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74(2024. 4. 20. 토요일).

시편 시 59:7-9.

찬송 1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 아침 하늘, 오늘은 좀 어두컴컴해서 일어나기 힘드셨지요? 어제 나름대로 작은 폭풍이 한번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케이비에스에 오는 길에 보니까,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우산들도 보이고, 또 하루 사이에 다시 스웨터까지 꺼내 입으신 분들도 간간히 보이던데요. 그래도 아침 공기 비 덕분에 아주 맑은 것 같습니다. 오늘 맑은 공기 한번 흐리지만 가득 맡으시면서, 좋은 음악 들려드리겠습니다.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 시절 눈으로만 별을 관찰했습니다. 육안으로 관측했다고는 믿기 정확해서, 그의 제자는 브라헤가 완성해 놓은 기록을 읽어내는 데만, 무려 4년 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면 귀가 열리는 것처럼, 관심 있는 것을 바라볼 때는 눈도 점점 밝아지는 걸까요? 수천의 관객 속에 섞여 있어도 엄마 얼굴만은 정확히 보인다는 김연아 선수처럼, 안경을 벗고도 또 눈을 감고도 선명하게 보이는 소중한 것들이 더 많이 늘었으면 합니다<KBS FM 1, 가정음악, 2009421일 방송>

 

2. “그리스도인의 생활원칙(5-17)”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에서 절망을 느낄 때도 그렇지만, 적어도 사는가 싶은 삶을 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볼 때입니다. 그래서 몇 날을 고뇌할 수도 있지만, 그런 골치 아픈 일을 훌훌 털어버리자는 솔깃한 소리에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곤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저와 여러분에게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그대는 크리스천으로써 어떤 삶의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사도는 공허한 말이 아니라, 실천 가능한 진실한 말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써 다음과 같은 삶의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첫째는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는 일입니다(5). 만일 우리가 세속적인 욕망에 빠져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 우상숭배처럼 하는 탐욕을 갖지 않는 일인데, 이를 거역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둘째는 거짓말로 서로 속이는 일입니다(9). 우리는 선거 유세를 주목하면서 우리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말과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는 정치 평론가는 우리 사회가 너무 추하고 더러워서 말하고 싶지 않다고 절망하면서도, 그래도 낡은 인간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기를 희망하자고 말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 300명의 의원 중 87명이(29%) 개신교인이라고 밝혔다 했습니다. 그분들이 새로운 지도자의 불씨가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따뜻한 동정심과 마음을 새롭게 해서 서로 돕고 불평할 일이 있어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12). 우리들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는 일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을 생각하면 불가능하기만 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네 번째는 사랑을 실천하자고 말씀합니다. 사랑의 실천은 지나온 우리의 경험으로는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기만 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 다섯째로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라 하십니다. 감사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느냐는 반문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을 찾아보면 놀랍게도 감사할 것은 많고 많습니다. 여섯째는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라 하십니다. 애초에 온전한 사람이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죄를 물려받고 죄와 어울리며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이를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나눌 수 있다면 진심을 다한 도움을 주려고 한다면 마음을 열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우리에게 기적 같은 일들을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우리의 억울함과 분노를 풀어주고, 사랑과 감사 용서의 마음을 솟아나게 합니다. 20181225일 저녁 9시 미국 펜실베이니아 체스터 카운티에서는, 소총으로 무장한 남편이 자신의 가족을 살해할 목적으로 별거중인 아내를 찾아갔는데, 밤새도록 대치하다가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경찰의 노래에 자수했던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힘이 얼마나 위대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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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73(2024. 4. 19. 금요일).

시편 시 59:6-8.

찬송 48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국적으로 내리는 이번 비가 그치게 되면, 농부들의 일손이 더 바빠지겠지요. 차밭 일꾼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창 찻잎을 따는 철에 차밭 일꾼들은 하얀 장갑이 초록으로 변할 때까지 종일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이곤 합니다. 곡우 무렵에 수확한 녹차는 맛이나 향 모두가 무척 뛰어나다고 해서, 이 무렵의 차밭은 가장 바쁘다고 하지요. 이번 비로 차나무가 무성한 언덕은 더 짙은 초록이 되어 있을 겁니다. 차나무가 일꾼들은 그 진녹색의 차 밭 사이로 분주히 바쁜 발길을 재촉하겠지요.

