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43.

시편 시 106:7-8.

찬송 44, 267, 3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연주의 학자였던 헨리 소로우가 이런 말을 했지요. “자신을 들여다보라. 마음속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별이 천개나 더 있다.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라. 그리고 그 우주의 주인이 돼라.” 글쎄요. 나는 과연 나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요?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이 훨씬 더 많지 않을까요? 마음에 숨겨진 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찾아 가는 그런 한 주간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15일 방송>

 

2. 교회력 마지막 셋째 주일의 구약 출 3:1-15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소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은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출생을 비롯 소명과 죽음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소명이 불가항력적이지만 생의 임무와 죽음에 관해서 만큼은 최선의 준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모세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5).

흔히들 모세의 삶을 삼등분하곤 합니다. 애급 왕자로써 40, 이드로의 목자로써 40,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인도자로써 40년이 그렇습니다.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내 노예로 태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애급 왕실의 왕자로 살 수 있었던 것도,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 이드로의 목자로 살게 된 것도,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에 앞장선 지도자가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운명적인 삶이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소극적 자세보다는 적극적인 자세가 더 잘 어울리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발을 벗는 각오와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삶,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다른 삶을 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삶이란 구별된 삶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으로 초대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역사의식을 갖는 삶으로 부르셨습니다(6-8).

많은 사람들은 현실에 충실하려고 카멜레온처럼 살고 있습니다. 역사의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을 믿는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배신과 반역의 삶을 되풀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은 역사의 연속성을 믿는 사람들을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이심을 천명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백성들의 억압당함과 고통 그리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백성들을 위하여 약속의 땅을 준비하시고, 그 장대한 여정에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요즘 역사를 잊은 백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들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교회는 성소수자 문제로 큰 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에 줄을 서야 유리한지를 따지는 갈팡질팡 파들이 많다고 합니다. 참된 역사의식이란 하나님 말씀의 연속성을 믿으며, 자신의 신앙과 신념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권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신앙을 무장할 지도자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9-15).

청소년기의 젊은이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소명의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자신을 부르신 자리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 차례 대학 시험에 낙방을 한 것을 두고, 주님의 종으로 부르시려는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기중심적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모든 소명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것으로 이해해야 옳습니다. 농부도 직장인도 기술자도 그리고 교사와 정치 지도자도 말입니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를 천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자리의 경중은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 훗날 하나님 앞에서 따지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한 개인으로써가 아니라 민족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앞장을 서야 하는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시듯, 하나님은 우리들을 부르신 것을 후회하지 않으십니다(11:29).

 

3. 2023년도 주일 설교계획서를 Tistory에 올렸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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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836.

시편 시 105:29-32.

찬송 23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된 여인 모습의 조각품을 사랑했답니다. 왕으로써 권력을 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상형의 여인을 만나지 못했던 그는, 날마다 상아로 된 여인상을 보면서 좋아했고, 잠을 잘 때도 옆에 두고 잤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얘기인데요.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 넣어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답니다. 한 남자의 지극한 사랑이 결국 차가운 상아조각을 따뜻한 인간으로 변하게 했던 거지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 것인데요. 무언가 간절히 원한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의미의 피그말리온 효과, 우리도 한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1029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스물한째 주일의 사도서간 살후 1:1-12을 본문으로 믿음으로 시련을 끝까지 이겨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들 인생은 시련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예외 없이 시련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피할 수 없다면 이겨내는 도리밖에 없는데, 우리들 신앙인은 믿음으로 이겨내는 게 옳바른 일입니다.

 

고통을 공유함으로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 사이에는 진한 추억을 가졌습니다(3-4).

