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31(2025. 7. 21. 월요일).

시편 128:4-6.

찬송 44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항구를 향해 갈 것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노를 젓는다면, 바람조차 도와주지 않는다.” 로마의 대표적인 철학자 루시우스 A. 세네카(B. C. 4-65 A. D.)가 남긴 말입니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경구/警句입니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 말이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2. “무화과나무의 비유(29-33)”깨어 기도하여라(34-3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세상 끝날에 대한 관심은 나이를 먹어봐야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에 힘까지 줘가며 천국이나 종말이니 하며 얘기하는 것들은 빈말이거나 허세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절박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팔십이 되고 보니까 어떤 분이 신문을 읽으면 가장 먼저 찾아보는 곳이 부고란/訃告欗 이라던 얘기가 실감이 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자신의 죽음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하게 된다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 무화과나무나 모든 나무들을 비유로 하신 말씀은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거의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인데, 마치 나이 들어 신문의 부고 란을 챙겨보듯, 이 말씀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봄이 되면 연초록 잎이 돋아나고 돌아서면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고 말입니다. 시간이 속절없이 다가섰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세월의 무상함이 우리들의 삶을 동여매고 제 멋대로 끌고 가는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 곧 젊은 날에는 뜻도 모르고 주절대던 그 마지막 날이 다가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분명히 말한다.”는 단서를 붙이시고,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고 단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이를 보증하듯,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개역개정판에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라고 조금 다른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종말 이해는 성경 안에서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임박한 종말론이 가장 유력하고 확실한 것으로, 우리들 각각의 인생이 그 삶을 마치는 날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이 끝이 나는 그 순간이 종말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지당한 주장입니까? 세상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강조하는 바로 그 사람이 죽게 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은 후 수 억년이 흐른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인이 세상 생활을 멈추는 날, 세상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은 멈추게 마련입니다. 이런 주장은 마태복음서와 마가복음서에서 강조합니다(9:1). 두 번째는 미래적 종말론입니다. 온 세상이 언젠가는 다 멈추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우주적인 파국의 날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말입니다. 이 미래적인 종말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서가 강조하는 종말론입니다(21:9). 세 번째는 실현된 종말론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임박한 종말도, 미래적 종말도 오기 전에,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에 눈을 뜨고 잠깐 씩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가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실존적인 삶의 의미와 목적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데 주로 요한복음서의 강조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12:45). 무화과나무 비유가 암시하는 것은 미래적 종말론이었습니다.

 

3. 요즘 나눔의 기쁨이 채움보다 훨씬 큼을 배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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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30.

시편 128:1-3.

찬송 2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 도교의 경전으로 <포박자/抱朴子>란 책이 있습니다. “과일의 씨 속에 사는 벌레는 그곳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바다를 설명해 주고, 우주를 설명해 주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위대한 꿈을 가진 사람은 큰 문제와 부딪쳐 싸운다. 그래서 도전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걸 수 있을 정도로 큰 문제를 붙들고 씨름을 한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꿈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이 이루어지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227.

 

2.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골 1:24-29을 본문으로 전도하는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란 유형의 건물과 조직, 제도를 가진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잘 정의한 로마 가톨릭의 사제 한스 큉은 교회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교회 상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일꾼의 큰 사명은 복음인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는 것이었습니다(24-26).

제가 아는 몇 평신도 사역자가 있습니다. 철학을 가르친 적도 있고, 많은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진솔한 언변과 생활로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그런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직접 교회의 목사나 신부로 일선에서 설교자로 일하는 유명 인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공통점은 훌륭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의 모습 뒤에는 그리스도가 보이질 않습니다. 항의를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를 전면에 드러내기 보다는 자신의 사업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꾼이 맡은 최고의 최대의 사명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말씀, 그리스도가 중심에 서 있지 않은 찬양과 기도, 어떻습니까? 얼마나 어리석고 빗나간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진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27).