    “말랐던 풀뿌리의 속잎은/ 따스한 연록의 융단으로 깔린다/ 그 위에 몸 부비며 딩구는 꽃바람/ 포송포송 살찐 집오리들이 아련한 비장의 꿈을 꾸며 보드란 연록빛 융단을 밟고 구불구불 이동한다/ 키보다도 긴 막대기를 몰고 가는 불그레한 살구꽃/ 살구 꽃 뺨에 저 타이완 소년은 몇 살쯤 될까/ 익는 아지랑이에 녹은 길 부어내리는 해살이/ 금가루를 축복인양 듬뿍 듬뿍 듬뿍 받으며/ 봄맞이 나가는 오리 떼 행렬은/ 어느 섬에 연한 선을 그리듯 조용한 숨에 맥락이 된다.”

    또 하나의 봄이 시작됨을 알리는 듯 한 곡입니다. 작곡가 임 무상은 대구를 대표하는 원로 작곡가입니다. 평생을 오선지에 묻혀 고집스럽게 작품만을 써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작곡가는 음악 하나에 오랜 시간 집중해 왔습니다. 서예가 곁에 서면 묵향이 은은하게 묻어나듯, 작곡가의 주변 역시 음악의 향기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덕분인지 자녀들 역시 음악을 좋아했고, 여전히 모두 음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고 하네요. 딸 임 여옥은 작곡가로 성장을 했고, 아들과 며느리 손녀까지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래도 가장 즐거운 순간은 제자들과 함께 일 때라고 작곡가는 지난 시간을 추억합니다. 그의 제자들이 좋은 스승이자 음악 선배로써 그와의 시간을 추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문 덕수 시 임 무상 곡 <봄의 서곡>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420일 방송>

 

2. “세속의 유치한 원리에 대한 경계(8-19)”그리스도를 통한 새 생활(20-2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골로새가 위치한 소 아시아지방은 유럽과 접경지대를 이루는 곳으로 헬라 철학 사상이 오래 전부터 유입되어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철학은 신앙을 저급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당신의 대부분의 신앙이란 미신에 가까워서 유식한 통치자들에게 있어서는 쉽게 다스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바울을 비롯한 1세기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철학의 장벽을 뚫고 지나가는 일이 최대의 난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철학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정공법(正攻法)의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조선조의 정하상이 재상에게 올린 상소문(정하상의 상제상서)이라 하겠습니다. 1801년 황서영의 백서사건으로 부친과 맏형이 순교하자 당시 7살이던 정하상은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에서<상재상서>를 올려 천주교의 교리를 풀어 밝히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천지 만물의 창조자가 있음을 말하고 인간에게 양지(良知) 즉 양심이 있음을 들어 천주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습니다. 또한 그는 천주 십계를 들어 천주교의 실천 윤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천주교의 십계안에 유교의 삼강오륜(三綱五倫)에 관한 모든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교의 실천 윤리에 비해 천주교의 그것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그는 밝혀보려 했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만 명이 넘는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 기독교회의 기초를 다진 교회로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하며, 다만 아쉬운 점은 당시의 정치적 싸움(노론과 남인)에 많은 희생자들 발생했다는 점과, 양반과 지식인이 주축이 되었다는 점이 기독교 정체성에서 약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50년대와 60년대의 설교를 보면, 거의 모든 설교들이 공 맹자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진리를 해명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고등종교가 윤리와 도덕을 기반으로 할 뿐, 자칫 기독교 신앙을 윤리적인 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강조되는 것은, 20, 21세기 현대인에게 성공과 출세가 신앙생활을 목표처럼 강조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이 가장 강조하는 할례의식을 진정한 할례란 세례임을 강조하는 점이나, 죽은 자의 첫 부활로 예수를 믿어야 하는 점, 그리고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죄가 무력하게 되었다는 점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재교육이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새로운 환경에 적절히 도전과 응전을 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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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72(2024. 4. 18. 목요일).

시편 시 59:4-5.

