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41호.
시편 시 119:81-83.
찬송 36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행 작가의 명함에 그려진 운동화 한 켤레, 대뜰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고무신 한 쌍, 밤늦은 귀가길 전철을 타는 자리에 얌전히 그려진 구두 한 켤레. 올해 몸을 지탱하느라 옆으로 늘어난 우리들의 신발. 신발은 참 많은 말을 합니다. 신발에도 지문처럼 뭔가 나만의 무늬가 담기는 걸까 생각해 봅니다. 신발이 가지런히 놓인 현관을 들어설 때처럼, 오후 4시도 산뜻하게 맞이하시면 좋겠네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2월 12일 방송>
2. 오늘은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로 마태복음서 5:21-37을 본문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라시는 뜻”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말 보다는 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학생들과 젊은이들에게서 듣게 될 때 마음이 아픕니다. 되돌아보면 우리들 삶엔 불가능보다는 가능한 일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항목들은 한결같이 불가능한 것들처럼 보입니다(21-26절).
우리들은 하루에도 5만 가지 걱정을 품고 살아간다 합니다. 그래서 온통 화날 일도 분통 터질 일도 많다 합니다. TV프로그램 중에는 명사들의 좌담회가 자주 있는데, 세대별 차이 없이 부부간 부모 자식 간 그리고 직장 동료 간에 크고 작은 마찰과 갈등들을 호소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평행선을 달리는 경우들이 많아 보입니다. 결국 이혼하거나 사표를 내던지거나 멀어진 관계들이 많습니다. 절망적인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쉬운 면들이 많이 보입니다. 조정이 가능한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좋은 부부, 좋은 가정, 좋은 동료관계들은 갈등과 마찰이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기다려주면서 조정한 경우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체면 그리고 도덕적인 면들도 조정 작용을 하곤 합니다.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인생살이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율법 중에는 불가능한 명령들이 대부분인 것도 사실입니다(27-30절).
그 불가능한 율법들이란 살인죄나 간음죄와 같은 항목들입니다.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음욕을 품거나 음담패설을 하는 것 등입니다. 성경은 이런 행위자체를 금하고 있다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에게 라가라(욕설) 하는 자마다 살인하였느니라.”(마 5:22)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단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하나도 예외 없이 죄인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처음부터 지킬 수가 없는 말씀들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율법의 기능을 말할 때, 죄를 알게 하고, 정죄하며, 그리고 절망하게 하는 것을 말하곤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율법의 절망하게 하는 기능에서 몽학선생의 역할을 강조합니다(갈 3:24). 율법은 인간을 절망하게 하지만 그래서 그리스도를 찾게 만든다고 말입니다.
율법은 절망을 향하게 하지만, 그 반전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합니다(31-37절).
1755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리히터 8.5-9.0 규모의 지진이 발생, 도시의 85%가 파괴되는 대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교회가 무너지고 신자들이 죽었는데, 당시에 가장 타락한 곳으로 지탄받던 집창촌 알파마는 재난을 피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나 관공서처럼 건물이 높은 곳들의 피해가 컸던 것과는 달리, 낮은 건물들은 피해가 적었던 탓도 있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나 은총은 전혀 달랐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어쩌면 율법의 최종 목표가 절망과 저주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희망과 생명을 향하는 반작용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1세기의 교육제도 중에 몽학선생을 두는 것이 있었는데, 주인의 아들을 스승에게 데려다 주는 임무를 가진 종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최종 목적은 절망하는 인류로 하여금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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