데살로니가라는 도시는 유럽 마케도니아에 있는 도시로,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할 때 빌립보를 거쳐 선교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낯선 땅 유럽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유럽의 첫선교지는 빌립보로,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빌립이 4세기에 세운 도시로, 행전 16:11-40에 의하면, 사도는 이곳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한 소녀를 고쳐준 일로 인해서, 그 소녀를 고용한 주인에게 손해를 끼쳤다며 고소를 당해, 옥에 갇혀 곤욕을 치른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빌립보 감옥을 탈출 데살로니가로 도망쳐 나와, 이곳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을 선교했는데, 이곳에서도 유대인들의 시기 질투로 광장으로 끌려가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 서신 중 최초의 서신으로, 교우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 정도로 소수였을 테지만, 사도에게는 잊지 못할 선교지였음에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평가는 주님께서 심판하실 주님의 재림 때에 있을 것이라 말씀합니다(5-10).

사도 바울의 종말관은 물론 성경의 종말관은 다양합니다. 본문에서처럼 임박한 종말관과 함께 미래적 종말관, 그리고 실현된 종말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가 가까웠다”(4:5, 고전 7:29, 13:11-12)는 임박한 종말관이 있는가하면, 배교하는 일과 멸망의 자녀들의 등장 등 일련의 사건이 있은 후에 주의 날이 임재 한다는(살후 2:1-10) 미래적 종말관이 있고, 이 밖에도 주님의 나라가 내 마음 속에 이루어졌다고 인식하는 소위 실현된 종말론까지(13-16) 세 종류의 종말관을 성경이 말씀하기에 혼란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 보다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바르게 적용할 수 있다고 하면 모두 정당하다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믿고 행동하는 모든 신앙행위가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 앞에서라는 점을 확신해야 한다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사도의 간절한 기도는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11-12).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의 심판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대체로 삶의 중요한 순간에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느냐 마느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부흥사들이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들은 믿습니까?”라고 물을 때, “아멘!” 하는 이들에게 구원받았다고 선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기독교 구원관을 싸구려 라고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믿음은 한결같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평신도의 신앙은 천국 꼭대기에 있고, 신학교 1학년생의 신앙은 혼란가운데 있으며, 신학교 4학년생이 되면 무신론자가 된다는 우스개도 있습니다. 신앙의 편차가 극심해서 널뛰기 같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크리스천에게 가장 큰 시련은 역경이 아니라 순경이며, 배고품과 질병이 아니라 부유하고 건강할 때라는 것입니다.

 

3. 오늘 생거 진천교회(묵상식구 김동환목사) 설립 예배가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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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829.

시편 시 105:7-10.

찬송 508,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막스 프리슈라는 한 스위스의 작가는, 사랑이라는 것을 이렇게 3마디로 요약했었습니다. “사랑은 자극을 주는 것, 모험을 주는 것, 흥미진진한 것”. 뭐 크게 새로울 것 없는 요약이지요. 하지만 그 뒤의 덧붙인 다른 말이 새롭고도 아픈데요. “사랑하는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있으면 이 세상 최고의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것. 이 말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한 주일 사랑하면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KBS FM 1, FM가정음악, 20071022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스무째 주일의 복음서 말씀인 눅 18:9-14을 본문으로, “우리는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가끔 뚱딴지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습니다. “행복한 삶이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입니다. 그럴 때 오늘의 본문이 매우 적절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는 사람은 결코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하십니다(11-12).

어느 시대나 잘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이 실패한 것 같고, 패배자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른바 성공한 인생이라고 자부하는 한 사람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 앞이건 하나님 앞이건 자랑거리가 많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욕심 없이 살았고, 부정직하지 않았으며, 음탕하게도 살지 않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한 주간 동안에 두 번씩이나 금식기도를 하고, 십일조도 철저하게 드렸다고 자랑을 하였습니다. 도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나무랄 데가 하나 없는 완전한 삶을 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예나 지금이나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자랑할 거리가 없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13).