찬송 37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리처드 바크라는 작가는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고 했지요. 심리학자 최정길씨의 책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 의하면, 가장 잘 달리는 영양은 가장 높이 뛴다고 합니다. 일명 값비싼 <신호보내기의 원리> 때문이지요. 동물의 왕국 같은 데를 보면 은요. 영양은 단체로 무리지어 가다가 사자나 강한 적이 나타나면, 부리나케 흩어져서 도망갑니다. 하지만 몇몇은 도망가는 대신, 높이뛰기를 하듯이 위로 껑충껑충 뛰고만 있습니다. 여차하면 잡아먹힐 다급한 상황에서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말이 예요.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장난이 아닌, 목숨 걸고 하는 절박한 신호랍니다. 사자에게 신호를 보내는 거지요. “봐라 사자, 나 이렇게 높이 뛸 줄 아니까, 달리기도 엄청나게 잘 한다. 그러니까 나는 잡지 않는 게 좋을걸!” 이렇게 알려주는 신호요. 그런데도 사자가 그 신호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그 영양이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잘 달리지 못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겠지요. 정말 목숨을 걸고 보내는 값비싼 신호입니다. 물론 애초에 달리기 능력에 자신이 없는 영양은, 그런 값비싸고 위험한 신호는 아예 생각하지도 못한 채, 무조건 도망부터 가겠지요. 우리에게도 인생의 어떤 새로운 단계에서, 선택을 해야만 할 때가옵니다. 직장을 옮기는 일이든 아예 새로운 일이 됐든, 인생 전체를 걸라나는 듯이 몰아칠 때가 있지요. 그럴 때, 훨씬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더 돋보이는 값비싼 신호 쪽을 택할 것인지, 그저 평범한 그래서 더 안전한 비싸지 않은 신호 쪽을 선택할 것인지, 그건 역시 달리기 실력에 달려 있겠지요. 평소 얼마나 잘 열심히 달렸느냐? 노력과 실력이 결정적인 순간에 높게 뛰어오르는 자신감 발휘에 결정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한 건 평소 실력인 거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54일 방송>

 

2. “교회의 일꾼 바울(1:24-2:7)”을 읽었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랜 시간 친교를 나누었다고 그래서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간적인 면에서나 신앙적인 면에서 그리고 사상적인 면에서 너무 간격이 크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평생 함께 동고동락한 부부 사이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면을 발견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죽하면 고사성어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생겼났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처럼 불가피하게 생전에 본 일도 없는 골로새 교우들에게 바울사도는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교회의 일꾼이라고 말입니다. 1세기 소아시아나 서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던 예수 운동은 많은 교회 일꾼이라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모여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는 전혀 다른 신앙을 주장하는 이들이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목적으로 신앙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단 여부를 판별하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전을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그중의 대표적인 것이 이단들입니다. 재산을 바치게 하고 생업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사기집단들 말입니다.

    교회의 일꾼에 대한 사도의 자기소개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러 가지 점에서 울림을 줍니다. 교회의 일꾼이란 첫째로 교회(성도)를 위해서 고난을 짊어지는 사람입니다. 흔히 교회 일꾼을 사명자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의 학식이나 능력으로는 세상에서 부귀영화는 아니어도 크게 고생 없이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길을 들어선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할 때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친척들 가운데서도 그리고 친구나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일꾼들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교사도 있고, 봉사하는 사람도 있으며, 예배를 섬기는 성가대원이나 예복을 준비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밖에도 친교를 위해서 섬기는 사람과 몸이 불편한 분들을 교회로 모시고 오는 차량 봉사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런 모든 교회의 일꾼들이 성숙한 인 간, 성숙한 신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교회 일꾼들의 수고는 서로 서로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될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완성하는 것은 모든 교회의 구성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갈 때입니다. 교회가 양적으로 커지고 교회의 활동이 활발해지면 질수록 많은 문제가 생기는데, 그 제일 원인은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재한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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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71(2024. 4. 17. 수요일).

시편 시 59:1-3.

