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02.

시편 시 6:4-6.

찬송 227,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신화들은 대체로 여러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공통점 중의 하나, 상징하는 것들이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공통된 상징중의 하나는 바로 영혼 정신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날아다닌다. 자유롭다. 그러면서 가볍고도 여리다.” 이런 특징 때문이겠지요. 몸은 지상에 묶여 있지만, 영혼은 정신만은 그렇게 거침없이 자유로웠으면 하는 바람은, 인종이나 나라를 초월하는 공통점인가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724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여덟째 주일의 복음서는 마 13:24-30의 말씀으로, “천국은 풍성한 나라로 다가오고 있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서구 기독교 국가들이 융성해지면서 신앙생활이 무뎌진 것처럼 한국교회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교회 출석도 기도생활도 나태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풍성한 나라로 다가오고 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희망의 씨를 뿌리고 노력하지만, 방해하는 세력들로 절망할 수 있습니다(24-28a).

청운의 꿈을 안고 새로운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학생들의 눈망울을 바라 보노라면, 그들의 찬란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겨우 소수만이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갈 뿐 대부분은 낙심하고 주저앉는 경향입니다. 왤까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가라지들 때문입니다. 이 가라지는 사전에선 강아지 풀, 개역과 공동번역은 가라지로, 현대인의 성경은 독보리로 번역을 했습니다. 농부가 뿌린 씨앗은 밀이었는데(29), 가라지는 밀과 유사하지만 먹을 수 없기에 아무리 가꾸어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헛수고란 무엇일까요? 가난과 시대적 배경 같은 외부적 요인만이 아니라, 가장 큰 원인은 부정적 또는 패배적인 생각을 하는 내부적 요인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류역사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 위인들은 하나같이 긍정적 신념으로 어려운 환경을 이겨낸 이들이었습니다.

 

세상(환경)이 바뀌기 전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28b-29).

일반적으로 진보적인 사상 혁명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의 특성은 변화와 개혁에 관심이 많습니다. 좋은 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나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좋은 세상이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효율적인 생산과 공평한 분배를 시도하면 유토피아가 건설된다고 생각한 공산주의자들의 생각이 그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는 그들의 생각이 실패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참된 변화와 개혁은 세상이 아니라 인간성의 변화(회개)임을 깨닫지 못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가라지를 다 뽑아버리자는 주장에, 주님은 그냥 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칫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히는 치명적인 손실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일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지도자들의 일탈이었습니다. <미투/Me Too!>운동이나 부동산 축재 그리고 각종 특혜와 비리들을 들 수 있습니다.

 

추수 때는 모든 삶의 진위가 가려지고, 풍성한 이상향인 천국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30).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은 어느 주먹깨나 쓰는 건달의 말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법으로는 시비가 가려질 것 같지 않을 때,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생각을 합니다. 홍길동,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은 조선시대 3대 도둑 우두머리로, 연산군, 명종, 그리고 숙종 조에 살았던 실존 인물들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성호사설>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의적으로 불리지만 고증은 없습니다. 밀과 가라지, 진실과 거짓, 의인과 죄인은 즉각 판명되지 않아서 사람들을 애태우곤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말씀할 뿐 아니라, 풍성하고 찬란한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길바닥이나 자갈 밭, 그리고 가시덤불 같은 세상을 부추기는 게 사실이지만, 옥토와 같은 땅에선 30, 60, 100백의 풍성한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릴 이유이며,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095.

시편 시 4:3-4.

찬송 24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청춘의 어느 날, 밤늦도록 긴긴 편지를 썼던 경험이 있으실까요? 밤새 편지를 썼지만 다음날 아침에 읽어보면, 너무 유치한 것 같아서 그냥 휴지통에 들어간 편지도 많았지요. 밤에 자면서 꾸는 꿈은, 밤에 쓴 편지처럼 날이 팔고나면 별것 아닌 게 많지만, 아침에 눈을 뜨고 꾸는 꿈은, 하루를 살아가는 이정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몽롱한 기운을 떨치고 지금 뚜렷하게 오늘의 꿈을 꾸고 계신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715일 방송>

 

2. 성령강림절후 일곱째 주일의 구약 이사야 55:10-13을 본문으로 반드시 성취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요즘 묵상식구 김동환목사님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구절들을 뽑아 나누는 작업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제겐 그런 구절들 중의 하나로, 삶이 단조롭고 무력할 때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말씀입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중략>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55:8-9).