사도는 유대인들이 판을 치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놀라운 사건들을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를 알게 하신 것 뿐 아니라, 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맞먹는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저의 중학교 생물 선생님을 전도해 보려고 했습니다. 권사님이신 사모께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하시며 제게 응원을 부탁하시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선생님 댁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고, 저녁 식사에 자주 불려가서 진수성찬을 대접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단 한 마디도 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훗날 미국의 큰 아들에게로 가셨다는 소문과 지금은 신앙생활을 너무도 열심이시라는 어머님의 전언을 들었습니다. 이방인이 예수를 구주로 믿는 일은, 시작은 사람일지 몰라도, 그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목적은 성숙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는 것입니다(28-29).

예나 제나 우리 기독교회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대교회 지향적인 전도관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작전입니다. 이른바 전도대작전이 한참이던 70년대 80년대는 물량공세를 펼치기도 했습니다. 전도 왕에게는 냉장고를 상으로 걸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 교회의 민낯을 세상에 까발린 것입니다. 90년대 어느 작은 교회 교사가, 물량공세를 펼치는 대형교회의 여름 성경학교 프로그램을 보면서 비판했던 것이 공교롭게도 북한과 관련지음으로 곤욕을 치렀던 사건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연변에서는 단기 선교사로 간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100불을 준다해서, 이런 대형교회 집회를 찾아다니는 전문꾼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숙한 사람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서도록 하는 일, 그것이 전도의 목적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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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29(2025. 7. 19. 토요일).

시편 127:4-5.

찬송 4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다만 기쁨도 슬픔도 아니다. 커다란 기쁨은 커다란 슬픔을 일으킨다. 그리고 많은 슬픔은 많은 기쁨으로 통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의 총장이었던 역사학자 토마스 칼라일(1795~ 1881)의 말입니다.

 

2. “가장 큰 재난(20-24)”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25-28)”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요즘 유튜브에는 곰이나 호랑이 등이 지진이나 산사태를 미리 예감하고 지나가는 자동차나 사람들을 막아서서 구출하는 장면들을 보곤 합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을 합니다만, 청각에 관해서는 제가 키우는 애완견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인간보다 6배나 높은 청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렇듯 이 세상에서 벌어질 재난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비참한 참극/慘劇을 미리부터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때가 이르면 해와 달 그리고 별에 징조라는 것이 있겠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지진과 해일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를 언급하면서, 사람들이 직면하게 될 공포와 떨림 그리고 기절하는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흔들리게 될 때,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람의 아들 인자가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시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입니다. 두려움과 절망의 순간에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두려움과 절망의 날은 피할 수 없는 예견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절망의 날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어딘 가엔>이란 복음가가 있습니다. 4절에는 이런 구절입니다. “이 세상 어딘 가엔, 하늘을 예경/禮敬하고 이웃을 돕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 기뻐서 눈물 난다.” 박희진 사, 한태근 곡이었습니다. 캄캄한 밤에 샛별이 더욱 빛나듯, 절망의 순간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 인자가 오시는 날은 언제일까? 이런 궁금증은 모든 사람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기꾼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기칠 것만을 연구하는 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사는 길을 가도록 격려하고 도와줄 것이 아니라, 살짝 거짓말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들을 이리저리 뜯어 붙여서 그 날이 바로 19921028일 이라고 말입니다. 다미선교회의 이장림과 같은 자들입니다. 당시 이를 취재했던 한 기자는 "이들은 하늘나라가 아닌 집으로 돌아갔으며"라는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휴거 소동 다음날 MBC 뉴스데스크의 첫 앵커의 멘트는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였고, KBS 9시 뉴스의 앵커 멘트도 비슷하게 "휴거의 기적을 기다렸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였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한 외국 뉴스 앵커가 "서울의 유명한 교통체증으로 예수님이 늦어지신다"는 드립을 쳤다고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이런 사기극을 기다리는 눈치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주장이 한 아무개 총리 부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려고 무당을 찾는 것이고, 또 그래서 자신은 제가 왜 명리학을 했냐. 저 주역도 공부했다. 관상도 공부했다. 손금 공부도 했다? 하도 답답해서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막 걸음마를 띠는 아이가 장래 어떤 사람이 될까를 궁금해 합니다. 그런 생각을 거듭하게 되면 답답해 죽을 지경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들려 줄 얘기는 <케세라 세라>를 불러보라고 권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될 것이라는 스페인어 Que será, será인데, 영어로는 'Whatever will be, will be'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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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28(2025. 7. 18. 금요일).

