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21.

시편 시 31:19-21.

찬송 16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단 한 사람의 가슴 제대로 지피지도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나희덕 시인의 서시입니다.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한 마음의 군불이나마 아직 남아 있다면 다행이겠지요. 우리 서로 따스한 사람이 되어주어야 할 것 같은 그런 겨울 아침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1119일 방송>

 

2. 교회력 마지막 둘째주일의 구약 습 1:7-18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심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곤 합니다. 삶의 결산이라는 측면에서 심판은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스바냐는 요시야 시대(주전 639-609)에 활동했던 예언자로 하나님의 승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자들과 정치가들을 심판하시겠다 하십니다(4-9).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금하는 종교들입니다. 우상숭배란 성경(경전)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숭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재물이나 권력 심지어 자식을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의지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말입니다. 이런 우상숭배자들이 떠받드는 신상(神像)은 물론 그 제사장들까지 이름도 없이 다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치가들도 심판의 대상인데, 고관과 왕족들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회 곳곳에 정치력을 발휘해서 바른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들인데, 경제 사회 종교계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힘깨나 쓰고 남을 속이며 거들먹거리는 위인들을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세적인 심판을 3, 4대까지로 정한 것은 혹시나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심판의 본래 목적은 회개하고 바르게 살도록 하는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장사꾼들과 배신자들을 심판하시겠다 하십니다(10-13).

어느 지인이 무심코 장사꾼과는 사돈 맺지 말라.”는 말을 했는데, 그 자리가 사은회자리였다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주인공인 선생님이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고 계셨는데 민망했다 합니다. 본전도 안 된다.”는 식의 거짓말을 상술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배신자들이란 작은 이기심에 눈이 멀어 대의를 저버리기 잘하고 오랜 신뢰관계를 여지없이 깨트리는 사람들입니다. 유신시절에는 가난한 학생들을 프락치로 삼아 자신을 가르치는 교수의 강의 내용을 입수하고, 정책에 반대하는 교수를 잡아들였다는 얘기를 듣곤 하였습니다. 현대판 가룟인 유다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퇴직한 임원이나 불만을 품은 직원에게 3-4배 연봉을 약속하고 신기술 정보를 빼돌리는 산업스파이는 아주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자들을 심판하신다 말씀하십니다.

 

야훼께서 오시는 날 이전에 돌아서야 합니다(14-16).

회개라는 말은 마음으로 뉘우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과 몸이 180도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회개라는 말 메타노이아의 참된 의미입니다. 시궁창에 고개를 처박고 살던 사람이 푸른 하늘을 향해 돌아서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도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 이전에 실행해야 합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은 천하의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이 회개하는 과정을 얘기하고 있는데, 친구의 유령과 여러 명의 유령들이 등장해서 경고도 하고 겁박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회적인 불평등을 고발하는 배경을 갖고 있는데, 우리 시대도 이 고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을 더욱 춥게 살아가는 이웃들을 외면하는 우리들도 스크루지가 경험했던 심판의 두려움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야훼 하나님이 오시기 전에 돌아서야 하겠습니다.

 

3. 2024년 마가의 해 설교 계획서를 착수하였습니다. 11월 말에는 참고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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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207.

시편 시 29:1-2.

찬송 102, 41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지침서인 [탈무드]에서는, 사람을 헤치는 세 가지로 근심, 말다툼, 그리고 빈 지갑을 꼽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요즘 빈 지갑 때문에 고민해 본 분들 많으실 텐데요.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생활이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왠지 마음까지도 위축됩니다. 지갑이 가벼워져도 마음까지 다쳐서는 안 되겠지요. 지금보다 더 먼 미래를 생각하고 조금 더 긍정적으로 조금 더 열심히 오늘 하루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115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스물셋째 주일로 마태복음서 23:1-12을 본문으로 허세로 가득 찬 인생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금년에는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을 자주 만났었는데, 대부분 들려오던 풍문과는 다르게 허세가 많이 든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허세란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센 후폭풍이 분다는 걸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시대나 말과 삶이 다른 사람들이 지도자들 중에 많았습니다(1-3).

