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067호.
시편 시 146:1-4.
찬송 196, 41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자유에는 확실한 한계가 있는 그만큼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가 함께 존재한다고 합니다. 환경이나 상황을 선택할 자유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한계라고 한다면 요, 그런 환경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질 것인가를 택할 수 있는 자유는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완벽한 나만의 것이라고 하지요. 그러고 보면 자유라는 것에도 빛과 그림자가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6월 17일 방송>
2.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의 사도 서간문 롬 5:6-15을 본문으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죽으신 주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착하고 남을 돕는 삶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천국에 이르는 과정이라도 되는 양 말입니다. 마침내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처럼 생각합니다. 크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구원을 목표로 하는 모든 종교는 저마다의 방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12-14절).
대부분의 종교는 도덕적인 삶에 바탕을 두고, 인간 자신의 노력과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믿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죄 된 삶이란 부도덕하고 자기완성을 위한 노력의 부재(不在)에서 생긴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관은 이와는 정 반대인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와 죽음의 골짜기에서 죽어가는 세상에 오셔서 그들의 죗값을 치르고 이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에 이른다고 주장합니다. 전자는 구원의 삶을 향해 사다리를 타고 오르자는 종교와, 후자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의 삶으로 이끌어주셨다는 종교로 구별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 중심의 종교와 하나님 중심으로 종교로 갈리게 되며, 인간에게 희망을 두어야 한다는 종교와, 인간에겐 절망밖에 없다는 종교로 나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무력감을 느낀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인류는 죄인을 구원하러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을 떠야 합니다(5-8절).
고향 친구 하나가 기독교 대학을 나온 후 불교로 개종 스님이 된 후, 저에게 보살이라는 직함으로 부릅니다. 한사코 그러지 말라 해도 막무가내입니다. 보살(菩薩)이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의 버금이 되는 성인”이라고 합니다. 목사에게는 그 정도의 직함은 줄 수 있는 모양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주장입니까? 인간은 그 어떤 노력에도 불구하고 죄인의 상태에서 조금도 나아질 수 없습니다. 부도덕을 도덕으로, 자기완성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해도, 죄인의 신분을 벗어던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해아래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시 14:1-3, 롬 3:9-18).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려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칭 의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슬프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자격을 상실한 사람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택할 수 있지만, 생명은 하나님 외에는 돌볼 수 없습니다(15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죽음과 생명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 인류에게 전해진 죽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에서 출발하였습니다(창 3:1-24). 불순종의 결과는 모든 것을 파멸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불순종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는 천형(天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종하는 사람들은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번 저주받은 인간은 되돌릴 수 없도록 완전하게 타락한 죄인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관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 아들을 세상 죄를 짊어지는 해결사로 골고다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법을 믿고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입니다. 죄를 가져온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었으나, 생명을 가져오신 분은 둘째 아담 예수님이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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