시편 127:1-3.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분노하거나, 미래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현재를 두루 살펴라.” 미국의 작가 제임스 터버(1894-1961)가 남긴 말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살라는 말이, 까르페디엠을 풀어쓴 말로 들립니다.

 

2.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5-6)”재난의 시작(7-19)”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많은 신앙적 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신화에 가까운 유산들도 있는데, 그 하나가 예수께서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기 위해 올라갔다는 28계단의 대리석 계단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며,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이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면 죄의 용서를 받는다 해서, 루터가 로마를 방문하고 그 역시 무릎에서 피가 나도록 이 계단을 올라갔으나 죄 사함의 기쁨을 얻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갔던 1979년 여름에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무릎으로 오르는 체험은 할 수 없었지만, 그런대로 의미 있는 전설이라 생각했습니다. 로마에는 세계 4대 성당이 있는데,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성요한 대성당),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대성당(성 베드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성모 마리아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이 그들입니다. 이들 성당들은 그 안에 있는 조각품들과 그림들, 건축양식과 품위 있는 대리석들로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예루살렘 성전은 많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전들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는 것과 둘째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아름답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고 예언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이 예언은 첫째로 40년 후에 소위 유대 로마 전쟁(66-73 A, D,)에서 산산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은 예외 없이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을 비롯해서, 세계 도처에서 뽐내고 있는 마천루들도 반드시 무너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 기초가 부실한 때문도 있지만, 인간의 탐욕은 양극화를 부채질 하고 있으며, 급기야는 끊일 날 없는 전쟁으로 스스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화려한 문명이라는 것도 한 순간에 잿더미로 바뀌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도/目睹하게 될 것입니다. 1983년 여름 두 번째로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유대인의 마지막 항쟁 터였던 사해 주변의 맛사다를 방문했습니다. 헤롯의 여름 궁전 등 유적지를 비롯 완전히 폐허가 된 그곳에서, 예수님의 예언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 아름답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이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자리에 그대로 얹혀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날이 올 것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초라한 것들임을 깨우치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문명이 그 길을 밟아나갈 것입니다.

 

3. 어제는 제가 46년 전에 36개월간 재직했던 부산 제일루터교회의 청년(당시 부산대 학생들)이었던 세 분이 저의 아산 집을 방문했는데, 대구로 시집을 간 주부 권사님, 모교인 부산대에서 음대교수로 재직했던 독일 박사출신인 피아니스트, 그리고 창원에서 중견기업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옛날을 아름답게 추억해 주어서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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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27(2025. 7. 17. 목요일).

시편 126:4-6.

찬송 48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받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그리고 받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이야기한다.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의존적인 생각이 많은 기쁨을 앗아간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출발한다고 다짐하면 정말 많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209.