주님께서 활동하시던 1세기의 유대나라에는 신앙적인 지도자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바라보신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은 듣되 그들의 행동은 배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과 삶이 다른 위선자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위선자가 되기 쉬운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말을 많이 하는 직업군()이었습니다. 이런 위선자들의 특징은 허세에 깊이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한양라사>는 저의 고향집 바로 옆의 양복점 가게입니다. 그곳 한 사장님은 항상 새 옷과 새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그렇게 입고신고 다녀야 손님들이 사업이 잘 되는 줄로 알고 찾아온다는 얘기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이런 부류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이 배운 것처럼, 많이 아는 것처럼, 많이 가진 것처럼, 뒷배가 대단한 것처럼 허세로 가득 찬 사람들인데, 그래야 지위와 권위가 유지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허세로 무장한 위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망설일 줄을 모릅니다(4-6).

유대인들의 복장은 일반인과 많이 달라 눈에 확 띄곤 했습니다. 머리 끝 정수리를 덮는 키파라는 모자에서 양말에 이르기까지 낯선 것들로, 오늘 본문에서도 언급된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마나 팔뚝에 묶는 작은 상자인 테필린(13:9,16), 기도할 때 덮어쓰는 한쪽은 흰색 다른 쪽은 검정색의 보자기를 말하는 탈릿, 독특한 구레나룻 수염과 귀쪽에 길게 기른 꼬여진 머리카락을 말하는 페옷(19:27), 탈릿 네 귀퉁이에 달아놓은 8줄의 수술을 말하는 찌찌트라(15:37-39) 등인데, 이런 정통복장을 한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신앙적 의미를 가진 복장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크고 요란스럽게 겉 모습을 강조했는데, 신앙심이 깊은 듯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을 의식(意識)하는 외적 허세에 반해서, 요즘은 경건을 가장한 주삼창을 외치거나 깊은 숨을 내뱉듯 하는 주여! 등은, 변형된 내적 신앙의 허세일 것입니다.

 

허세의 정점은 스승이나 지도자라는 칭호를 듣는 것이었습니다(7-12).

지난 달 지방 교회에서 특강을 부탁한 목사님은 제게 프로필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의 학력과 목사 대학교수 선교사 등 경력을 적어 보내며, 마지막 담임했던 교회 이름을 밝히며 그 교회 은퇴목사인 것만 소개해 달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를 소개한 내용은 제가 졸업한 시골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인사를 드렸습니다. 춥고 가난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게 했으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주목해 보셨던 것입니다.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스승이나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를 요구했습니다. 물론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경계하셨는데, 그들은 스승이나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때문이었습니다. 스승이나 지도자는 팔자걸음 걸이에 인사와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겸손히 섬기려고 낮아지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오늘 주성농인교회(담임 우슬초목사)에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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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200.

시편 시 27:4-6.

찬송 233, 38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찾아 헤매는 것, 어둔 밤이면 생겨났다가 아침이 되면 사라져 버리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오페라 <투란도트>에 이런 대사가 나오지요. 얼음처럼 차가운 공주 투란도트, 그녀에게 반해서 신분을 감추고 찾아온 이웃 나라왕자 칼리프에게 그녀는 수수께끼 세 문제를 맞혀야만 청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목숨을 내 놓아야 하는 것이었지요. 다행히 칼리프는 첫 번째 이 문제의 답을 맞혀 냅니다. 밤이면 생겼다가 아침이면 사라져 버리는 것, 그것은 희망이라고 말이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1029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스물둘째 주일의 구약 레 19:1-2, 15-18을 본문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고 선포했습니다. 거룩이란 제멋대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다르게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말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세상에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구별된 사람이라 하십니다(3-8).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힘든 것이란 우상숭배에서 하나님 숭배로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깊이 빠진 생활이라 할 것입니다. 우상이란 다름 아닌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하나님을 대신 한 것들입니다. 재력을 최고로 여긴다면, 권력과 명예를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면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것들이 우상입니다. 그 결과 자식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들, 건강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이런 우상들이 우리를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지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금은보화가 우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이 땅에서의 가치일 뿐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가치들입니다. 아스완 땜에 가면 람세스 2세의 신전이 있습니다. 짐승모양의 돌덩이를 만들고 섬기고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한 세상에서 제구실을 하며 사는 것이 구별된 사람이라 하십니다(9-14).

