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02호.
시편 시 6:4-6.
찬송 227, 22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신화들은 대체로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공통점 중의 하나, 상징하는 것들이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공통된 상징중의 하나는 바로 영혼 정신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날아다닌다. 자유롭다. 그러면서 가볍고도 여리다.” 이런 특징 때문이겠지요. 몸은 지상에 묶여 있지만, 영혼은 정신만은 그렇게 거침없이 자유로웠으면 하는 바람은, 인종이나 나라를 초월하는 공통점인가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7월 24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여덟째 주일의 복음서는 마 13:24-30의 말씀으로, “천국은 풍성한 나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융성해지면서 신앙생활이 무뎌진 것처럼 한국교회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 출석도 기도생활도 나태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풍성한 나라로 다가오고 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희망의 씨를 뿌리고 노력하지만, 방해하는 세력들로 절망할 수 있습니다(24-28a).
청운의 꿈을 안고 새로운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학생들의 눈망울을 바라 보노라면, 그들의 찬란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겨우 소수만이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갈 뿐 대부분은 낙심하고 주저앉는 경향입니다. 왤까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가라지들 때문입니다. 이 가라지는 사전에선 “강아지 풀”로, 개역과 공동번역은 가라지로, 현대인의 성경은 독보리로 번역을 했습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은 밀이었는데(29절), 가라지는 밀과 유사하지만 먹을 수 없기에 아무리 가꾸어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헛수고란 무엇일까요? 가난과 시대적 배경 같은 외부적 요인만이 아니라, 가장 큰 원인은 부정적 또는 패배적인 생각을 하는 내부적 요인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류역사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위인들은 하나같이 긍정적 신념으로 어려운 환경을 이겨낸 이들이었습니다.
세상(환경)이 바뀌기 전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28b-29절).
일반적으로 진보적인 사상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의 특성은 변화와 개혁에 관심이 많습니다. 좋은 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나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효율적인 생산과 공평한 분배를 시도하면 유토피아가 건설된다고 생각한 공산주의자들의 생각이 그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는 그들의 생각이 실패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참된 변화와 개혁은 세상이 아니라 인간성의 변화(회개)임을 깨닫지 못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자는 주장에, 주님은 그냥 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칫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히는 치명적인 손실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지도자들의 일탈이었습니다. <미투/Me Too!>운동이나 부동산 축재 그리고 각종 특혜와 비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추수 때는 모든 삶의 진위가 가려지고, 풍성한 이상향인 천국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30절).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은 어느 주먹깨나 쓰는 건달의 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법으로는 시비가 가려질 것 같지 않을 때,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합니다. 홍길동,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은 조선시대 3대 도둑 우두머리로, 연산군, 명종, 그리고 숙종 조에 살았던 실존 인물들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성호사설>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적으로 불리지만 고증은 없습니다. 밀과 가라지, 진실과 거짓, 의인과 죄인은 즉각 판명되지 않아서 사람들을 애태우곤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말씀할 뿐 아니라, 풍성하고 찬란한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길바닥이나 자갈 밭, 그리고 가시덤불 같은 세상을 부추기는 게 사실이지만, 옥토와 같은 땅에선 30배, 60배, 100백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릴 이유이며,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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