두 번째 등장시킨 인물은 의외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인 모습밖에는 내 세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한 마디 모기 소리만 하게 하나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 사람을 주님은 세리였다고 하셨습니다. 세리라는 사람은 예수님 당시 모든 사람들이 다 알만큼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의 앞잡이였고, 부정축재자였으며, 자기 민족을 배신한 인물로 지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보통의 인간으로서나, 신앙인으로서도 한없이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면서 뜨겁게 눈물을 흘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찾아 볼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잘 살고 잘못 살고는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9-10, 14).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우리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잘못 설정됐다는 것입니다. 우선 누가 우리의 삶을 평가해야 적절한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60년 만에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자랑거리들이 많은 친구들이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재능이 출중한 이도,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는 이도, 자녀를 잘 키운 이도 있었지만,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삶을 평가하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 뿐 아니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어찌된 일인지,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그리고 직장도 생활도 기독교 신앙과 떨어질 수 없는 환경이 주어졌다며 하나님의 은총을 꼽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의 평가를 전전긍긍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 그것은 다름 아닌 죄인의식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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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822.

시편 시 104:19-23.

찬송 73, 4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인 만큼, 그냥 지나가다가 힘들이지 않고 주울 수 있는 해변의 조약돌 같은 것은 아니야. 그것은 예술가가 혼동의 세계에서 고심에 고심한 끝에 만들어 낸 생명체와도 같은 거야.” 서머 셋 모음의 [달과 6펜스] 중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는 음악을 듣거나 그림을 보면서 쉽게 아, 아름답다. 이렇게 말하지만, 그 뒤에는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예술가들의 열정과 땀이 숨어 있지요. 이렇게 어렵게 탄생한 예술 작품이기에 그 아름다움과 가치가 더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016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열 아홉째주일로 창세기 32:4-30을 본문으로 야곱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울 점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야곱의 기도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가 무엇이며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생활을 일컬어 신앙생활이라고 말하는데, 기도가 신앙의 진면목을 대변하는 때문입니다.

 

죄의 가공할 위력을 실감한 것이 야곱의 기도의 출발점이었습니다(10-23).

프랑스의 수학자 쥘 앙리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eé/1854.-1912)는 죄는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는 듯하지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땐 또렷하게 되살아난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는 하나님께 용서받기까지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가 가진 장자권과 축복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았던 사람으로, 형의 복수를 피해 22년간 외삼촌 집에서 피난살이를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가족과 재산을 정리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안 큰 근심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의 복수의 칼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많은 재산을 내놓아 형의 환심을 사려고 했지만, 죄의 문제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이 없이는 헛된 일인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는 절박한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죄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기도가 야곱을 통해 배우는 기도자의 모습입니다(24-26).

요즘 대통령의 언사(言事)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유나 평화와 같은 말은 그 말 자체로는 매우 모호하고 애매할 수 있어서 구체적인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최선이라는 용어도 아무 때나 함부로 사용할 말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생활에 있어서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예를 들자면 인디언식 기도처럼 이루어질 때까지엎드리는 기도의 자세일 것입니다. 오늘 야곱의 기도에서는 야곱이 천사를 붙잡고 씨름했다는 일화가 나옵니다. 씨름이란 두 사람이 공정하게 상대의 샅바를 양손으로 붙잡고 땅에 넘어트리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씨름은 땅에 넘어짐으로 끝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야곱이 바라던 소원을 이루기까지는 샅바를 악착스럽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야곱의 엉덩이 뼈(고관절)를 쳐서 위골시킨 다음에야 샅바를 놓고 말았다는 내용입니다.

 

야곱은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여 주심을 깨달았습니다(27-29).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자신의 소원이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있겠지만, 보다 더 큰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시는 것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가끔 언급하는 실화입니다만, 저의 교우이며 학생이었고 또 교회 실습전도사로 저를 돕던 분의 간증입니다. 피난민들이 몰려 살던 매봉산 기슭 어느 큰 바위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고 합니다. 마침 그 텐트촌에 세워진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세 가지 기도 제목을 갖고 기도했다 합니다. 첫째는 단 한 평이라도 좋으니 내 이름의 집을 갖는 것, 둘째는 대학을 졸업해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겠으니 대학을 졸업하기, 셋째는 자신이 음악을 좋아하니 근사한 피아노 한 대를 갖는 것이었다 합니다. 세월이 흘러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살던 어느 날 그 기도제목들이 모두 다 이뤄져 있더라 합니다. ‘거짓말쟁이라는 뜻의 야곱을, ‘하나님이 싸워주셨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하나님께서는, 황공하게도 자신과도 동행하심을 깨달았다고 말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815.