 

2.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41-44)”,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45-47)” 그리고 과부의 헌금(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셋째 단락입니다. 1978년 강남 은평교회를 개척하신 고 옥한흠목사님(1938-2010)은 제자훈련이라는 독특한 성경교육으로 교회를 크게 성장시켜서 1981년 사랑의 교회로 개명한 후 2003년 현재의 이정현목사께 후임을 맡겼습니다. 옥 목사님이 남긴 말씀 중 하나는, “우리 교회는 대부분이 시장 어귀에 좌판/坐板을 벌리고 장사하는 가난한 성도들의 기도와 헌금으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오늘의 말씀 과부의 헌금과 연결점이 있습니다. 지금도 지역마다 대형교회로 성장한 순복음 교회들은 대부분이 가난한 성도들로 구성되었다는 어느 목사님의 간증도 기억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헌금 궤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관찰하신 주님의 말씀 역시 헌금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헌금은 무엇이며 왜 하는 것입니까? 제가 목회를 결심하면서 가졌던 각오가 있었습니다. 십일조를 하는 교인 10가정만 있으면 굶어죽을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다고 말입니다. 교인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면 따라 살면 무방하다고 말입니다. 헌금 혹은 십일조는 아주 오래된 역사가 있습니다. 십일조가 처음 언급된 것은 아브라함이 북부 동맹군을 물리치고 복귀하면서 살렘의 왕이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친 사건을 십일조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고(창세기 14:17-20)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교활한 행동 때문에 형에게 미움을 받아 복수를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베델(하느님의 집)에서 제단을 쌓고 하느님께 십일조를 반드시 바칠 것임을 서원했던 사건을 십일조의 기원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창세기 28:18-22). 그리고 이렇게 역사가 깊은 십일조 제도를 출애굽 당시에 다시 언급하시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셨는데, 이런 배려는 이 제도의 기원이 바로 하느님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기 위한 조치라 할 수 있습니다(말라기 3:7-12).

    이렇듯 헌금 혹은 십일조는 하나님께 받은 넘치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한 가지 표현방법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부자와 비교하신 말씀은 헌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그 정신을 말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진심으로 감사하는 태도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넉넉한 데서가 아니라, “구차하면서도전부를 바치고 있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헌금을 드리려고 할 때, 무엇보다도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삶의 형편이 어떻든지 감사한 마음이 가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삶이 쪼들리고 힘겨울 때는 헌금하고 싶은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리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를 위해서 힘들고 어려웠던 때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가령 저는 훌륭한 부모님에게서 아침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놀랍게도 예배를 드리는 때는 어김없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가난할 때는 물론 부자가 되어서도 헌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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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26(2025. 7. 16. 수요일).

시편 126:1-3.

찬송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안으론 젊은 가슴이 있고, 위로는 하나님이 계시니.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가 말해 주노니, 우리도 숭고한 삶을 누릴 수 있고, 이 세상 떠날 때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 발자국을 남길 수 있노라고. 아마도 누군가 우리 형제가 인생의 엄숙한 행로를 달리다가 난파되어 절망에 빠질 때, 다시 마음 가다듬게 하는 그런 발자국을. , 우리 일어나 일을 하자. 어떤 운명이 닥쳐올지라도 기꺼이 이룩하고 추구하면서 수고하고 기다리는 것을 배우자.”    H. W. 롱펠로우의 시 <인생찬가>의 마지막 연을 소개드렸습니다.

 

2. “부활에 대한 토론(27-40)”을 읽었습니다. 사후 세계에 관한 생각들은 아주 다양하고 또 엄청난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사후 세계란 부활을 전제로 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은 신앙인이라는 사람들까지도 부활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의 이성/理性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영역인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으로만 이해가 되고 대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부활을 부정하는 유대인 지도자 그룹이 등장합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부활이 있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펄쩍 뛰는 사람들입니다. 그 까닭은 오늘 본문에 분명히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랍 문명권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수혼법(嫂婚法/ Levirate Law)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형제를 위하여 동생들이 형의 자식을 낳아주는 관습이었는데, 중동 아랍세계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일이었습니다(38:8-11, 25:5-6, 4:5). 그러니 훗날 부활하여 천국에서 한 여인을 두고 여러 남자들이 자기 아내라고 할 해프닝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천국에서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혼법은 잠정적으로 인정하시면서도, 더 이상 천국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은 물론 부모 형제가 기다리고 있다고 만 믿고 있는 분들에게는 난리가 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전혀 이 세상 질서와 인연과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말씀입니다.