거짓과 불의는 세상을 설명하는 중심 단어들입니다. 어쩌면 사랑과 친절 심지어 봉사와 선행 까지도 거짓과 불의로 위장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선거철이면 노인정을 찾아와 넙죽 절하며 머슴이 되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정치인들을 떠올리면 딱 맞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권력의 최정상을 꿈꾸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교회의 위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천국을 가자며 설교하지만, 천국에 살기에는 가장 빗나간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교육이나 제도 등도 시간과 함께 본래의 목적이 변질할 것을 환히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공정과 상식을 표방하는 법치주의도 언제나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준비된 것들입니다. 합법을 가장한 거짓과 불의는 언제나 힘을 가진 사람들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유일한 대안은 제구실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 뿐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세상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구별된 사람이라 하십니다(15-18).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표방하는 구호들은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공평한 잣대를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시각장애인 교우와 청각장애인 교우들에게 설교를 해 오고 있는데, 정상인 중심의 입장에서 공평을 말하는 것은 부당함을 알리고 싶습니다. “목사님, 세상이 잘 보이십니까? 그러면 캄캄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도와주십시오.” 한 시각장애인 젊은이가 제게 들려준 따끔한 충고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장애인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삶의 자리를 누가 만들어주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정상인과 동일하게 취급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개발하고 후원하고 격려해서 모두가 정직 근면 성실하게 살면서 기여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대로 된 운동장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3. 오늘은 종교개혁 506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193.

시편 시 25:14-16.

찬송 1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 빈 배와 부딪히면, 비록 성질이 나쁜 사람이라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니까. 세상의 강을 건너는 당신, 당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든다면, 아무도 그대와 얼굴 붉힐 일 없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에게 상처 입히지 않을 것이다.” [장자]에 나오는 말입니다. 욕심과 미움, 미련 같은 무거운 것들을 모두 덜어낸 그런 마음을 빈 배에 비유하고 있는데요. 세상의 강을 잘 건너려면, 아무래도 마음을 가볍게 덜어내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1022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스무한째 주일의 사도서간 살전 1:1-10을 본문으로 믿는 자의 본이 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편지는 신약성경에서 첫 번째 기록된 것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 주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음미할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켰습니다(2-5).

요즘은 도보로 하는 성지순례가 유행입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도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에 다녀오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총 길이가 800km이고 40일의 기간에 비용도 230만원(비행기 값 포함)이상이 든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고행을 자처하는 것일까요? 어떤 이는 신앙의 감격을 깨닫기 위해서 일부러 시련을 자처하며 나선 경우도 있을 것이고, 40일이라는 긴 시간동안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갖고자 나선 경우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신앙이란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선배들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 준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신앙을 가볍거나 헤프게 여겨서는 안 되겠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온갖 시련을 감수하면서 이 신앙을 지키고 전했던 분들임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순경(順境)은 물론 역경(逆境) 중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삶으로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6-8).

놀이기구 가운데 롤러코스터라는 것이 있는데, 엄청나게 높은 곳으로 오르기도 하고 깊은 내리막으로 질주하기도 하는 스릴을 느끼게 하는 도구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예인들과 정치가들 중에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극적(劇的)인 삶을 맛볼 순 있겠지만, 항상 불안과 두려움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이런 분들이 신앙에 의지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런 유명인들의 삶은 어항속의 물고기처럼 다 비춰진 삶이어서, 그들의 삶의 양면성(진솔한 면과 거짓된 면)이 잘 드러나기도 합니다.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는 삶의 모습이 유독 회자되기에 억울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명세를 치르는 것인데, 순경에서도 그리고 역경에서도 신앙의 좋은 면을 드러내기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향기를 풍기는 삶으로 큰 감동과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신앙의 진실성과 향기로움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9-10).