 

절망의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빛날 때입니다(8-9).

앞이 캄캄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무슨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보이는 것마다 모두가 잿빛에 덧 씌워져 있을 때입니다. 삶의 현실이 암울할 때입니다. 그런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면 그는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절망의 소리만이 들린다고 합니다. 구약 시대의 후기 예언자 중 한 사람인 이사야는 주전 8세기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한 대예언자입니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가 된 백성들을 향해서 말씀을 전할 소명을 받았습니다. 눈도 귀도 그리고 마음까지 닫힌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이 언제나 땅보다 높음같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절망하는 사람들로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열게 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질 능력의 말씀이었습니다(10-11).

성경을 교과목에 넣어 가르친다고 항의를 받던 시절에도, <교장 훈화>는 일주일에 2시간은 지켜졌습니다. 그 시간은 영어와 수학처럼 대입시험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슴을 뛰게 하고 주먹을 쥐게 하는 생명력이 꿈틀거리게 했습니다. “Boys be ambitious!”, “A man is as he thinks.”, “사필귀정(事必歸正)”, “솔직한 의심속의 믿음은 진리에 목마른 젊은이들에게 단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눈은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씨뿌린 농부에게 씨앗과 양식을 주듯, 하나님의 말씀도 반드시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는 때문입니다(1:1, 1:1).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현존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자연을 다스렸고, 말씀으로 병자를 고쳤으며, 말씀으로 사람을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산과 언덕, 나무들 앞에서 확인하셨습니다(12-13).

이집트의 노예생활은 430년이었고, 바벨론 포로기간은 70년이 넘는 시간이었습니다. 기억하기 싫은 치욕의 시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받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우리가 배울 귀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특성을 가졌고, 그것이 하나님의 인격인 말씀을 쉽게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430년과 70년의 노예생활을 통해서도 꺾이지 않은 옹고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시고 무려 40년이란 광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훈련을 시키셨지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향한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문턱에 서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 약속하시고, 사람이 아니라 산과 언덕 그리고 나무들을 동원 귀환을 환영하시겠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088.

시편 시 2:1-3.

찬송 47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내가 도시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 대신, 오히려 우주 전체를 허락했다.” 한 동안 갇혀 지내야 했던 사람이 쓴 글의 한 대목인데요. 우리들 마음 우리들 상상력은 어떻게도 가둘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게다가 어떤 식으로든 한계를 정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크게 팽창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나 상상력만은 절대로 가난해 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늘 우리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79일 방송>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로 사도서간 로마서 7:14-25을 본문으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죄인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율법에서 복음으로!”를 슬로건처럼 외칩니다. 율법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복음에 이르게 하는 몽학선생임에는 분명합니다. 참된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율법 아래서 절망하며 살고 있습니다(14-17).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대부분의 종교들을 율법종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면 구원을 받고 악을 행하면 멸망을 받는다는 교리(?)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힘든 고행의 길을 걸으며 악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합니다. 높은 바위 끝자락에 움막을 짓고 최소한의 음식을 먹으며 경전을 읽으며 수행을 하기도 하고, 불쌍한 이들을 섬기는 일을 하면서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의 결심과 노력으로도 몸 안에서 솟아오르는 악한 생각과 욕망을 떨칠 수 없는 걸 알아야 합니다. 60년대 어느 부흥사는 자신의 욕망을 물리치겠다며 스스로 고자(鼓子)가 되었지만, 그것도 헛짓이었다 고백했습니다. 이를 두고 사도는 우리 인간이란 죄의 종으로 팔린 몸”(14) 이라고 정의합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을 끝없이 정죄할 뿐 아니라, 새롭게 살려는 모든 의지마저 꺾어버리는 무서운 힘까지 가졌다고 말입니다.