시편 시 103:18-20.

찬송 10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수영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 라는 수필에서요.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둔짝,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댁, 벼룻돌, 부싯돌 등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꼽았습니다. 이 말들은 모두가 시인이 어린 시절 동네 어귀에서 자주 들으면서 자랐던 말들이라고 하는데요.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는 것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 이렇게 생활이 바뀌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도 참 변화가 많았는데요. 외래어나 인터넷 신조어에 밀려서 우리말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개를 꼽으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말을 고르시겠습니까?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09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열 여덟째 주일의 사도서간 딤후 2:1-13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의 병사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제복을 입고 계급장을 달고 있는 구세군 지도자들을 볼 때면 군인정신이 번쩍 들곤 합니다.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크리스천은 군인과 같은 자세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1-4).

첫 번째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선생님의 추천으로 입주(入住) 가정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지방에서 제일 부잣집이었는데, 일곱 번째 입주교사라고 했습니다. 맡겨진 학생은 공부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몇 달이나 버티나 그것만 셈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대학에 입학하고서도 몇 년을 출퇴근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터득한 공부비법(?)이 생겼습니다. 공부는 선생님(학교)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생활을 바르게 길들이는 것보다 더 좋은 교육방법이 없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크리스천의 생활도 다를 바 없습니다. 누군가 본보기가 될만한 대상을 흠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군인을 차출한 것 같습니다. 외모는 물론 그 정신은 탐내야 할 정도입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거기에 사명감까지 투철합니다.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대의명분에 딱 어울리는 우리들 크리스천의 표본입니다.

 

크리스천은 운동선수와 같은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십니다(5-7).

19672, 제가 상무대 기갑학교에 입교한 때입니다. 어느 자정을 조금 지난 시간, 저의 구대원 40명은 연병장에 선착순으로 집합했고 곧 바로 연못가로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구대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입수(入水)!”라고 외쳤고, 우리는 살얼음을 깨고 배꼽 높이의 물속에 뛰어들었습니다. 이게 당시 운동선수들이 받는 훈련이라면서, 죽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라 안심시켰습니다. 탱크병사들 보다 운동선수들이 훨씬 더 힘든 훈련을 받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는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인한 몸과 정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강철과 같은 몸과 정신은 머리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찌는듯한 더위와 살을 에이는 추위를 이겨내는 훈련은 필수 과정이라고 말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이런 훈련이 필요한 것은 그만큼의 시련과 역경이 찾아온다는 각오이며 대책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하십니다(8-13).

크리스천의 모델로 제시한 군인과 운동선수는 각기 나름의 목표가 확실합니다. 조국을 지키는 일이며 승리의 영광을 거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일의 삶을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기억하는 생활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처럼 자신의 무덤 주변을 관광지로 만드는 것이나, 유명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매우 소박하면서도 단순한 삶, 예수 그 분이 나의 구주이심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신 예수가 우리의 구주시다는 신앙을 뜻합니다. 이렇듯 성경이 가르치는 크리스천의 신앙이란 매우 단순하면서도 분명합니다. 예수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믿음을 날마다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란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없이 가능한 삶, 곧 예수가 나의 구주이심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입니다.

 

3. 오늘은 주님의 날 주일이면서 우리가 자랑하는 한글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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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808.

시편 시 102:23-25.

찬송 23, 338,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가까이 들여다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입니다.” 전설적인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남긴 말입니다. 하루하루 걱정거리, 고민거리가 끊이지 않고, 정말 내 삶은 왜 이렇게 힘들까 생각 들 때도 많지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면 또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요.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너그럽게 삶을 바라볼 수 있을 테고요. 그러면 또 오늘 하루도 비극이 아닌 기분 좋은 희극으로 마무리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7102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열일곱째 주일로 누가복음 17:1-6절의 말씀을 본문으로 겨자씨 한 알의 믿음으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은 일기를 쓰듯 매일의 삶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일화들을 적절하게 편집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4절은 죄의 유혹과 용서를 주제로, 5-6절은 믿음의 힘을 주제로 말씀하신 일화들입니다.