초대 교회는 임박한 종말사상을 강조하였고, 이런 종말관이 신앙생활에 큰 자극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시한부 종말관을 주장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지금도 서울 곳곳에서 무료 성경공부라는 팻말을 앞에 두고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오늘 제가 대구의 한 교회에서 성경 특강을 2시간 가질 예정인데, 내용은 성경을 큰 흐름에서 읽어야 하고, 히브리적 사고방식과 역사적 배경이해가 중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의 독자들은 먼저 성경 자체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연역법/演繹法), 나중에 자신의 관심사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귀납법/歸納法).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랑하는 사도는 그들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고 힘쓰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크리스천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의 모습이, 그날 천국에서의 모습으로 연속성을 가지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오늘 오후 저는 대구베델 장로교회에서 특강을 가질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186.

시편 시 24:4-6.

찬송 22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 사람들에겐 살아생전에 다 못해 보는 일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한자를 다 배우지 못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중국 음식을 다 맛보지 못하는 것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중국 땅을 다 여행해 보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나는 살아생전에 과연 우리나라 몇몇 곳을 돌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국이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을이지요?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1015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스무째 주일의 복음서 말씀 마 22:1-14을 본문으로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천로역정>의 주인공처럼 천국을 향해서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로 천국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천국에 관한 비유이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초대되었는데, 거부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1-4).

천국에 관한 말씀들은 비유와 상징 그리고 암시적인 표현들입니다. 사실적이거나 직설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임금의 아들의 결혼식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참석자들에게 미리 초대장을 보냈고, 참석을 확인까지 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유학할 때 두 차례나 결혼식을 경험했는데, 한번은 신랑의 우인으로, 다른 한번은 학교 채플에서 열린 결혼식에 구경하러 갔다가 초대장을 요구해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초대받은 사람만 참석할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그러니 초대에 응했다가 거부하게 된다면 혼주에게는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값비싼 호텔에 준비한 음식은 쓰레기로 버려질 것입니다. 이런 제도를 잘 알고 있는 문화에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랑과 신부, 혼주들을 무시하는 일이며, 상종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유는 너무도 초라한 것들이었습니다(5-8).

물론 약속은 100%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 불참 이유가 상식 밖이고 너무도 엉뚱해서 할 말을 잃게 합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는데 둘러보러 간다했고, 다른 사람은 장사하러 간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은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고 심부름을 온 종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만일 불요불급한 일이며 화급한 일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거부의사를 밝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석하겠노라 대답은 하고 갑작스럽게 엉뚱한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면 이것은 임금의 자녀 결혼식을 무시하는 일이고 망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의 천국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승낙하고 기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일 이런 혼인잔치에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제정신이 아닌 슬픈 인생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망친 사람들을 하나님은 용서하지 않으시겠다 말씀하십니다(9-14).

천국 혼인잔치는 중단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 본문의 중심주제입니다. 그리고 시장과 들판을 다니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초대가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임금자녀의 혼인잔치인 줄을 알면서도 예복을 갖춰 입지 않은 사람들은 잔치 자리에서 쫓겨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나그네 집에 불과한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국의 혼인잔치를 말씀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이 가질 분명한 목적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당신의 천국 잔치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초대하셨다는 것을 믿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179.

시편 시 22:19-21.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실수를 하게 마련인데, 그것이 실수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무언가 배울 수 있을 때, 바로 그 때를 트리플링 포인트(tripling point)라고 합니다.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 다시 커질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그런 얘기인데요. 엉덩방아를 찧거나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 들었더라도, 그저 시원하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는 꽉 쥐고 있어야 하겠지요? 기분 좋게 출발하는 아침 되시기를 바랍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108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열아홉째 주일의 이사야 5:1-7을 본문으로, “탄식하는 하나님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이나 뜻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말씀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신 성경말씀으로 현존하시는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탄식의 노래를 지어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한 소박한 꿈을 꾸고 계셨습니다(1-2a, 3-4a.)