 

최선의 삶을 살지라도 누구도 죄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18-23).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리고 숨 쉬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자리가 빠져나올 수 없는 죄악의 수렁 한복판이라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빠지기 쉬운 착각을 잘 하는데, 그것은 선한 생각에 대한 거짓된 환상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선한 생각으로 희망을 가지기도 하고 그것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동하지 않는 생각은 더 큰 좌절감과 위선된 삶을 책망할 뿐입니다. 사도는 이를 두고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모습이라고 단죄합니다(23). 주일 예배에서 늘 반복되는 똑 같은 회개의 기도는 단 하나도 고쳐지지 아니한 우리의 모습을 반증합니다. 설령 조금 나아졌다 하더라도 그게 엄청난 우리의 죄의 짐을 벗어던질 수 있게 할까요?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바보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최선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가 믿을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24-25).

앙리 푸앵카레(Jules Henri Poincaré)는 강한 빛에 가까이 다가서면 설수록 더 많은 오점이 나타난다는 이론으로, 인간이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율법적인 의로는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감춰진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처음부터 죄인들은 찾아오셨고, 그들을 대신해서 죄의 멍에를 짊어지신 것입니다. 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인정하며 감사하는 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믿는다는 말은 이 복음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고발하는 율법으로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의로 감싸시는 십자가의 사랑에 눈뜨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행동은 이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081.

시편 시 119:153-160.

찬송 24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수화(手話)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운데 하나로 꼽히는데요. 그 이유가 참 멋스럽습니다. 수화하면 얼핏 손으로만 이야기를 나누니까, 서로 손만 볼 것 같지만요,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눈과 눈의 마주침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먼저 눈을 맞춘 상태에서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고 하지요. 또 대화를 끝낼지 더 계속할 건지 같은 미세한 감정 처리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서로의 눈을 꼭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눈과 눈을 마주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언어, 정말 아름다운 언어이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626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의 복음서 마 10:34-42을 본문으로 목적에 충실한 삶을 향해서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적을 향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원대한 목적과 함께 당장 해결할 현실적 목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적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 목적에 충실한 삶이겠습니까?

 

모든 말과 글은 맥락적 이해 없이는 오해투성이가 될 수 있습니다(34-37).

요즘 정치계는 말꼬리 잡기나 맥락을 포기한 유치한 논쟁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뉴스를 통해서 소위 대정부 질문이라는 것을 시청할 때는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글은 맥락적인 이해가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맥락, 혹은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문제투성이 오해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 가득한 때문입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는 말씀이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는 말씀은 너무 황당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맥락적으로 살피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신 말씀이었습니다. 역설(逆說)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합니다.

 

누구나 피해서는 안 될 자기 십자가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38-39).

삶의 불공평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금수저와 흙수저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는 것도 그런 시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를 자기 십자가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포기하고 주저앉을 원인이 아니라, 극복하고 감당할 십자가라고 말입니다. 자세히 따져보면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불리함들이 분발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준 것도 사실입니다. 저와 함께 동문수학했던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그런 불리함 때문에 인생을 승리한 이들이 여럿 있습니다. 수학 과목을 일찍 포기한 한 친구는 문학에 전념해서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버스 차장 경력을 가진 한 여자 동창은 미국 유명 대학의 인류학 교수가 되었고, 부모와 팔 하나를 잃은 친구는 대학 학장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불리함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정열을 불태울 동기부여가 된 것입니다.

 

목적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때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다 말씀하십니다(40-4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11:1-2). 누구나 멋진 희망을 꿈꾸지만 일장춘몽으로 끝내곤 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희망이 항상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강력한 목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한 친구는 고된 근로 장학생으로 노동일을 하면서도 그 환상을 품고 살았는데, 은퇴 후에도 북한 선교와 아프리카 선교에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무시하거나 포기하는 대신 오히려 적극적으로 맞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자기 인생의 목적에 충실한 삶이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상급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김민기의 곡으로 알려진 <어찌 갈거나>라는 노래가 있는데, 주어진 현실은 절망이지만 희망 가득한 미래를 바라봄으로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고 있습니다. 목적이 있는 삶이 누릴 축복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담임 우슬초목사님)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074.

