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08호.
시편 78:70-72.
찬송 239, 235, 25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무엇을 붙잡고 살아남았을까? <흑야/黑夜>를 쓴 엘리 위젤(1928-2016년)과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1905-1997년)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큰 질문을 갖게 한다. 위젤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를 물었고, 프랭클은 “왜 살아야 하나?”를 물었다. 목회 초년시절, 전덕애선생(거창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적극적 사고방식>을 쓴 로버트 슐러를 소개하였다)이 장기려 박사의 암 수술을 받았다며 내게 기도를 부탁했을 때, <흑야> 전문을 녹음해서 가지고 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모든 죽음을 마주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질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살아야 하나? 이 두 질문은 오늘도 우리들 모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2. 성령강릴절 후 열다섯째 주일의 구약성경 신 4:1-9을 본문으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만, 찜통더위는 계속될 전망입니다. 기후위기가 가져다 준 채찍입니다. 부자나라들의 탄소배출로 가난한 나라들이 더욱 힘들어졌고, 인류의 미래는 그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똑똑한 바보들은 제 꾀에 죽어갈 것입니다.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1-4절).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는 모래와 돌이 전부인 광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려 40년이란 길고 긴 세월동안 말입니다. 분명 죽는 길이었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빛이 내려 쬐이고, 밤에는 바위를 갈라 튀게 하는 냉기로 떨게 하고 있었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은 죽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광야 생활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죽음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광야 생활 40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훈련의 장소를 마련해 두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죽음이 아니라 훈련의 장소가 되고 기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기만 하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땅 광야도 생명의 은총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잘 듣고 지키면 땅을 차지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민족 앞에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5-6절).
노방 전도자를 만났습니다. 종로 3가에는 송 해씨를 기념하는 8각 정이 있는데, 그곳을 설교단으로 삼고 열심히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실천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란 귀 기우려 듣거나 외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의 뜻대로 실행에 옮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전도자들의 수고가 컸습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당을 세웠고, 교인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들이 교회에서부터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엄청나게 불어났고, 안티 크리스천들이 훼방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어린 주일학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따라 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을 때, 하나님과 그 백성들은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져버렸습니다(7-9절).
“이제 예배는 끝났습니다. 오늘 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세상에서 살아가십시오.” 오늘도 의식교회에서 예배 말미에 다짐하는 파송의 인사말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살다가 예배하러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들은 후에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행동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란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이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흩어지는 것이 파송하는 행동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외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더 필요한 것은 조용하게 실천하는 행동하는 삶입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의 가장 취약한 점은,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고, 행동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는 길과 죽는 길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믿음을 실천할 때이며, 행동하는 사랑이 될 때입니다.
3. 오늘은 주성 농인교회(우슬초목사 담임)에서 설교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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