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046.

시편 시 141:4-6.

찬송 174, 1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생각과 느낌을 일치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일 텐데요. 그런데 이보다도 더 먼 여행은 바로 머리와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생각과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그만큼 더 어렵다는 뜻이겠지요. 마음은 있는데, 또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미쳐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던 계획들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가슴속의 계획을 발로 옮겨가는 여행 해 보시면 어떨까요?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525일 방송>

 

2. 성령강림절 주일의 설교 본문은 사도행전 2:1-21, “성령께서 임재하실 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1세기 초대교회는 위기의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승천하셨고, 연약한 사도들과 소수의 부활과 승천의 목격자들이 남아서 증인이 되어야 할 과제가 있었습니다. 빌라도와 헤롯의 권력자들은 물론 정통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색출하고 고문하는 등 많은 방법으로 위협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 성령께서 임재하신 것입니다.

 

성령하나님은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며 임재 하셨습니다(1-4).

구약성서에서도 성령님은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특히 인간을 창조하실 때 31체 하나님은 당신들의 형상으로 만드실 것을 결정하셨고, 흙으로 만든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성부 성자 하나님과 같이 성령님도 당신의 뜻을 따라 계획을 세우기도 활동하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절망과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강력한 모습으로 임재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이를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혀 같은 것이 불길처럼 갈라지며 사람들 위에 내렸다.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오순절에 임재 하셨던 성령님의 활동을 동일하게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 당신의 뜻대로 행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종부리듯 하거나 명령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뜻에 맡기고 순종할 뿐입니다.

 

성령하나님은 방언을 동원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소통하게 하셨습니다(5-13).

예루살렘에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또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려고 주변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나라 말로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방언에 대해서 진지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 방언의 기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바벨탑 사건이후에 방언이 생겨났는데, 그 목적은 하나님께 대적하지 못하도록 소통을 할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1세기 오순절에 일어났던 방언은 이와는 정 반대로 복음 안에서 소통을 위해서였습니다. 차제에 방언을 사용하는 목적이 소통인가 불통인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설교를 각기 저마다의 방언으로 알아듣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 엄청난 현상을 지켜보던 유대인들은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하고 빈정거렸다고 기록했습니다.

 

성령하나님은 사도들의 입을 열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14-20).

오순절에 행한 최초의 설교자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칭찬도 들었지만 꾸중도 많이 들었던 사람입니다. 우선 베드로의 설교는 시중에 떠도는 가짜 뉴스에 대해서 팩트 체크부터 합니다. 아침 9시인 시각에 술에 취할 사람이 없다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감격에 겨워 기뻐하거나 방언으로 설교를 듣고 말하는 것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성령이 임하실 현상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였는데,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며,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를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남종과 여종들도 예언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임재하신 놀라운 일들은 우연하거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서 준비된 일로, 베드로와 모인 무리들은 성령에 감동된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039.

시편 시 139:22-24.

찬송 48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한줌 먼지 만 못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이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라는 시의 마지막 연 함께 읽어 봤는데요. 그렇지만 아직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하는 단계는, 우리들의 감정이나 감각이 그만큼은 깨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질문도 하지 않고 또는 질문도 없이 사라지는 것 보다는, 질문을 하다가 사라지는 편이 조금쯤은 덜 쓸쓸하겠다는 생각 해 보게 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519일 방송>

 

2. 부활절 일곱째 주일의 복음서의 말씀 요 17:1-11을 읽었습니다. “진실한 기도 : 일관성과 지속성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기도생활에 다름 아니라는 말씀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배워야 할 기도란 진실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 진실함이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의 기도가 가르치는 진실함은 일관성과 지속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셨습니다(1-5).

우리 한국을 극찬하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샘 리처드 교수는, 여러 나라에서 유학 온 학생들에게 최고의 가치를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족과 행복 평화 등을 꼽는데 반해, 한국 학생은 물질적 풍요를 꼽았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지킬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또한 미국의 퓨리서치센터가 선진국 17개국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대부분이 가족 직업 물질적 풍요를 꼽은데 반해 한국인은 물질적 풍요 건강 가족을 꼽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이 영광스럽지 않는 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주님은 창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누렸던 영광스러운 삶을 재현하는 길은 자신이 영광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부끄러운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당신의 모든 삶과 일치하셨습니다(6-9).