성경은 문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다양한 문학적인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오늘의 말씀은 시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습니다. 기름진 산등성이에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망대도 짓고 즙을 짤 수 있는 즙 틀도 준비해 두셨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살이 오른 탐스러운 포도송이를 기대하며 거름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온갖 수고를 다하셨다 말씀합니다.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포도밭이 떠오릅니다. 여느 포도원 농부처럼 행복한 기대감으로 가득한 포도밭입니다. 하나님께서 누리고 싶어 하신 행복은 이런 소박하고 소소한 삶의 편린(片鱗)들이었습니다. 가족들이 둘러 앉아 감사기도를 드리고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이 행복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소소한 행복을 누리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의 삶의 순간들은 행복이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유다백성과 예루살렘시민들은 하나님의 꿈을 짓밟고 말았습니다(2b, 4b.).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우리들 삶에는 등장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위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충분히 먹을 양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양식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힘들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일들을 취미삼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거나, 때로는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거나 또는 권력을 이용해서 겁을 주고 억압합니다. 그 목적은 언제나 분명합니다. 높이 오르려거나 많이 가지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훗날 돌아보면 얼마나 엄청난 잘못인 것을 깨닫게 되겠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들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 그래서 들 포도로 수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거짓과 불의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승리한 삶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과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탄식에는 또 다른 희망의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5-7).

우리가 피할 수 없는 한 가지 진리는, 우리 조상 아담이래로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온 세상을 죄악으로 채워놓은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목표를 빗나간 생각과 행동입니다. 학생이 학교로 향하던 발걸음을 게임방으로 돌리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매 순간 목표를 이탈한 삶을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절망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포도밭의 울타리를 걷어 짐승 떼들이 짓밟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포도나무를 돌보는 것을 포기하시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자라도록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런 하나님의 심판은 그 너머에 목적과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절망을 보태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싹트게 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매를 아끼지 말라는 말씀의 뜻입니다(13:24).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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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172.

시편 시 21:9-11.

찬송 342, 34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꽃이 예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송방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김용택님의 시 <가을이 오면>이었습니다. <가을이 오면> 이라는 시로 시월의 첫날을 열었는데요. 잎도 향기도 꿀도 아낌없이 주고 난 후에 열매를 기다리는 꽃들처럼, 여러분도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월의 첫날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열매와 추억들로 시월 한 달도 풍성하게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101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여덟째 주일로 사도서간 빌 2:1-4, 14-18을 본문으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자세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요즘 가나안 성도가 늘어가는 것은 물론 안티 크리스천들로 인해서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꺼려질 때가 있다 합니다. 감사하게도 그런 이웃들 속에서 크리스천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1-2).

질문을 받으면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고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同情)하고 있습니까?” 어느 질문 하나도 선뜻 대답하기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서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이 구체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영혼 없는 말투로 아멘. 할렐루야!”라고 해서는 안 되는 때문입니다. 뛸 듯이 가벼운 발걸음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같은 생각, 같은 사랑 그리고 마음을 합쳐서 하나되라.”하십니다. 여기서 같다 라는 의미는 동기와 목적이 같다는 뜻입니다. 근본과 본질이 같을 때만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 때 주님을 믿는다는 말에 힘이 넘치고, 주님의 사랑 때문에 풍성한 위안으로 가득 차고,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성령의 감동으로 교제하고, 상대의 마음에 공감대를 이루라 하십니다. 불가능한 일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도우심으로 넉넉하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3-4).