찬송 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차가운 밤에는 에큐니 가오리의 짧은 소설 목록집이 도움이 됩니다. 그 소설집의 바탕을 이루는 건 주인공들이 좋아하는 것들이지요. 모든 주인공들이 수시로 좋아하는 것을 취합하거나 되찾곤 합니다. 가령 한 주인공은 기르던 개 듀크가 계란으로 만든 음식과 아이스크림과 배와 음악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기억합니다. 한 아내는 자신이 사랑한 무사가 말린 전 개물을 특히 좋아했던 것을 잊지 않지요. 또 한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생전에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은 묽고 맑은 빈 술을 한 좋아했음을 항상 기억하고요. 한 아버지는 학생시절 연인이 좋아했던 병에 든 요구르트를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그에 대해서 번역가는 에큐니 가오리 자체가 좋아하는 것에 훨씬 많이 기억하는 성격이라고도 말했지요. 싫어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더 많이 기억하고 즐기는 긍정적인 성격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음식이 됐든 색깔이 됐든 뭐가 됐든, 한 사람이 특별히 좋아하는 것들은 성격과도 관계도 많겠지만, 연인을 만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가령 영국의 한 심리학자 리커드 와이즈만이라는 교수는, 남녀가 첫 만남에서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 확률과 이유에 대한 실험을 했지요. 그러자 외모 같은 점들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가장 큰 영향력을 갖는 건 대화였습니다. 특히 두 사람의 대화가 좋아하는 피자 토핑은 무엇인가? 좋아하는 방송 프로그램은 무엇인가? 처럼 좋아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춰질 경우, 서로에게 호감도가 크게 높아졌다고 해요. 설사 좋아하는 피자 토핑이 똑 같지는 않아도 호감 도는 높아졌다는데요. 사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는 다는 것 자체가, 이미 두 사람이 비슷하게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라는, 공감대가 잘 맞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누군가를 소개받으러 나갈 때는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쭈욱 적어보고 나가는 것도 좋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29일 방송>

 

2.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2(15-23)”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눈앞에 있는 작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보다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말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가령 저와 함께 대학생 기숙사에서 룸메이트로 지낸 도서관학과의 A씨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철제로 된 2층 침대를 사용하였는데, 자신은 젊으니까 2층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11시에 취침을 하는데, 취침 시간이 지나서 기숙사로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은 고등학교 교사이신 형님께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의지할 이 없는 저보다는 좋은 조건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공부에 소홀히 하면서 늘 바쁘게 사는 것이 눈에 거슬리기도 하고, 여섯 살이나 더 먹은 내가 충고를 해 줘야 하겠다 생각하고 수업에는 착실하게 들어가느냐고 물었고, 노트 정리는 잘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딱 한번 충고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한 학기를 마칠 때쯤 다음 학기에 군대나 가야 하겠다는 말을 듣고 헤어졌습니다. 그 친구 역시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결심도 하고 자신에게 맹세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니까 별천지 같은 일들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초심을 잊어버리고 현실에 함몰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 역시도 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초심을 간직하고 살기란 어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제어는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오늘의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을 으뜸으로 여기는가에 대해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가 누구신지를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평준화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기독교회의 창시자나 교주 정도로 말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저와 같은 목사들의 책임이 아주 크다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누구이신지를 알아듣기 쉽도록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유대인들이 쉐마(들으라)처럼 쉬지 않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한번은 월간지 <그 말씀>에서 각 교파의 설교의 특징을 특집으로 내겠다고 의뢰를 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루터교회의 설교의 특징 중 맨 나중에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는 특징을 얘기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고 하더라도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낙제점수와 같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에 앞서 계셨으며,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부활의 첫 인물이 되셨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십자가로 화해시켜 주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구세주)이십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동행할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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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70(2024. 4. 16. 화요일).

시편 시 58:9-11.