    동양에서는 우리들 인생엔 4가지 중요한 통과의례(通過儀禮/ rite of passage)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출생, 성인, 결혼, 죽음 등이 그것들입니다. 그래서 매 단계마다 가능한 성대한 행사를 하곤 합니다. 그것은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이라는 주제 앞에서는 이 모든 과정들이 의미를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어느 하나도 적용 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지금 최고의 가치라고 여겨지는 부귀영화나 장수와 같은 것들이 전혀 무가치한 것들이 될 테니 말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부활 후의 새로운 세계에 초점을 맞추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출가한 승려들이나 독신생활을 기꺼이 수행하는 수도사들이 그런 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와 신념에 따라서는 그들 사이의 관심사도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부활 후의 삶이란 딱 하나의 말씀으로 정리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수천 년 전의 사람들을 다시 살려낸 말씀이십니다. 더 이상 소설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일가를 이루고 모든 과제를 마치도록 하나님께 맡겨야 하듯 말입니다.

 

3. 엊그제는 의용소방대원들 십여 명이 방문해서, 소화기도 점검해 주고 화재경보기도 새로 설치해 주고 조언도 주셨습니다. 문득 좋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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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25(2025. 7. 15. 화요일).

시편 125:4-5.

찬송 7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의 반이 벌써 지났는데, 세월만 헛되이 흘러가고, 젊은 시절 꿈꾸던 것 하나도 이루지 못했구나. 드높은 성벽 위에 노래의 탑 쌓으려던 그 꿈. 결코 게으름이나 쾌락을 쫓지도 않았고, 끝없는 초조로 번민하지도 않았건만, 다남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로를 그 슬픔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게 만들었네.” H. W. 롱펠로우의 시 <인생의 한 가운데 서서>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라인 강가에서 쓴 시라고 합니다.

 

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20-26)”을 읽었습니다. 우리들은 첫 번째 경험하였던 일들에 대해서 오래 기억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첫 인상이라는 것도 그래서 중요하고, 첫 사랑도 매우 중요합니다. 가령 성경구절도 그런 영향권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본문은 수도 없이 들었고, 동시에 수도 없이 설교했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딱 한 번의 특별한 경험이 마치 못에 박힌 듯 아주 오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대학원 시절 교목실에서 조교생활을 했는데, 조교의 역할 중 하나는 강사를 모셔오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만해도 교수님들이 자가용이 없는 분이 대부분이어서 학교 자동차를 배차 받아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는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유선 전화(소위 백색전화)로 연락을 해야 했는데, 강사들의 집 주소를 알아두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날은 고 문익환 목사님이 채플에 강사로 오시기로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오늘 본문으로 설교를 하시게 되었는데, 본문 배경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라고 말씀하신 후, 저 유명한 구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는 말씀에서, 동전에 그려진 가이사의 흉상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우리들 몸과 마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으니,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이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그 목사님의 연세보다 더 나이가 든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제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잊고 사는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 가에 대한 회한과 함께, 제정신을 차린 시간마저도 하나님께 봉헌하는 삶을 살았을까 하는 두려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봉헌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시간의 봉헌입니다. 하루 24시간이 짧다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너무 길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시골 생활은 매우 복잡하고 분주합니다. 할 일이 쌓여 있습니다. 세끼 밥을 해 먹는 일을 시작으로, 세탁과 청소 그리고 화단과 채전의 잡초와의 싸움, 잔디밭의 풀들과의 싸움 그리고 물주기 과목 살피기 등등. 며칠을 걸려 잔디를 깎고 나면 또 다시 한 뼘씩 자란 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둘째는 재물의 봉헌입니다. 은퇴를 하고 나면 돈 문제로 골치를 썩힐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유일한 노후자금인 연금을 절반으로 뚝 잘라 나눈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시골집이긴 하지만, 손봐야 할 곳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각종 세금도 보통이 아닙니다. 게다가 자동차 관리비며 의료 보험 비 등등. 다행히 세 자녀들이 정기적으로 도와주어서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셋째는 봉사를 위한 봉헌입니다. 장애인 교회에 매달 1회 이상 자비량 설교봉사를 비롯해서 가족 친지를 살피는 일, 마을 주민을 위한 활동 등 만만치 않습니다. 모두가 시간과 물질이 뒤따라야 하는 일들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시간을 값지게 사용하고 싶은 원칙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결국엔 늘 부끄러울 뿐 하나님의 것을 제대로 드리지 못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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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24(2025. 7. 14. 월요일).