생전에 현대신학을 가르친 서남동 교수님은 통전성(integrity)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소개하셨습니다. 성경 말씀의 통전성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인간이 추구할 삶의 통전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함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신교회가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 까닭은, 기도 따로 삶 따로의 모순된 모습 때문입니다. 거룩함으로 포장된 거짓된 삶에 진저리를 치게 하고, 사랑을 입버릇처럼 떠들면서도 증오로 가득한 집단이 된 때문입니다. 이슬람 문화를 적대시하고, 공산주의자를 뿌리까지 뽑아버리려 하며, 성소수자를 우리 지구에서 영원히 추방시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런 세상을 구원하려 오셨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주셨습니다. 저 역시 이슬람과 공산주의자, 성소수자들 뿐 아니라 수천 수만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님은 그들과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이유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10-11).

예수님이 간절히 그리고 줄기차게 기도하고 계시는 대상은 12제자를 포함한 모든 주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훗날 학자들은 주님의 12제자를 사도라는 명칭으로 제한하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제자라는 사람은 빵을 얻어먹고, 기적을 구경하기 위해서 수많은 무리들 속에 몰려다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이란 주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것을 삶의 사명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주변에는 목사나 전도사만이 아니라 평신도로써도,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그리고 중국과 몽골에서 복음을 전하는 분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의사나 간호사 또는 태권도 사범이나 영농 기술자와 같은 전문인 선교사로, 또는 IT를 통해서 저의 묵상자료를 꾸준히 전파하는 분들, 그리고 매일 동료들과 묵상을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일에 헌신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3. 어제는 미국의 묵상식구 T. 엥글러 목사님의 아드님 아담 군의 결혼식이 뉴저지에서 있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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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032.

시편 시 139:1-4.

찬송 26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 온화한 낯빛으로 내 손을 잡고 힘을 북돋우며, 나를 이끌고 비밀의 세상으로 들어섰노라.” 스승의 존재감을 잘 들어내는 문장으로 꼽히지요. 단테의 [신곡] 중의 한 대목인데요. 내 손을 이끌고 비밀의 세상으로 함께 들어서서, 그것을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또 느끼게 하는 사람이 바로 스승이라는 뜻이겠지요. 비밀 세계로 이끌어주는 등불로써의 스승의 존재감. 이런 특별한 날에 한번쯤 되새겨 보게 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515일 방송>

 

2. 부활절 여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벧전 3:13-22을 본문으로 옳은 일을 위해서 사서라도 고난을 감수하자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요즘 가장 핫한 책은 자기 계발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의 중심에는 고난이라는 단어가 우뚝 서 있습니다. 고난을 피하려 하지 말고, 당당하게 고난에 맞설 뿐 아니라 고난을 감수하라고 말입니다.

 

두가지 고난을 소개하는데, 옳은 일을 하다가 겪는 고난과 죄를 짓고 당하는 고난입니다(13-17).

제가 감동을 받은 여러 권의 책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켄트 케이스의 <그래도, Anyway>입니다. 수 십 권을 구입해서 교우들과 친구들에게 선물한 이른바 역설의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열 번 째 역설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헌신하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헌신해도 칭찬을 듣기는커녕 경을 칠 수도 있다. 그래도 헌신하라.”입니다. 우리들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난이 아예 없거나 고난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모습입니까? 다행히 우리는 일찍이 고난을 훈련받았습니다. 가난과 질병, 신앙과 현실의 괴리,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부조리 등입니다. 다행히 고난의 강을 잘 건너도록 훌륭함을 넘어 위대한 부모님들이 삶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다 고난을 겪기로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고난에 관한 한 우리에게는 위대한 모델 그리스도 예수가 계십니다(18-19).

가끔 유명하다는 교회 지도자들까지도 예수님은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셨다고 허튼 소리를 합니다. 그 말속에는 십자가에 감춰진 하나님의 사랑을 어리석은 일이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이 그의 <원리강론>에서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돌풍에 휘말려서 죽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을 대신해서 죽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주장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구원의 섭리를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은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세상의 모든 죄를 당신 스스로 끌어안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악명 높은 십자가를 사랑하고, 삶의 곳곳마다 십자가를 만들어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것입니다.

 

참된 고난의 삶이란 매일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고 세례의 정신을 실천하는 삶입니다(20-22).

예배의 정신을 제대로 전승하기 위해서는 예배하러가는 사람들은 세례대를 거쳐 지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새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현대 교회가 잊어버린 것 중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세례를 뒷전으로 몰아낸 일입니다. 어쩌면 세례를 구원의 증표정도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단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될 성례입니다. 그것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가장 분명한 진리라는 뜻입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의 공로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고, 욕심을 나눔으로 바꾸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일은 힘든 말입니다. 그 다음에야 그리스도의 공로로 다시 살아나는 감격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025.