시편 시 147:16-18.

찬송 1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제는 히스토리(history)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mystery),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지만, 오늘 현재는 프레젠트(present) 선물이라고 하지요. 만화 영화에서 들은 구절인데요. 원래 단어와 발음을 가지고 재미있는 연산 놀이를 많이 하는 영어권에서는 아주 익숙한 비유라고 합니다. 매 순간을 선물이라고 여길 수만 있다면, 정말 즐겁게 맞이해서 포장을 풀어 보는 것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를 채워나갈 수도 있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624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의 구약 성경 렘 20:7-13을 본문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1970년 통기타를 치는 건전노래 부르기의 전석환 가수는 노래할 이유 있네라는 노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그의 곁에 있으면 노래할 이유 있네.”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노래할 이유가 있습니까?

 

세상에는 제 정신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7-9).

온라인 몰(mall)에서는 무당 옷도 구입할 수 있다 합니다. 무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무병(巫病)을 앓고 있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9). 그는 유다의 마지막 네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예언자로 소명을 받았는데, 지도자들이 타락하고 이교에 빠진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으나, 오히려 돌아온 것은 비난과 조롱 그리고 마침내 살해의 위협을 받고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무병을 앓는 무당들처럼 그의 심장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아 견딜 수 없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상에는 악령에게 붙들려 제정신과 다르게 살아가는 무당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성령에 붙들려서 제 의지대로 살지 못하는 예레미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붙들린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충실한 삶을 살기로 작정합니다(10-11).

우리는 청소년 시절에 인생관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많은 위인들을 배우면서 말입니다. 일본 홋카이도 농학교에서 젊은이들에게 야망을 품으라!”고 꿈을 일깨운 윌리엄 S. 클라크 교수나, 초등학교 출신으로 풀무원을 창립 정농법을 주창한 원경선 선생이나, 난지도에서 살면서 나라와 고아와 청소년들을 위해 실천적인 삶을 사셨던 현동완 YMCA총무나, 가난한 환자에게 비상문을 열어 도망치게 하였던 장기려 박사 등은,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쳐 준 우리 시대의 위인들입니다. 이들은 크리스천들이었고, 그들은 하나님께 충실한 삶을 사는 방법으로 삶의 방향을 정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적들에 의해 사면초가에 몰렸지만, 그에게는 힘센 장사보다 더 강하신 야훼 하나님이 그를 지키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할 것은 그의 신앙의 눈입니다.

 

예레미야는 어떤 형편에서든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11-12).

누구나 만사가 형통하는 이른바 순경에서는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노래란 시련과 역경 중에서 부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국을 군주제에게 공화제로 바꾼 혁명가 크롬웰 장군은 시련이 자신을 압도하고 있을 때, 한 촌로 부부의 타작마당을 지나가다가 그들에게서 큰 격려와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박희진 사 한태근 곡의 <이 세상 어딘가엔>이란 노래도 그런 류입니다. “이 세상 어딘가엔 남이야 알든 말든 착한일 하는 사람 있는걸 생각하라 마음이 밝아진다” 2-4절 가사는 더욱 감동적입니다. 전석환선생의 <노래할 이유 있네>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게 하였고, 동터오는 새벽을 기다리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노래할 이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런 희망을 말씀하고 있다고 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악당의 손에서 빼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067.

시편 시 146:1-4.

찬송 196,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자유에는 확실한 한계가 있는 그만큼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가 함께 존재한다고 합니다. 환경이나 상황을 선택할 자유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한계라고 한다면 요, 그런 환경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질 것인가를 택할 수 있는 자유는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완벽한 나만의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고 보면 자유라는 것에도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617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의 사도 서간문 롬 5:6-15을 본문으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죽으신 주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착하고 남을 돕는 삶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천국에 이르는 과정이라도 되는 양 말입니다. 마침내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처럼 생각합니다.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구원을 목표로 하는 모든 종교는 저마다의 방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12-14).

