회복할 때만이, 교회는 더욱 더 빛을 발하고 소금의 맛을 내는 자랑스러운 교회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465.

시편 시 36:7-9.

찬송 24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을이라는 계절 가운데서도 그 한 가운데 10, 그리고 10월 가운데서도 그 한 가운데 있습니다. 가을 깊숙이에 듬직하게 빛나게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가을하면 떠오르는 감성가운데 하나가 그리움, 추억, 그런 것들이 아닐는지요. <KBS FM 1, FM가정음악, 20071013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스물두째 주일의 본문은 렘 31:7-9으로,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래 된 속담 중에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은 용서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이 죄짓기에 약점이 많다는 뜻이며,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를 희망 한 복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세우시는 분입니다.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희망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7).

이스라엘의 4천년 역사는 로울러코스트와 같이 다사다난했다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택하셨다고 믿는 유대인들은,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시련의 역사 한복판을 지나가게 하시는지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자기 백성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소명을 가진 예언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풍요 속에서는 책망과 저주의 말씀을, 절망 속에서는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해야 했기에 시련을 당하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벨론에게 전쟁에서 패하고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 중에서 희망의 말씀을 전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새 역사는 수많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심입니다(8).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신 것은 자신들의 장점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무화과 광주리에서 가장 싱싱하고, 포도 송이 중에서 가장 먹음직한 것이며, 자신들에게 남다른 장점이 있어서라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이스라엘이 교만하고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교만한 사람들을 온갖 시련 속에서 연단하신 후, 겸손할 수밖에 없고, 각종 상처투성이가 된 볼품없는 사람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역사에 적합한 사람들이란, 자신에게서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그래서 감사와 찬송밖에 할 것이 없는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도토리 키 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까치발을 돋우어도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다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그 정도 밖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들을 귀도 생기고, 마음의 여유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축복입니다(9).

별빛에 산등성이가 또렷이 윤곽을 드러내는 한 밤중이 아름답다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분주하던 도로가 조용해지는 때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삶이 넉넉하고 즐거울 때가 아니라, 인생의 캄캄한 밤과 거센 폭풍우가 몰려올 때 생각이 나는 존재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시간을 갖도록 가르쳐 주시고 준비해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울면서 (잡혀)떠나 갈 때도, 위로받으며 돌아 오게 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121편을 쓴 주인공은 포로에서 귀환한 시인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희망의 상징으로 믿었던 예루살렘에서 정작 절망을 느끼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하나님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이런 감격과 소망을 주시는 것일까요? 예레미야는 지금도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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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458.

시편 시 35:14-16.

찬송 20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한글날이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우리 단어를 조사한 것을 보니까 그 첫 번째는 당연 <어머니>라는 단어였습니다. <사랑>이라는 낱말이 그 다음을 이었고요.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낱말들은 연상할 때와 발음할 때 모두 느낌이 좋은 공통점이 있더군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낱말은 어떤 것들인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109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스물한째 주일로, 10:23-31을 본문으로 재물을 값있게 사용하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재물이 신앙생활에 유익한 것일까? 아니면 손해가 될 것인가? 라는 문제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만 떼어놓고 본다면, 재물은 천국에 들어가는데 방해가 될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황금만능주의를 표방하는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은 소극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재물의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23-26).

힘을 가진 사람이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돈이든 학식이든 권력이든 힘을 가진 사람은 백에 아흔아홉은 교만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겸손하고 싶어도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인간은 힘자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알게 모르게 그리고 은연중에 힘자랑하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솔로몬도 모두 뭔가 자랑할 것 때문에 살맛이 있다고 어깨를 들썩거립니다. 주님은 그런 인간을 정확하게 꿰뚫어보신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기보다 쉽다 하셨을까 하고 말씀하셨으니까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재물이 많다는건 마땅히 써야 할 데에 쓰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런 유형은 천국에서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영지도 나누고, 인세도 기부하려던 톨스토이의 생각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27-28).