시편 시 136:23-26.

찬송 62, 96, 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성이란 그대 삶을 지켜보는 눈이다.” 이렇게 지성에 대해서 아주 독특한 해석을 내린 철학자도 있던데요. 말하자면 감시카메라를 세상 밖이나 남을 향해 설치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를 향하라는, 그런 이야기이겠지요?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또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잘 살피다보면, 마음의 물결도 늘 잔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57일 방송>

 

2. 부활절 다섯째 주일의 복음서의 말씀, 14:1-14을 본문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대답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2천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어김없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장 똑똑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몰랐습니다(1-9).

생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저는 도마와 빌립을 열 두 제자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지식인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도마는 의심이 많았고 그래서 질문을 자주 했던 인물입니다(11:16, 14:5. 20:24). 바로 이 점이 그를 지식인이라고 칭하는 이유입니다. 빌립은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스승을 바꾼 전력이 있고(1:45), 배고픈 군중들의 수효에 맞는 음식 값을 계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6:5-7).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눈앞의 현실에 함몰되어서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지금까지 진행하시는 큰 그림, 곧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각종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는 기적에 정신이 팔려,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대 역사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소탐대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이 대목에서 한 치도 더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삼위일체이신 우리 주님을 알려고도 힘쓰지 않았습니다(10-12).

지금도 사람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부모와 형제자매가 누구인가에 쏠려 있습니다. 요즘 대통령이나 중요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일화들이 여론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동문수학했던 사람에 대해서, 미국 대학 시절의 일화들도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습니다. 야망을 가진 사업가들이 귀를 쫑긋 세울 얘기들입니다. 소인배들이나 흥미를 가질 풍문들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어떤 결심을 하고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얘기들은 귀를 씻고 들어보려해도 감감 무소식입니다. 한때 우리 교회를 난장판으로 만들 뻔 했던 <도마복음서>는 청년 예수에 대해서 주목을 끌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으로써(1:16)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게 일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관심사에 말려들어간 셈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십니다(6, 13-14).

예수님을 정의하는 가장 완벽한 구절은 바로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으로, 주님을 떠나서는 아버지께서 갈 수가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길이십니다. 보수주의 주석의 대가 박윤선 교수님은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에 붙은 정관사 헤(η)를 주목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유일무이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국제주석의 세계적 권위자 C. K. 바레트 교수는 진리와 생명은 요한복음서의 주제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길이요 진리며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직접 연결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길을 찾는 사람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그리고 생명을 얻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길과 진리 그리고 생명을 찾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 모든 인류가 예수께로 나아가야 할 이유라고 믿어야 하겠습니다.

 

3. 오늘은 왕십리 루터교회 주일 예배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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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018.

시편 시 136:1-3.

찬송 242, 2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버린 세월, 내가 포기한 세월 위에, 올해도 수백 팬지꽃들 피어난다.” 최승자 시인의 <봄의 약사> 라는 시 중의 한 구절인데요. 우리가 대충 보내버리거나 말거나, 크게 기억해 주거나 말거나, 계절은 제 맡은 일을 다 하면서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참 적절하게 알려주고 있지요. 그런 부지런한 자연을 보면, 버리거나 포기하려고 했던 세월을 얼른 챙겨야 할 것도 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430일 방송>

 

2. 부활절 기간에는 구약성경 대신 사도행전을 읽습니다. 교회력에 맞는 적당한 구약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행 2:42-47을 본문으로 세상이 희망하는 교회의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이 희망하는 교회의 모습인데,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어야 살아갈 힘과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성경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모습이었습니다(42).

교회가 세상에 보여준 첫 번째 모습은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실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귀로만 듣는 신앙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고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친 후 파송의 공식 인사말은, “이제는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전하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배자들이 들었던 복음을 세상에 나가서 전해야 했는데, 그것은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행동하는 삶이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는 구체적인 행동은 서로 돕고, 서로 나누는 삶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신앙을 실천하는 모습을 교회에서 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기를 쓰고 부흥회나 세미나를 여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말과 노래만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바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었습니다(43-45).

여기에서 우리는 기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병든 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병든 이들은 의사선생님들에게 맡겨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식한 이들은 학교 선생님에게 부탁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시대를 격려할 기적이 필요해졌습니다. 그것은 이기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보여 주는 뜨거운 사랑으로 세상을 부둥켜안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랑의 용광로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냉담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운 사랑과 감사 그리고 섬기는 마음으로 바뀌는 기적입니다. 전도용으로 노래회를 1년간 지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녹이지 못한 차가운 마음을 한 달동네 아주머니가 녹여서 교회를 다닌다는 옛날 회원을 만났습니다. 세상이 희망하는 교회의 모습은 이기적인 인간이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뀌는 기적입니다.