대부분의 종교는 도덕적인 삶에 바탕을 두고, 인간 자신의 노력과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믿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죄 된 삶이란 부도덕하고 자기완성을 위한 노력의 부재(不在)에서 생긴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관은 이와는 정 반대인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와 죽음의 골짜기에서 죽어가는 세상에 오셔서 그들의 죗값을 치르고 이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에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전자는 구원의 삶을 향해 사다리를 타고 오르자는 종교와, 후자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의 삶으로 이끌어주셨다는 종교로 구별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 중심의 종교와 하나님 중심으로 종교로 갈리게 되며, 인간에게 희망을 두어야 한다는 종교와, 인간에겐 절망밖에 없다는 종교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무력감을 느낀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인류는 죄인을 구원하러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떠야 합니다(5-8).

고향 친구 하나가 기독교 대학을 나온 후 불교로 개종 스님이 된 후, 저에게 보살이라는 직함으로 부릅니다. 한사코 그러지 말라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보살(菩薩)이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의 버금이 되는 성인이라고 합니다. 목사에게는 그 정도의 직함은 줄 수 있는 모양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입니까? 인간은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상태에서 조금도 나아질 수 없습니다. 부도덕을 도덕으로, 자기완성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해도, 죄인의 신분을 벗어던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해아래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14:1-3, 3:9-18).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려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칭 의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슬프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자격을 상실한 사람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택할 수 있지만, 생명은 하나님 외에는 돌볼 수 없습니다(15).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죽음과 생명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 인류에게 전해진 죽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서 출발하였습니다(3:1-24). 불순종의 결과는 모든 것을 파멸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불순종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는 천형(天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종하는 사람들은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번 저주받은 인간은 되돌릴 수 없도록 완전하게 타락한 죄인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관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 죄를 짊어지는 해결사로 골고다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을 믿고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죄를 가져온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었으나, 생명을 가져오신 분은 둘째 아담 예수님이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060.

시편 시 145:1-3.

찬송 17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개를 숙이지 마라. 언제나 머리를 높이 두어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으며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으리니.”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 장애를 겪었던 헬렌 켈러의 말입니다. 사회사업에 헌신했던 그녀는 영혼을 잃지 않는 한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지요. 맑은 영혼과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아침이길 바랍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612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의 복음서 마 9:9-13을 본문으로 현상보다는 중심을 주목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소명하시는 일화 중에 세리 마태를 부르신 내용을 말씀입니다. 마태라는 인물의 배경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뜻밖에도 주님은 고급 관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9-10).

주님께서 택하신 제자들은 대체로 중심부가 아니라 변방에 살고 있는 어부와 농부들이었습니다. 주님의 활동무대와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알패오의 아들로 마태라고도 하고 레위로도 불린 사람이었습니다(2:14, 5:27). 고급 관리에 속하는 세무직원이었습니다. 당시의 세무직 공무원은 유대인들에게 미움의 대상이었는데, 까닭은 유대를 식민통치하는 빌라도의 부하라고 생각하였고, 유대인에게서 많은 세금을 강탈해가는 인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님께서 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참석했다 합니다. 세리 마태야 두말할 여지도 없는 죄인이고, 다른 죄인들이란 세리와 비슷한 빌라도의 주구(走狗/앞잡이)로 생각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태를 제자로 삼으신 주님의 뜻을 가늠하게 됩니다. 주님은 민족을 배신한 사람들도 구원하고 싶어 하셨다는 뜻 말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현상을 주목할 뿐 중심을 소홀히 합니다(11-12).

대체로 겉으로 들어나는 것에는 민감합니다.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의 대학 동창 중에는 사회 정황에 대해서 역사의식이 있을 법한 이들인데도 불구하고, 소위 뇌하부동(附和雷同)하기를 잘 한다는 이들이 많습니다. 문자 그대로 천둥소리에 맞춰서 야단법석을 하는 이들입니다. 성경에서는 바리세파 사람들이 그런 대표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는 장면을 보고 기겁을 하며 큰 소리로 비난의 화살을 쏘아 붙인 것입니다. 겉으로 들어난 것만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현상에서는 의미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주목하게 될 때 심오한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한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은 현상 그 너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13).

