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668(2022. 5. 15. 부활절 다섯째 주일).

시편 시 76:1-3.

찬송 2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교육이란 알지 못하는 바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은 진정한 교육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는데요. 정말 가치관과 행동을 바꾸는 일은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보다 어쩌면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생각과 행동을 바꾸게 만들 정도로 큰 가르침을 주셨던 잊지 못할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오늘이지요. 스승의 날 아침입니다. 마음의 등대가 되어 주신 그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515일 방송>

 

2. 부활절 다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계 21:1-7을 본문으로 만물을 새롭게 만드시는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새해가 되면, 대학교에 가면, 직장에 취업하면, 결혼을 하면 새로워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곤 합니다. 그러나 기대만큼 새롭지는 않았습니다. 왤까요?

 

사도의 눈에 비친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는 이전의 세상이 아니었습니다(1).

요즘 과학계에서는 4차원 그리고 5차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을 1차원으로, 선과 선이 이루는 넓이를 2차원으로, 넓이와 높이를 포함한 부피의 공간개념을 3차원으로, 3차원에 1차원 시간 개념을 더한 것을 4차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차원이 더해갈수록 시간 개념이 더해져서 시공간을 종횡무진으로 달라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바다의 개념은 더 이상 이전의 사고방식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천지를 목격한 사도는 이전 것들은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우리들이 사용하던 언어나 개념도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황금 길은 더 이상 황금이 깔린 길을 의미하지 않고, 수정 바다는 더 이상 수정처럼 맑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상상 이상의 현상이 일어나버린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죽음과 슬픔 울부짖음 고통이 없는 즐거운 혼인잔치 자리였습니다(2-4).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한 도시로 상징되었는데, 그동안은 사람들이 예배하는 자리는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레위기와 역대 하 그리고 에스겔과 즈가리아 선지자들의 예언된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흘릴 일도, 슬픔에 가슴 칠 일도, 울부짖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새 예루살렘인 천국 예배에서는, 눈물과 슬픔과 울부짖음이 아니라, 감사와 영광 그리고 아름다운 찬송이 울려 퍼지게 되는 혼인잔치와 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만드시는 분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야훼 하나님이십니다(5-7).

사람들은 새로워지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이라든지, 창의성이라든지, 아이디어를 나누는 모임을 가지라 충고합니다. 그러나 이런 새로움은 한계성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 근본은 인간이라는 죄 된 존재라는 것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회개라고 말씀합니다. 회개는 세속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세례를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에 죽고 의에 사는 일, 그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날마다 죄에 죽어야 하고, 날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의로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자신의 세례를 기억하는 삶이야말로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661.

시편 시 74:8-11.

찬송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 5분만 온데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 사 중에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정태봉 님의 글,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을 읽어드렸는데요. 곁에 계시건 그렇지 않건 어머니라는 이름만큼 언제 불러봐도 뭉클한 이름이 또 있을까요?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58일 방송>

 

2. 부활절 넷째 주일의 복음서 요 10:22-30을 본문으로 절실한 바른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신앙이란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현실 세계만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향해 전력투구하는 삶의 태도가 뒤따라야 하는 때문입니다. 일사각오의 삶 말입니다.

 

바른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며 성령의 감동감화에서 출발합니다(22-24).

때는 수전절(혹은 봉헌절)로 유대인들은 예수께 나아와 당신은 얼마나 더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하렵니까?”고 질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구세주)를 기다리는 민족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인물이 출현하면 메시야가 아닐까 기대감이 증폭되었습니다. 나다나엘 호돈의 <큰 바위 얼굴>의 얘기처럼 말입니다. 예나 제나 위대한 인물상은 힘을 가진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반신반의한 까닭이 이 문제였습니다. 모든 신앙의 문제는 이성의 가치를 앞세우는 일이고, 진리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묵상과 신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성적 가치는 인간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다가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곧 말씀이나, 성령의 감동감화가 선행해야 했습니다.

 

바른 신앙이란 주님의 양들에게만 허락된 은총이며 특권이었습니다(25-27).