어느 유명 목사님이 <깨끗한 부자(淸富)>란 책을 쓰셨습니다. 목차에는 돈은 악이 아니다”, “소유가치와 존재가치를 균형 있게 하라”, “하늘에 쌓을 수 있는 돈과 없는 돈”, “돈에 대한 바른 몫 가르기”,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자가 되라”, “하나님을 위하는 부자가 되라등이 있습니다. 얼핏 청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많은 청부들과 성공자들이 비슷한 간증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끝머리에 몇 마디 하나님의 은혜로 라는 영혼 없는 말로 마무리하는 상투적인 수법을 빼면, 온통 제 자랑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천국은 우리들 힘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남과 다른 삶을 살았다 해도, 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일이 천국입성보다 더 쉽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이 아니고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제 자랑할 바에는 그만 두는 게 낫겠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 값진 삶은 없다 하십니다(29-31).

사도 바울이 즐겨 사용한 용어 가운데 주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관용어(慣用語)가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오랜 시간을 두고 묵상할 매우 귀중한 관용어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쓸 때는 얼마나 힘이 넘치는지 모릅니다. 헬라어로는 앤 크리스토(εν Χριστω)인데,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비롯,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와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등,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앤 크리스토의 의미는 우리 자신의 의지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지와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거나 맡길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위대한 진리를 전파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신앙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 맞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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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444.

시편 시 33:16-19.

찬송 286, 287, 28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양 속담에 별을 바라보는 모습 속에 이미 겸손함이 담겨 있다.”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일상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걱정 근심, 기쁨 슬픔, 이것들도 무한한 우주에 대비해 보면, 극히 짧은 한 부분인 거지요. 그래서 별을 보면 사람은 겸손해 진다고 합니다. 가을이 가기 전에, 별 한번 천천히 올려다봐야 하겠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99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열아홉째 주일로, 2:18-25을 본문으로 가정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결혼제도를 제정하셨기에 거룩하고, 평생 지켜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이 결혼제도를 비웃거나 악용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만큼 어려움이 많았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제도는 고통과 어려움을 주는 제도일까요? 오히려 유익하고 행복한 점도 많다는 것입니다.

 

결혼제도는 좋은 점이 훨씬 많이 있습니다(18).

인생사(人生史)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인간관계이며, 그 중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 곧 결혼한 부부관계라 하겠습니다. 제가 요즘 교제하는 분들 중에는 홀로된 분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배우자와 사별한 분도 계시고, 사기결혼을 청산하느라 힘들었다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에는 크게 상반되는 점들이 있는데, 부부로 살던 때를 아름답게 추억하는가 하면, 끔찍했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혼제도의 유익한 점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최상의 동반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녀를 낳아 사랑의 가족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는 평생 드릴 효도를 다할 만큼 최상의 선물입니다. 셋째는 역사를 계승하는 것입니다. 가문과 전통, 그리고 신앙의 계보를 잇는다는 것입니다(22:17). 아무리 힘든 일상 속에서도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평안과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조력자로 서로 격려할 수 있는 것입니다(19-20).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 중에서 하나님을 조력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들에게 이름 짓는 일을 맡기신 것으로, 우리 인류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입니다. 분명 그 지혜를 성령께서 주셨을 것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가축들에게, 공중의 새에게, 그리고 들짐승들과 물속의 고기들의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혼자 고민하며 이름 짓고 돌보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인생을 동행할 짝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아담의 갈비뼈 로 여자를 빚으신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흙을 원재료로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심으로 생령(生靈)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흙에서 시작해서 흙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되는 소망의 존재가 되었다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부부는 이 진리를 서로 잊지 않도록 항상 격려해야 합니다.

 

부부로 살아가는 결혼제도를 함께 지킬 때 복된 삶을 완성하게 됩니다(21-25).

우리들 인간이 평생 배워야 할 진리는, 모든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란 그것을 지킬 때라는 사실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어올 때면, 열매를 매달고 있는 나무와 곡식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무더운 여름 날씨와 거센 바람, 가뭄과 세찬 소나기를 잘 견뎌낸 식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예사롭지 않은 세월을 잘 참고 견디고 이겨낸 것입니다. 은빛 머리카락이 될 때까지, 얼굴에 잔주름이 덮일 때까지, 그리고 거친 손가락 마디가 될 때까지, 함께 사랑의 수고를 짊어진 부부들이 아름다운 것은, 인생의 힘든 과정들을 잘 견디고 이겨내고 통과한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이란 한 사람의 장점과 단점, 아름다운 점과 부끄러운 점 등 모두를 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양면성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부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결혼제도를 빛낸 복된 인생들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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