 

우리들 인간의 삶에서 죄의 유혹은 매순간 발생하며 그래서 서로 용서해야 살 수 있습니다(1-2).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의 차이는 죄의 주제가 되풀이 되고 있느냐로 구별됩니다. 죄의 문제는 우리들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 어디를 가든 죄의 문제가 쉼없이 튀어나오지만, 남의 얘기 수준이라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죄는 모든 사람이 짊어지고 가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치명적인 독화살과 같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남의 죄라도 들추어냄으로 자기 자신의 죄를 감추려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1977년 영화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어느 날 밤 행인을 차로 친 남녀 고등학생들이 사체를 유기함으로 사건이 종결되는가 했지만, 1년 후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고 적힌 의문의 편지가 날아오면서 관련 인물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는 줄거리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인간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적어도 숨을 쉬고 살기 위해서 그리하라고 말입니다. 용서는 깨끗이 지워버린다는 뜻입니다.

 

크리스천으로써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만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3-5).

제자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제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일까요? 놀랍게도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믿음이란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기를 원해서 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형제가 죄를 짓고 회개하거든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8:22에서는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 한번의 용서도 어렵고 힘든 일인데, 어떻게 490번이나 용서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믿음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이 말씀하신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먹보다 더 검은 내 죄악을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신 주님의 공로를 믿는 믿음에서 출발한 믿음이었습니다. 나를 검고 붉은 죄악에서 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신 주님의 공로를 믿을 때만 가능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은 주님을 우리 삶에 모셔들이는 일이었습니다(6).

성경을 읽을 때 흥미로운 점 하나는 우리 주님께서 믿음을 크고 작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4:31에는 물위로 걸어오신 주님을 보고, 자신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구한 베드로가 풍랑앞에서 물 속으로 빠져들어갈 때 어찌하여 믿음이 적으냐?”고 책망하셨는데, 8:10에는 자신의 부하가 죽어갈 때 주님께서 네 집으로 가자고 하셨을 때, 말씀만 하시면 되겠다는 백부장에게 이런 믿음을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보지 못했다 칭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에 관한한 얼마나 많은가 하는 양의 문제도 아니고, 얼마나 특별한가 하는가도 아니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앞세우는 믿음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실 것을 믿습니다. 바로 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시는 때문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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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801.

시편 시 101:6-8.

찬송 54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들의 기막힌 요리법의 핵심은 적당함입니다. 계측할 수 없는 적당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적당함이 요리의 비법이지요. “소금은 얼마나 넣을까요?” 여쭈면, 그저 조금, 적당히 이렇게 답하십니다. 적당할 때 만나고, 적당한 때 떠나고 적당한 때 쉬고, 내가 있어야 할 적당한 곳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참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살면서 자주 느끼곤 합니다. 적당한 선을 찾을 수 있는 적당히의 미학, 생활 속에서 더 잘 녹여내고 싶어집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929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열여섯째 주일로 구약 아모스 6:1-7을 본문으로 현상이 아니라 방향성이 문제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시대를 꿰뚫어보는 혜안을 가진 스승들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의 출세와 성공만을 저울질 하는 사람들은 먼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릅니다.

 

위기는 부와 번영의 시대에 싹트기 쉽습니다(1-3).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부르는데, 아모스가 선지자로 활동하던 여로보함 2세의 재위기간을 제2의 황금시대라고 부르곤 합니다. 전쟁의 위협은 물러가고, 문화 사회 경제에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였습니다. 무역과 상업이 발전하고 사람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작용도 따랐는데, 사람들은 술에 취했고, 부도덕하고 타락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시대상을 예리한 정신으로 분석하고 비판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출세가 목표가 되고, 감성에 젖은 노래를 찬송이라 부르는 초점잃은 사람들로 가득 채우고 있을 뿐, 어디에서도 예언자적인 설교를 들을 수가 없는 우리 시대와 너무도 닮았습니다. 위기가 찾아오고 있는 그 때에 남왕국 유다 드고아 출신 양치기 아모스가 혜성처럼 나타나 북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5:24).”고 말입니다. 정의가 실종된 시대를 보고도 벙어리된 지도자는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현상에 머무르는 것에서 방향성으로 신앙의 키를 돌려야 합니다(4-6).