 

초대 기독교회는 말씀과 기도로 제자리를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46-47).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모든 존재가 제 구실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세상은 제 자리를 포기하고 분수에 넘치는 욕망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일이고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의 한 농부는 농사꾼의 자리를 지키자고 옹고집을 부립니다. 딤후 2:20-21의 질그릇 비유를 새삼 묵상하게 합니다. 용도에 적합한 그릇이 필요한데, 외적인 것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활용될 수 있도록 깨끗이 준비된 것에 의해서 가치가 있다 말씀합니다. 교회의 가치 혹은 제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실천인 기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 때입니다. 세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오늘의 교회들은 그 순수성을 상실해 버린 모습입니다.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도록 가르쳐야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자기 자리를 지키도록 권면하는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3. 오늘 설교는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 시무)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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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011(2023. 4. 23. 부활절 셋째 주일).

시편 시 135:1-3.

찬송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도의 빈민가를 지켜주었던 테레사 수녀가 정의하는 사랑은, 의외로 참 소박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작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작은 일을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휴일이고 또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 있는 시간에 슬쩍 쳐다볼 수 있는 소박하고 정겨운 정의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요? <KBS FM 1, FM가정음악, 2008420일 방송>

 

2. 부활절 셋째 주일의 사도서간 벧전 1:17-25을 본문으로 부활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망권세 아래 사는 사람과 부활의 영광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거룩한 생활 곧 구별된 삶이라고 말합니다. 말과 행동이 달라야 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달라야 하겠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17-18).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법으로부터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법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전직 검사장이나 전직 부장 판사를 변호사로 고용합니다. 무전유회 유전무죄라는 말이 실제 삶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도덕과 윤리 또는 상식이 실종된 지 오래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유대인 신앙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유일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교묘하게 우상숭배를 자행할 뿐 아니라, 간음죄를 무력화시키는 여러 가지의 편법을 동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권력자들이 앞장을 서게 되니까 일반 대중들은 따라 하기가 쉬웠습니다. 유대인이 지켜야 할 율법은 613가지였지만, 모두가 겉치레에 불과했으며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율법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율법의 죄인이 되셨고,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셨습니다(19-21).

율법은 능동적인 삶보다는 수동적인 삶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걸작인 인간이 수동적인 삶에 길들어 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율법 아래에서 시들어버리고 마침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을 대신해서 율법의 요구를 다 들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를 증거하는 상징입니다. 이제 인간을 더 이상 율법의 종노릇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참된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무슨 일을 하든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싶어서 하는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노예적 굴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욕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능력에 알맞은 목표를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백성답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되었습니다(22-24).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농촌 생활의 기쁨 가운데 하나는 자연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점입니다. 텃밭에서 가꾸는 채소며, 화단의 꽃과 나무들, 그리고 산새와 노루들, 바람과 구름 그리고 햇빛들입니다. 무엇이든 자라나는 생명체에게는 양식이 필수입니다. 그 중에서도 물은 가장 중요한 양식입니다. 채소와 꽃 그리고 나무는 풍부한 물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자주 질문하게 됩니다. 의미가 있는 삶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때 대답할 말이 없다면 매우 서글픈 일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남긴 말처럼 우리들 주변의 존재들에게 작은 일이라도 해 줄 수 있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나, 테라스의 난간에 위험하게 앉아 졸고 있는 들 고양이를 가끔씩 깨우는 것도 결코 작지 않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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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004.

시편 시 132:6-7.

찬송 24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은 어디에나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지요. 하지만 한 여행자는 피레네 산맥이 그렇게 험한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여행기를 읽고 있는데, 문득 이렇게 매일매일을 살아가거나 어떤 일을 실천하는 힘은 그 여행자의 말처럼 아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모를 때 더 효과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었는데요. <KBS FM 1, FM가정음악, 2008416일 방송>

 

2. 부활절 둘째 주일의 복음서 요 20:19-31을 본문으로 성경을 읽는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시카고 대학의 아들러 교수는 <책을 읽는 방법>이라는 책에서 다양한 글 읽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흥미를 얻기 위해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해서 등등. 성경을 읽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진리를 찾고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읽는 첫째 목적은 평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19-23).