참된 신앙을 가질 때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 될 때만 참된 신앙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인간 자신이 출발점이고, 후자는 주님의 부르심이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은 인간은 이성(理性)의 범주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영역인 신앙을 통하지 않고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힘쓰고 힘쓸 일은 주님의 양이 되기를 간절히 비는 일입니다. 공부를 잘 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듣게 될 충고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라.”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선생님의 가르침이 귀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만 스승의 진심과 사랑과 희망이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제자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승을 닮은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바른 신앙으로 살려는 주님의 양들은 주님께서 돌보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28-30).

제가 사는 아산 공세리 성당에는 박씨 3형제(박의서-원서-익서)와 다른 25분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습니다. 순교를 목전에 두었던 박씨 3형제는 평생 실()하게 주님을 섬기지 못한 잘못을 뉘우치며, 주님의 부르심을 기쁘게 맞는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는 순교자적인 삶을 최상의 은총으로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기독교가 내세우는 최고의 가치란 미래에 있게 될 영원한 삶에 두는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누구도 그들을 주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천명하십니다. 그들을 돌보고 지키는 것은 주님께서 소중하게 맡으신 임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염려하는 우리의 영원한 미래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외 아드님,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맡아주시겠다 하신 약속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어버이 날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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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54.

시편 시 73:13-15.

찬송 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엄마 아빠는 아기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연구도 하고요, 어른들에게 도움도 구하기도 하면서, 많은 노력을 기우리지요. 또 요즘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태명이라 고해서 미리 이름을 지어놓고 많이 불러주던데요. 막연한 대상으로 부르는 것 보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더 각별한 애정과 의미를 갖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KBS FM 1, 새 아침의 , 2007428일 방송>

 

2.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로 부활절 기간에 행전을 읽는 전통을 따라, 행전 9:1-22을 본문으로 회개의 위력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신앙인으로써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큰 힘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놀랍게도 회개입니다. 단순히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회개의 사건이 아니라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회개가 그런 큰 힘을 가진 것일까요?

 

회개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1-9).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인물은 사울이었습니다. 출세지향적인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그는 문자 그대로 유대교 신앙에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당시의 이단자로 취급받던 예수쟁이들을 즉결 처분권까지 받아서 유대전역은 물론 이웃나라까지도 쫓아다니면서 예수쟁이들을 잡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신앙이란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박해를 당한 우리 인류사에는 포악하고 잔인한 근본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사울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주님은 그런 사울을 찾아가셨습니다. 요르단의 수도 다마스쿠스에 다다를 즈음에, 백주 대낮에 그보다 환한 빛 가운데서 그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사울아,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셨고, “당신은 누구십니까?”고 되물었습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고 대답하신 후, 주님은 그에게 앞으로의 사명을 주셨고 그를 지도할 인물을 소개하셨습니다. 사울은 눈을 뜰 수 없었고,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사흘을 지냈습니다. 회개는 주님을 만날 때 시작되었습니다.

 

회개의 과정에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또 다른 일꾼을 통해서였습니다(10-19).

우리가 살아가는 인류사를 하나님의 구속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참여하시는 것보다는 우리들 인간을 앞세워서 진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 말하는 창조된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신 뜻이었습니다(1:26-28).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일터인 세상에 부름을 받은 일꾼들이라 말해야 합니다. 사울을 부르신 주님은 그를 깨우치고 훈련시킬 일꾼을 다마스쿠스에 준비시켰는데, 그 이름이 아나니아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의 율법에 능통하고 실행력이 있는 사울을 능가하는 지도자를 준비해 두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안수해서 눈을 뜨게 하는 환상을 아나니아에게 보여 주신 후, 그의 두렵고 주저하는 마음을 이겨내게 하시고, 욥바에 머물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 그간의 경위를 전한 후 성령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고, 세례를 주어 강건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거듭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회개는 예수를 박해하던 자를 예수를 증거하는 전도자로 역전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20-22).