요즘 인기리에 재방송 중인 <전원일기>에는 공부 얘기가 심심찮게 오르내립니다. 기초가 없는 아이에게 좋은 성적을 기대하는 부모들의 어리석은 얘기입니다. 가정교사를 몇 년 경험한 저로써는 결과 중심의 학습보다는 공부하는 목적과 기쁨을 깨우쳐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임을 깨우쳤으면 했습니다. 그 다음에 공부하는 방법과 결과가 뒤따를 것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신앙생활의 의미와 목적을 지적하십니다.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신앙심에서 우러나와서 행하는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성장과 출세라는 결과에 주목합니다. 우리 교회도 여기서 한 발도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작은 신앙생활의 과정일 뿐 목표는 아닙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053.

시편 시 143:9-10.

찬송 32, 40, 73.

제목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안경을 찾으려고 온 방안을 다 헤매고 다녔는데, 문득 안경이 내 코 위에 걸쳐져 있는 것을 알게 되거나, 또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로 전화기가 없어졌다고 여기저기를 찾으러 다녔던 기억, 한 번쯤은 있으시지요? 찾으려던 물건들이 그렇게 가까이에, 또 내가 원하던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가끔은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불안해합니다. 행복이나 희망도 가끔은 그런 것 같애요. 지금도 행복이 가까이 있고 희망도 갖고 있는데, 단지 발견하지 못해서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오늘 하루 주변을 조금 돌아보셨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64일 방송>

 

2. 오늘은 성삼위일체 주일로 창 1:1-2:3을 본문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20년 전 릭 위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책이 한국교회에 소개되자 엄청난 소용돌이가 쳤습니다. 삶의 목적을 성찰하는 순기능과 함께 성경과 예수님을 앞세운 출세 지향적 역기능을 가중시켰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다시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통해서 우리들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어떻게란 질문이 아니라 라는 질문으로 읽어야 할 책입니다(1-13).

성경을 읽는 분들 중에서 실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과학적 궁금증에서 읽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경은 과학의 책이 아니라 신앙의 책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과학의 질문 어떻게가 아니라, 신앙의 질문 라고 물어야 합니다. 바로 근원과 본질을 묻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일까? 오늘 본문에는 그 답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이 7번 등장합니다. “좋았다란 히브리어는 Tob Meod/ טוב מאוד인데, 헬라어 성경 70인 역에서는 καλος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좋았다라는 단어는 제구실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구실을 하는 세상은 좋았고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제구실을 다하는 그런 존재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 수 7번을 확인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물에는 아름다운 생명들을 지어 어울리게 하셨습니다(14-25).

김민기의 노래집 <그 날/1971>에는 꽃밭 속에 꽃들이 한 송이도 없네.”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낯설어져 가는 세상을 슬퍼하는 노랫말입니다. 춘절을 맞아 고향으로 가는 중국의 농민공들이 하얼빈 역에 새까맣게 앉아 있는 무표정한 얼굴들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같은 기차자리에 앉은 중국인 선생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학생들에게 희망에 관한 말을 많이 하느냐?”고 물었는데, 처음 듣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땐 정말로 놀랐습니다. 땅이 넓고 나라가 힘이 있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들의 가슴에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가 서로 어우러져 노래하고 춤추는 그런 아름다운 조화의 세상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약육강식을 정당화하는 적자생존의 논리를 따르는 세상이 아니라, 오히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고,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이를 도와주는 세상 말입니다.

 

세상의 관리자로 마지막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것이었습니다(26-2:4).

우리 인간들이 힘들어 하는 문제 중의 문제는 인간은 왜 사는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엿샛날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말씀을 읽는다면 그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과 번성하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들을 돌보라고 말입니다.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공관복음서에서 다 찾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12:13-17, 22:15-22, 20:20-26).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마는가의 물음이었습니다.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대답하십니다. 동전이 아니라, 우리들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으로 세상의 관리자로써 살아야 할 과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실하고 진실한 경영자로써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3. 어제 묵상자료를 실수로 하루 일찍 배달하였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