성경에는 평화의 약속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입니다(14:27). 오늘본문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 곧 구원의 평화인 하나님의 평화라는 것입니다. 타락이후 우리 인간은 평화를 잃어버린 삶 곧 불화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화하자, 자기 자신과 그리고 이웃과 마침내 자연과 불화하게 된 것입니다(3:1-21). 이런 불화들은 모든 불행과 슬픔의 원천이 된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잘 지내고 싶습니다. 따뜻한 이웃들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불화의 근원에는 하나님과의 부조화가 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런 우리들을 향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있기를!” 이라고 손을 내미십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평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두 번째 목적은 신앙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24-29).

우리나라 TV 프로그램이 여러 나라에서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먹방>이나 <돈쭐내러 왔습니다>와 같은 프로그램은 한번 고려해볼 만하다 생각합니다. 자세히 모르긴 해도 그 프로그램의 단골 등장인물들은 건강한 큰 문제가 생기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점은 한 번이든 두 번이든 폭식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탐욕을 부추기는 음모에 끌려다닌다는 점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탐욕을 전 국민에게 아니 전 세계인에게 선전하고 있는 점도 문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죄 가운데로 유혹하는 수많은 마귀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귀중한 은총인지 모릅니다. 철부지일 때에는 큰 소리로 성경을 읽어주고, 나이가 들면서는 성경을 외우게 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성경을 삶에 적용하는 생활이 절실합니다. 우리 교회가 성경읽기를 격려하고 도와주는 역할을 소홀히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읽는 마지막 목적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30-31).

1960년대 만해도 교회당 벽에는 성경읽기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성경 몇 장을 읽었는지 적어 넣도록 하고 이를 그래프로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성경 읽기까지 경쟁을 붙이느냐는 비판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지혜로운 추억입니다. 제가 다닌 시골 고등학교에서는 기숙사생들의 새벽 기도회가 있었는데, 출석을 부르면 성경 읽은 장수(張數)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때 성경을 가장 많이 읽던 친구는 훗날 경상도 어느 지방의 경찰서장이 되었고, 해군 대령이나, 대학 교수 대학총장이 된 친구 등 대부분 성실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유일한 말씀임을 생각할 때,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말씀이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7997.

시편 시 129:1-4.

찬송 158, 25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시 <>에는 꽃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시를 아무리 읽어도 무슨 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꽃은 무슨 꽃일까요? <중략> 어느 날 읽은 황동규 시인의 산문집 <젖은 손으로 돌아보라>에서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중략> 산다화, 동백꽃입니다.” 유선경의 <문득 묻다, 첫 번째 이야기>, pp.18-19.

 

2. 오늘은 우리 주님의 부활절 기념주일로, 10:34-43을 본문으로 십자가와 부활신앙 만이 참된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 인사말입니다. 신앙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믿음을 심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서건 내세에 대해서건 신앙만큼 굳센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이 실종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38-40).

코로나 펜데믹을 치룬 이후에 많은 분야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당수의 직장들이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고, 비대면 예배에 길들여진 교우들도 교회 활동을 멀리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가나안 성도가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절 주일에 우리는 우리가 믿는 복음이 무엇인지에, 그리고 복음이 과연 선포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묵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란 예수와 예수사건(십자가와 부활사건)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고전 2:2). 그런데 작금의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와 예수 사건이 실종되기라도 한 듯 설교의 중심부에서 실종되었습니다. 예배당의 전면에서 십자가는 가리어지고 그 자리에 설교자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대신 인간의 업적과 활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본질보다는 수단이 판을 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예수를 만나고 싶어 하지만 만날 수가 없다 합니다(41-42).

예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한 청년교우가 인도의 콜카타를 다녀왔다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마더 테레사가 세운 <사랑의 선교회>가 있었고, 많은 작은 예수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난과 질병에 죽어가는 그 절망의 땅에서 희망과 기쁨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넬료의 집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드려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목격했으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았으며, 주님과 함께 먹기도 마시기도 했던 사실을 온 몸으로 나타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 구름 너머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들 속에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자신의 일상에서 드러내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현실은 외치는 자 뿐, 생명수는 말랐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감격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34-37, 43).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쩌면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마다 문제를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문제들 때문에 살아갈 수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문제의 근원을 따져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에서 엄청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제가 첫 대학 시험에서 낙방하고 어머님의 권유로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 서울의 한 의과대학에 다니는 교회 형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인을 찾아봐. 그리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 공부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게 원인이었습니다. 즐거운 공부, 즐거운 가정, 즐거운 설교, 즐거운 목회. 하하 호호 하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었습니다. 가난과 약함과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는 것이라 생각하니 기쁨이 생겼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3.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 인사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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