우리는 사기꾼들 속에서 사는지 모릅니다.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사람치고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목사로 부임할 때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가기 전에 돌변합니다. 거만해 집니다. 마침내 군림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서 말입니다. 저에게 책을 주신 두 분의 은사님이 계십니다. 저에겐 하늘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평생 유지하셨습니다. 한 분은 아들뻘 되는 제게 박성완 학형께.”라는 호칭을 사용하셨고, 흘려들을 수 있는 저의 딱한 처지를 돕기 위해 당신 자신을 한없이 낮추시고 저를 높이 올리셨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최근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한국의 한 축구선수를 극찬하는 기사가 전송되고 있습니다. 참 힘든 일을 하고 있다 말하고 있다 합니다.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를 실천하려면, 많은 인내와 용서가 따라야 했을 것입니다.

 

하늘의 별빛처럼 빛을 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14-18).

저는 별이 쏟아지는 시골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깊이 잠든 시간에 밖에 나오면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로등이나 달빛이 없는 그믐밤일수록 별빛은 더욱 빛이납니다. 캄캄한 세상, 절망적인 세상에서만이 별빛을 선물 받을 수 있습니다. 불평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수 밖인 세상에서, 악하고 비뚤어진 사람들이 지천에 깔린 세상에서, 이런 세상에서 온 세상을 비추는 별빛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을 넘어 기적입니다. 사도는 권면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라고, 그래야 헛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비치는 믿음의 제사라면, 사도는 그 위에 자신의 피를 기쁜 마음으로 붓고 싶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뻐하고 싶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하늘의 별빛을 구경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망을 감내하는 그런 이웃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3. 오늘 저는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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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165.

시편 시 19:12-14.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한걸음 한걸음 가가다 보면 어느 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독일 작가 미하일 엔데의 스터디 셀러지요. [모모]에 나오는 말입니다.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우리 속담과도 참 닮아있는 얘기인데요.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에 충실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기 바랍니다<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923일 방송>

 

2. 성령강림절 열일곱째 주일의 복음서 말씀 마 20:1-16을 본문으로 예수님이라는 어떻게 하실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어째 제목이 청소년에게 들려주려는 제목처럼 들리겠습니다만, 사실은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에게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랑스럽다 말할 인생은 한 사람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인생을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1-7).

성경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길이나 양/, 셈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하는 크로노스(χρονος/7:17)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기회나 때를 말하는 카이로스(καιρος/7:20)가 그것입니다. 불가에서는 끝없는 되풀이의 한 시점으로 인생을 말하지만(크로노스), 성경이 말씀하는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라고 가르칩니다. 포도원의 품꾼으로 일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할 때, 우리들은 일찍 또는 중간에 그리고 어떤 이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소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인생을 지루한 시간으로, 다른 이는 눈치껏 요령을 피우면서, 또 다른 이는 일말의 후회도 없이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는 훗날 어떤 상급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은 단 한번 뿐인 기회인 때문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상을 언급하는 것은 게으른 사람을 위한 입바름입니다.

 

인간의 셈법과 하나님의 셈법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8-13).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理性과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사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도덕과 상식을 표준으로 삼곤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풍기는 현상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부지런하게 새벽 인력시장에 나갑니다. 그리고 목에는 자신의 전문 직종, 곧 미장, 조적, 잡부 등을 큼직하게 써서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일당을 받기에 족한 최소 8시간 근무시간을 채웁니다. 그러면 정부가 정한 하루 급여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런 기본적인 룰이 깨졌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으로부터 하루 일당을 주더니 새벽에 불려와 일한 8시간 일한 사람까지도 똑 같은 급여를 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한 시간짜리는 성실했고, 8시간짜리는 빈둥거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두 하루 품삯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려고 할 때만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14-16).

한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What Jesus would do?>라는 쉘돈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125년 전에 나온 소설로, 한 인쇄공이 타이프라이터의 발전으로 실직하고 교회당을 찾아와서 죽은 후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갖고 해답을 찾아 나선 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천사의 말로 설교를 듣고 천상의 노래를 부르며,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목소리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인 오늘의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묻는 질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날의 품삯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갖 불의와 부조리 그리고 거짓과 불법으로 힘든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만, 교회는 앵무새마냥 사랑과 은혜를 외치고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가 늘어나는 이런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리라고 말입니다. 묵묵히 믿는 대로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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