시편 125:1-3.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높은 누상 꼭대기 창가에 앉아,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봅니다. 그는 이와 같이 높은 자리를 바라지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도달해 버렸습니다. 나비가 된다 해도, 그는 이미 저 아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높은 꼭대기로 올라온 이후, 나갈 문은 없습니다. 교회 뾰족탑의 배후에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그는 사랑합니다. 그는 삶과 죽음을 그리고 그 둘을 나누는 절대자를 사랑합니다. <중략>. 운명에게 잊혀 버려져 있더라도 오랜 전에 그는 이미 운명을 용서했습니다. 그를 부러워하세요. 그를 얕보세요. 그런 일들을 그는 오래 전에 이미 용서했습니다.”

케스트너의 시 <높은 창문>(터무니없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2.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9-19)”을 읽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우리들의 인생관 내지는 가치관에 대해서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인생관을 정립하려고 힘쓴다 생각합니다. 적어도 대학 공부를 마칠 때쯤이면 남은 인생을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다는 어렴풋한 실루엣을 형성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세상일이 생각처럼 되는 일이 없습니다만, 사람에 따라서 꿈꾸는 인생관에도 많은 편차가 있을 것입니다만, 그리고 종교의 유무에 따라서도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종교인의 경우에는 가령 저와 같은 기독교인은 하나님에 의한 창조와 섭리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의 인생을 생각하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삶의 길을 걷고자 힘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무종교인이나 불신자들은 대체로 자기중심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두고서 삶을 준비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런 인생관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부자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맡기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포도 수확철이 되자 소작인들에게 종을 보내서 도조/賭租()를 받아오도록 하였는데, 소작인들은 그 종을 때려서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두 번째 세 번째 종을 보냈으나 매번 때려서 빈손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자신의 외아들을 보냈는데, 종들은 그가 상속자인줄 알고 그를 죽여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를 안 주인은 그 소작인들을 죽여 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 포도원을 맡기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이것은 앞으로 예수께 일어날 일이었고, 이어서 머릿돌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머릿돌에 떨어지는 사람은 산산조각나 망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비유는 신앙적 인생관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작인으로 살아야 할 우리들 인생은 자신에게 맡겨진 생의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비 신앙적 인생관을 가진 소작인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신들의 마음대로 살아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과 소작인들은 정 반대의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으니, 자연히 꼬여버린 삶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등장하는 소작인들의 인생관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허술한 것인가 하는 점 말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내가 있다는 인생관은 자기 자신 외에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삶의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마치 갱단의 조직이 막강한 듯 보이지만, 어느 한 순간, 더 이상 기댈 수도 믿을 수도 없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오게 마련이고 그 때에는 각기 제 살길을 찾아 돌아선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내란 특검을 지켜보면서, 전임 대통령이 무덤까지 같이 갈 것이라 굳게 믿었던 경호처차장과 안보실 1차장의 배신(?)으로 한 순간에 절망에 주저앉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믿어야 할 것은 자신도 아니고 이런저런 이권과 특혜를 주었던 부하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조용히 묵상해 보는 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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