우리는 회개라는 성경의 단어를 보다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이라고 사전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조차 회개라는 말을 상투적인 관용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 예배에 참석할 때만 사용하는 용어로 말입니다. 회개라는 말을 뉘우침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회개라는 성경 언어는 메타노이아라는 말로, 방향을 바꾸는 행동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시궁창에서 푸른 하늘로 눈길을 바꾸고, 죄를 향해 달려가던 삶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감사와 찬양하는 삶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사울은 회개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 이상 예수를 박해하는 포악하고 잔인한 살인자가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하는 평화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매일 매일을 회개를 결심했던 세례를 기억하며 살아야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 교회(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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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47.

시편 시 72:8-10.

찬송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꽃 피는 계절에는 행복한가? 이 질문에, 뜻밖에도 아니다.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일수록 의기소침해 진다.” 이런 통계가 있더라고요. 꽃이 화사해 질수록 그 옆에서 초라해 지는 경험. 아마 많은 분들이 해 보셨을 텐데요. 이럴 때는 어떻게 자신을 마인드 컨트롤합니까? 햇빛을 받으며 자전거 타기, 수첩에 내 친구들 이름 적어보기 따뜻한 물로 오래 샤워하기, 공원 걸어보기, 내 인생의 역사 적어보기. 내 이름 석 자 크게 불러보기. 요즘 같은 날에는 이런 처방 한번 내려 보시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415일 방송>

 

2. 부활절 둘째 주일의 사도서간 요한 계시록 1:4-18을 본문으로 요한이 본 환상의 의미와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구약의 다니엘서나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묵시록 혹은 환상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감추어두셨던 것을 꺼내어 보여주신 책이니 얼마나 심오한 말씀이겠습니까? 주관적이거나 현상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묵시서는 박해시대라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이해해야 합니다(4-8).

계시록은 1세기 편지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삼위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는 점입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오실 그분은 성부 하나님을, “일곱 영신은 성령 하나님을, 그리고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략> 여러분에게 은총과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고 말입니다. 특히 구름을 타고 오실 분이라고 구약 단 7:13에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 편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의 오심을 재확인할 뿐 아니라, 두려움과 위기 속을 살아가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후광을 입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절하게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심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절체절명의 시련과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영생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고 있을 때, 사람들을 강하게 붙잡아 주는 것은 죄에서 해방시켜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흔들리는 신앙을 굳세게 붙잡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9-16).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라고 전하고 가르친다는 이유 하나로,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당하고 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1세기 말 엄청난 기독교 박해가 도미티안 황제 때 일어났는데, 적어도 계시록의 저자는 요한의 권위를 가지고 초대교회를 도우려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 들렸는데, 자신이 보는 환상을 기록해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라 하셨다는 신탁을 전합니다. 그래서 그 음성이 나는 곳을 보게 되었는데, 일곱 황금등경이 있고, 그 중앙에 긴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신 분이 서 계셨는데, 오른손엔 일곱별을 쥐고 계셨는데, 그 음성을 큰 물소리 같았다고 했습니다. 일곱 교회란 전체 교회를, 일곱별이란 모든 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계시록의 저자는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알리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이 본 환상은 죽음 저편의 영원한 삶을 전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17-18).

주후 81-96년에 로마 황제로 재위한 도미티안은 황제 숭배를 강요한 사람으로, 크리스천이었던 집정관 아킬리우스를 사형에 처하고, 예수님의 친족들을 로마로 연행하고, 요한을 밧모 섬에 유배시키는 등 박해자 네로를 계승한 가장 잔인한 황제였다고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죽음 저편에 있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게 하는 말씀 주님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 나와 같이 너희도 영원히 살리라.” 는 것이 계시록의 저자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익수스판 주석서(ΙΧθΥΣ)에서 칼뱅의 말, “예수를 믿는다는 때문에 개처럼 끌려 나가 죽임을 다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대들은 하나님께서 구원받도록 예지 예정하셨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말처럼 들리는 것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하겠습니다. 죽음 저편에는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640호.

시편 시 71:10-12.

