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36호.
시편 시 105:29-32.
찬송 23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상아로 된 여인 모습의 조각품을 사랑했답니다. 왕으로써 권력을 누렸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상형의 여인을 만나지 못했던 그는, 날마다 상아로 된 여인상을 보면서 좋아했고, 잠을 잘 때도 옆에 두고 잤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얘기인데요.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 넣어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답니다. 한 남자의 지극한 사랑이 결국 차가운 상아조각을 따뜻한 인간으로 변하게 했던 거지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말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 것인데요. 무언가 간절히 원한다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의미의 피그말리온 효과, 우리도 한번쯤은 그런 경험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년 10월 29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스물한째 주일의 사도서간 살후 1:1-12을 본문으로 “믿음으로 시련을 끝까지 이겨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들 인생은 시련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예외 없이 시련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피할 수 없다면 이겨내는 도리밖에 없는데, 우리들 신앙인은 믿음으로 이겨내는 게 옳바른 일입니다.
고통을 공유함으로 사도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인들 사이에는 진한 추억을 가졌습니다(3-4절).
데살로니가라는 도시는 유럽 마케도니아에 있는 도시로,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할 때 빌립보를 거쳐 선교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낯선 땅 유럽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유럽의 첫선교지는 빌립보로,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빌립이 4세기에 세운 도시로, 행전 16:11-40에 의하면, 사도는 이곳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한 소녀를 고쳐준 일로 인해서, 그 소녀를 고용한 주인에게 손해를 끼쳤다며 고소를 당해, 옥에 갇혀 곤욕을 치른 것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빌립보 감옥을 탈출 데살로니가로 도망쳐 나와, 이곳 데살로니가에서 3주간을 선교했는데, 이곳에서도 유대인들의 시기 질투로 광장으로 끌려가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바울 서신 중 최초의 서신으로, 교우들의 이름을 다 기억할 정도로 소수였을 테지만, 사도에게는 잊지 못할 선교지였음에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평가는 주님께서 심판하실 주님의 재림 때에 있을 것이라 말씀합니다(5-10절).
사도 바울의 종말관은 물론 성경의 종말관은 다양합니다. 본문에서처럼 임박한 종말관과 함께 미래적 종말관, 그리고 실현된 종말관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가 가까웠다”(빌 4:5, 고전 7:29, 롬 13:11-12)는 임박한 종말관이 있는가하면, 배교하는 일과 멸망의 자녀들의 등장 등 일련의 사건이 있은 후에 주의 날이 임재 한다는(살후 2:1-10) 미래적 종말관이 있고, 이 밖에도 주님의 나라가 내 마음 속에 이루어졌다고 인식하는 소위 실현된 종말론까지(요 13-16장) 세 종류의 종말관을 성경이 말씀하기에 혼란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 보다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바르게 적용할 수 있다고 하면 모두 정당하다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믿고 행동하는 모든 신앙행위가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주님 앞에서라는 점을 확신해야 한다는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사도의 간절한 기도는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11-12절).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의 심판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대체로 삶의 중요한 순간에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느냐 마느냐로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부흥사들이 그렇게 가르쳐왔습니다. 그들은 “믿습니까?”라고 물을 때, “아멘!” 하는 이들에게 구원받았다고 선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기독교 구원관을 싸구려 라고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믿음은 한결같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죽하면 평신도의 신앙은 천국 꼭대기에 있고, 신학교 1학년생의 신앙은 혼란가운데 있으며, 신학교 4학년생이 되면 무신론자가 된다는 우스개도 있습니다. 신앙의 편차가 극심해서 널뛰기 같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일입니다. 크리스천에게 가장 큰 시련은 역경이 아니라 순경이며, 배고품과 질병이 아니라 부유하고 건강할 때라는 것입니다.
3. 오늘 생거 진천교회(묵상식구 김동환목사) 설립 예배가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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