어느 시대나 세상의 물결은 현상에 목표를 두게 마련입니다. 가시적인 목표를 향해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루거나 얻은 판검사 그리고 장군과 교수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바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수단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판검사가 되라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장군이 되고, 세상을 밝히는 진리를 전하는 교수가 되라고 가르치지 못한 것입니다. 목사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세상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앞장서는 삶을 살며 외치는 목사가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방향성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만들자고 헛된 꿈을 부추기며, 부자가 되고 오래 사는 것이 성공한 모습이고 하나님의 축복이라 가르치는 지도자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게 개탄할 일입니다.

 

때가 이르면 역사의 죄인들은 가장 먼저 잡혀갈 것이라 예언합니다(7).

역사를 공부하는 민족은 망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원인부터 결과까지를 기억하도록 교육받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민족 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상을 위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조상을 몰라보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물론, 남의 것을 가로채는 염치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를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꾸준히 가르쳐야 할 사람들은 사회와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두 번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 말과 얼 그리고 이름까지 빼앗기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비극적인 일에 앞장선 배신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뼛속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먼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은 자자손손에게 부끄러운 선조가 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현상이 아니라 방향성에 주목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걸음은 어디로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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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7794.

시편 시 99:4-5.

찬송 4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라는 위대한 연설을 한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우리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꿈을 품고 있지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꿈은 잠들면 저절로 찾아오는 꿈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이루고 싶은 세상에 대한 소망입니다. 역사상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의 꿈은 비록 그 사람이 살아서는 이루지 못했더라도 후손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지금까지 전해지지요. 그리고 우리가 소망하는 작은 꿈들도 있습니다. 오늘 그 꿈들을 담아 둘 수 있는 투명한 작은 병을 선물합니다. 여러분의 꿈을 그 병에 담아 항상 마음 곁에 두고서, 그 꿈을 잊지 않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다보면, 언젠가 그 병에 꽉 차서 소망한 일들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919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 다섯째 주일로, 사도서간 딤전 2:1-15을 본문으로 바른 기도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말로 기도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도의 중요성이 강조되곤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게 기도인가를 주님께 물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른 기도는 무엇인지 물어봅시다.

 

사도는 바른 기도생활이란 모든 이를 위한 다양한 기도라 권하고 있습니다(1).

우리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이고 단조롭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은 세상을 향해 열려진 것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기도가 그렇습니다. 사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나와 내 가족 우리 교회와 우리나라를 벗어나지 못할 때,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슬퍼하실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과 평화는 우리들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몇 사람을 살리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모두 구원하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해서 열려 있을 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최초의 선교사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병원과 학교 고아원 등을 지어 돌봤습니다.

 

사도는 바른 기도생활이란 지위가 높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 명합니다(2-4).

매우 흥미로운 것은 지위가 높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벼슬아치들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생각되십니까? 매우 복잡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 중의 첫째는 그들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 직무를 잘 감당하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자신들의 권한을 잘못 사용할 수 있어서 그 때문에 구원받지 못할까 염려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 주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 겸손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의기투합할 성품을 가져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세상 감투를 쓰더니 사람이 180도 달라진 것입니다. 눈빛과 말씨만이 아니라 성격까지도 딴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교만해졌습니다. 사람을 올려다보는 게 아니라 내려다보았고, 높임말이 아니라 반말을 해댔습니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안하무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친구를 잃을 뿐 아니라, 구원도 받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단 한 분이심을 강조하십니다(5-7).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잠깐 멈춰 서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 지를 말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려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군가 들어보라고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분은 단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동시에 사람들을 감동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잠자는 하나님을 깨우는 기도나, 전후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정보를 제공하는 기도는 더욱 아닙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을 구하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 뿐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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