찬송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는 봄을 멘델스존의 음악으로 기억하고요. 또 누군가는 하얀 목련과 노란 개나리의 웃음으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티 에스 엘리옷의 시구처럼 장난 계절로 기억하는 분도 계시겠지요. 특히 봄에 외로움을 느끼는 분들이 많으시던데, 마음이 순수할수록 더 계절을 잘 탄다고 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마도 요즘 꽃이 핀다고 또 꽃이 졌다고 마음이 울렁거리고 있지 않을까 싶네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414일 방송>

 

2. 주님의 부활절의 복음서 눅 24:1-12을 본문으로 부활은 이해하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적은 이성과 이해에 바탕을 두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이성이나 이해는 인간의 차원일 뿐,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차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생명과 사랑의 신비나 은총이 하나님께 근거하듯 말입니다.

 

부활 소식을 처음 들은 세 여인들은 부활신앙의 근거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1-9).

성경에는 다양한 부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점은 하나같이 인간의 이성에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빈 무덤을 목격한 세 여인들의 얘기나, 천사를 만난 이야기 모두 부활을 이해시키기에는 모자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천사의 충고에서 중요한 신앙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자가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 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였을 때, 세 여인은 그 말씀을 기억하고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신앙이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고 싶다고 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부활하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허락된 축복입니다.

 

헛소리로 들린 부활소식을 반신반의했던 베드로를 움직인 것은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10-12).

의심하지 않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성과 신앙의 거리는 지구 정반대처럼 멀리 떨어진 차이입니다. 4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차원을 이성이라 하고, 하나님의 차원을 신앙이라 정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성과 신앙은 충돌하기 마련이며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헛소리로 치부할 뻔한 여인들의 부활소식에 베드로만은 깨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에 무게를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달려간 무덤에서 다시금 이성과 신앙이 충돌하였습니다. 흔들리는 이성을 붙잡은 것은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 희미하던 신앙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셨습니다. 침몰해 가는 배에서 기쁨으로 찬송하는 모라비안 형제들을 보는 순간, 요한 웨슬레의 마음은 뜨거운 신앙으로 충만하게 한 것은 성령 하나님이셨습니다. 할렐루야를 외치도록 축구단을 창설한 한 장로님의 마음을 성경께서 깨우치셨습니다.

 

부활신앙의 위력은 인간 이성의 힘과 지혜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며 은총입니다(16:31).

죄인이 용서받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은총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완전히 타락한 죄인이라고 고백할 때, 그때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성에 대해서 완전 포기하게 될 때만 새로운 하나님의 차원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제가 현역시절에는 사흘 금식을 하며 성경을 일독하곤 하였는데, 기력이 쇠하여 바닥에 내려갈 때, 참된 지혜와 용기가 생기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인 말씀을 의지하는 신앙이 꿈틀거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는 장벽 너머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이성과 이해를 앞세워 하나님과 논쟁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객기를 부리는 순간입니다. 이런 우리를 성령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보듬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홀로 벌떡 일어나 믿음에 이르도록 간구할 차례입니다.

 

3.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 인사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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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33.

시편 시 69:29-32.

찬송 48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슴에 꿈을 품고 있는 사람은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물론 실패와 낙심 때문에 힘들어해도, 곧 일어나서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겠지요. 평소에 얼굴이 밝고 웃음이 많은 사람은 역시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비록 가볍게 보여도, 그 웃음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그가 행복한 세상의 중심이 되겠지요.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지금은 비록 어리석게 보여도, 그 마음의 작은 기쁨들로 행복한 이야기를 만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214일 방송>

 

2. 오늘은 우리 주님의 종려주일로 구약 신 32:36-39을 본문으로 신앙을 흔드는 문제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번 주간은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온갖 수치와 고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무덤에 묻히시는 일련의 사건들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이런 때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는 최악의 순간을 맞게 됩니다.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으나, 모세의 노래는 흔들리는 신앙을 더욱 더 굳게 붙잡아 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인 연민에 눈을 뜨라 말씀하십니다(36).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사랑이란 은혜와 긍휼의 사랑입니다. 은혜의 사랑이란 넘치고 넘치는 사랑을 말하고, 긍휼의 사랑이란 끝없이 참고 기다려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인 긍휼하심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무력한 백성이 되었고, 힘을 잃었으며, 스스로는 도저히 구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무엇이 아쉬워서 죄와 죽음을 선택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느냐고. 그 대답은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모세의 노래는 이스라엘이 의지하던 우상의 실체를 찾으라 말씀합니다(37-38).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이 자신들의 필요를 따라 만들어 놓은 허깨비 신을 말합니다. 삶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확실하니까,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곤 합니다. 계룡산 자락에 우뚝 솟은 미륵불은 약병을 손에 든 약사불인데, 책을 든 학사불도 있다 합니다. 그러니까 병든 사람은 약사불에 제물을 바치며 기도를 하고, 합격을 바라는 수험생은 학사불에게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한국 개신교회도 이를 따라서 기우제 기도회나 합격기원 기도회 등을 가짐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합니다. 모세는 힘차게 외칩니다. “그들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중략> 너희를 도와달라고 하여라.” 들어줄 수가 없는 우상이기에 더욱 더 소리를 질러야 할 것입니다. 소위 주삼창을 외치는 이들은 자신들의 우상인 허깨비 신에게 소리치는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엘리야를 찾아오셨던 야훼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왕상 19:9-14).

 

모세의 노래는 야훼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말씀합니다(39).

우리의 신앙은 나름 경험적 과정을 요구합니다. 경험적 과정에는 직접 체험하는 경우는 물론 타인의 경험을 통한 간접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경험적 과정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 기초를 이루는 출애굽 신앙체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지를 구체적으로 전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나 가족 등 신뢰할 수 있는 분들의 신앙을 계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를 잘 키웠다고 부러워하는 한 권사님은, 밤늦도록 공부하는 자녀의 곁에서 뜨개질을 하며 고난에 동참했다 간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을 자신의 삶으로 가르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역사하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의 모습입니다. 감사와 평안 그리고 기쁨과 소망이 있는 일상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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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26.

시편 시 69:7-9.

찬송 41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참 고맙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밥과 술을 사 주시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여행할 때 쓰라고 돈을 주시기도 합니다. 고마운 일들을 꼽으라고 하면 한도 끝도 없지만, 제가 특별한 고마움을 느끼는 때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때입니다.”

조병준,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p.12.

 

2. 사순절 다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빌 3:4-14을 본문으로, “크리스천의 인생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인생관이 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짧은 인생 코스를 낭비 없이 효율적으로 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크리스천다운 인생 목표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사울(희망이라는 뜻)은 성공과 출세에 확신을 갖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델이었습니다(4-6).

저의 이종 조카 형제는 첩첩 두메산골에서 태어났지만,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새로운 인생을 산다 전해왔습니다. 가문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인생의 목표를 정하고 매진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엔 열린 문이 많다 말합니다. 사울도 그런 루트를 향해 달리던 인물이었습니다. 출세가도로 가는 길을 찾아냈고, 촌음을 아껴 배우고, 인맥을 쌓고, 앞서가는 지름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불분명한 헛소문에 귀를 막고, 패배자의 길을 거부합니다. 제 주변에는 이런 인물이 제법 많습니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얘기는 꿈이 아니라, 성공가도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뚜벅뚜벅 실천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승리의 문입니다. 내세울 배경도 필요하고, 신분과 계급도 적당히 받쳐 주어야 하지만, 결과만 좋으면 모든 약점들은 다 쉽게 묻혀버립니다. 기독교도들을 색출 처단하며 성공 스펙을 쌓았던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바울(작은 자라는 뜻)은 자신의 목표들이 쓰레기처럼 보이고 새로운 목표가 보였습니다(7-10).

성공의 9부 능선에 이르렀을 때, 사울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성공의 스펙이며 영광들이 더럽고 추한 배설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눈앞에 한 무더기의 배설물과 찬란하게 빛을 뿜는 보물들이 나란히 보인 것입니다. 더 이상 비교하고 저울질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는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음의 음침한 무덤 문을 여신 주님에게서 새로운 인류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온갖 힘으로 쟁취하는 역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희생하며 내어주는 위대한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인간 중심의 율법에 의한 공로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은 것입니다. 뺏는 기쁨이 아니라 주는 기쁨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도가 붙잡았던 유일무이한 희망이란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11-14).

여러분에게 가장 기대되는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아직도 일확천금을 기대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이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크고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보시면 어떨까요? 흔한 말로 생각하기 달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세상에는 생각하기에 따라 180도 다르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움과 원망으로 생각하면 세상은 어둡기 짝이 없지만, 이해와 사랑으로 생각하면 아름답고 밝기만 하다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인생을 바꾼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게는 특별한 큰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만주 큰 아버지입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오신 할머니를 작은 부인으로 삼으셔서 낳은 자식입니다. 그 뒤에 저의 할머니가 아들 셋을 줄줄이 낳으셨습니다. 만주 할머니 덕분에 할머니는 예수님을 믿었고, 고맙다며 보듬어 주셨습니다. 온 가족이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3. 저는 매월 첫째 주일엔 주성청각장애인 교회(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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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619.

시편 시 68:19-21.

찬송 41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콩밭에 콩이 나고, 팥밭에 팥이 난다.’ 는 격언이 있다. 밭은 갈아도 거기에 뿌려진 씨앗에 따라 여러 가지 곡식이 자라난다는 뜻이다. 씨앗은 다만 식물이나 동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도 있다. 그래서 인류라는 유개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이라는 종개념이 생긴 것이다.” 지동식, <돌 세 개>, p.92.

 

2. 사순절 넷째 주일의 복음서 누가복음 15:1-7을 본문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우리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수도 없이 들었던 말씀임에 비해 여전히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모르겠다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순종하는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판에 두고, 말썽꾸러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에서 상식을 파괴합니다.

 

성경말씀 역시 그 배경을 주목해야 합니다(1-3).

최근 유튜브 방송에 나오는 논객들이 배경을 무시하고 상대를 난처하게 하는 말을 하는 우를 자주 범하곤 합니다. 주도권을 선점하기 위해서 일단 충격요법을 택하는 것 같으나, 이런 논란은 하루 빨리 개선되도록 시민들이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이른바 <한 마리 잃은 양> 비유는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이 죄인들을 가까이 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그런 배경에서 나온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종교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문난 죄인들을 스스럼없이 대하고 식사까지 함께 하는 것에 화를 내는 그들을 향해서 마음먹고 하신 비유였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순종하는 99마리 양과는 달리, 말썽꾸러기 한 마리 양을 비유의 한 복판에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여기 이 한 마리 양을 주목하시고, 이 한 마리 양에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과연 한 마리 잃은 양에 대해서 관심가지는 세상일까요?(4-5).

우리가 사는 시대를 자유 민주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민주주의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하는 제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다수의 의견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 소수의 의견이나 주장이 묻혀버릴 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헌법재판에서는 소수의견이라는 이름으로 밝히도록 하고 있습니다. 991이라는 수적인 대결은 초라하고 비참한 현실을 대변할 뿐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가치가 없어 보이는 한 마리 양을 그리고 모두가 외면하는 죄인 한 사람을 찾고 찾으시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죄인 한 사람은 세상 모든 사람이라는 뜻과, 다른 하나는 같은 죄인으로써 연민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울고 있는 양 한 마리, 곧 회개하는 죄인을 기뻐하신다고 말입니다(6-7).

우리는 양 무리에서 이탈 혼자서 느끼는 온갖 두려움과 고통 속에 있는 양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의식했던 의식하지 못했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비웃음을 받게 된 죄인을 상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잘못을 저지르고 도피처로 군 입대를 선택했는데, 아주 멍청한 짓이었습니다. 빠른 시간에 남한산성에 수감되었습니다. 그 누이가 저를 찾아와서 헌병대장에게 탄원서를 써 달라는 것과, 피해자 가족들에게도 선처를 구한다는 입장문을 받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갑자기 죄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벌써 40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청년은 풀려났고 정상적으로 군복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할 때, 은총이라는 말과 연민이라는 말이 필요합니다. 넘치고 넘치는 사랑인 은총과, 끝까지 참고 기다려 주시는 사랑인 연민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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