찬송 54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 주위에 요즘 글씨 학원에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손 글씨를 아주 예쁘게 잘 써서 칠판글씨 같은 것을 도맡아 쓰다시피 했지요. 그런데 잡지사에 다니면서 취재 때마다 급히 받아 적다 보니 글씨가 엉망이 됐답니다. 그런데 컴퓨터자판 시대에 무슨 대수냐 했는데, 갑자기 학창시절처럼 예쁜 글씨의 다이어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절실했다고요. 또 영화포스터 같은 곳에 제목 글씨를 쓰는 켈리그래피 일에도 관심이 갔답니다. 그래서 결국 글씨학원에까지 등록을 했지요. 얼마 전에는 마침내 옛날의 손 글씨를 되찾았다며 증거의 엽서까지 보내 주었어요. 이런 글씨를 가진 사람은 평소 마음도 일상도 이렇게 산뜻하고 깔끔하지 않을까 싶었던 바로 그런 글씨체로요. 실제로 심리분석가들은 글씨도 한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상태에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하지요. 간단한 예로, 글씨체가 동글동글한 사람은 성격도 원만하지만, 다소 권위의식이 있고, 네모반듯한 글씨를 쓰는 사람은 조용하면서 무뚝뚝한 성격인데, 글씨가 작으면 소심하고 다소 신경질적일 수도 있지요. 또 영어필기체를 쓰듯이 날려쓰는 사람은 글씨 그대로, 간섭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성격의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런 연관성 때문에 범죄수사 같은 데선, 필적감정으로 용의자의 심리상태나 당시 상황을 추측해 내기도 하는데요. 이젠 컴퓨터의 키보드 시대라 손 글씨 쓸 일이 훨씬 줄어들긴 했지요. 그래도 친구 엽서를 보니까 덩달아 기분도 깔끔해지고 산뜻해 지는 게, 수능 논술 고사같이 손 글씨가 들어가는 시험에선, 시험관의 채점 심리에도 아주 작게나마 영향을 좀 미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26일 방송>

 

2. “인사(1-2)”, “바울의 감사(3-8)”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3-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세 번째 단락입니다. 신약성경에는 27권의 책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바울이 쓴 서신이 13권이나 됩니다. 그런데 바울 서신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는 점이나, 공식적인 인사말,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문제점들과 그에 대한 대안,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위로와 권면의 말씀, 그리고 맨 나중에는 마지막 인사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바울 서신의 수신자는 바울 사도가 개척했던 교회 지도자들이나 교우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서신 안에는 사도가 사랑했던 교우들의 이름이 나오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특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긴 하지만, 골로새 교회는 사도가 개척한 교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골로새는 소아시아 브리길라 남쪽에 있는 성읍인데, 사도가 선교 여행을 다닐 때 지나가던 길목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에바브라 라는 제자에 의해 개척된 교회였습니다(1:7). 에바브라는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을 위해서 옥바라지를 한 신실한 일꾼이었고, 그곳에서 골로새 교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전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1:24, 4:3, 10, 18). 에바브라 역시 옥살이를 했던 것인지, 아니면 병든 사도를 위해서 병간을 위해 자원했던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함께 옥에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옥중서신으로 분류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1세기 다른 교회들에서 찾을 수 있는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매우 교활한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연약한 성도들이 쉽게 신앙이 무너지곤 하였습니다. 영지주의의 대표적인 사상은 2원론입니다. 빛과 어두움, 선과 악, 영과 육 등으로 모든 사물과 내용을 둘로 분리해 놓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악에서 선으로, 육에서 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런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가령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잘못을 저질러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영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육적으로 행한 것들은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런 이단적 주장에 맞서서 살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선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죄와 흑암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늘 기억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광명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을 상속을 기억하며 많은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할 분명한 목적이 예 있다고 말입니다.

 

3. 임구원 목사님이 한국을 방문 중에 계십니다. 병환 중의 장모님과 처가댁을 둘러볼 예정이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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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9(2024. 4. 15. 월요일).

시편 시 58:6-8.

찬송 4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어른들은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성격이 만사라고 하기도 하지요. 인간사는 성격이 모든 걸 다 좌우한다는, 사람에게는 성격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인데요. 그런 만큼 성격은 심리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 중의 하나이지요. 성격을 좀 더 객관적이고도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검사법도 많이 개발해 왔습니다. 그런 검사법 가운데는 알렌 에드워드라는 심리학자가 개발한 <성격 선호 검사>라는 것도 있는데요. 검사에서 제시한 성격을 좌우하거나 판단하는 기준은 열다섯 가지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남보다 더 잘 하려는 성취 정도, 어려운 일을 하기 전에 계획을 세우는 순서와 준비성 정도, 재치 있고 영리하게 말하고 재미있는 농담과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재능 발휘의 정도, 자신의 견해를 관철하려 하는 지배의 정도, 새롭고 다른 것을 하려는 변화의 정도, 이성과 데이트하고 이성과의 관계를 즐기는 이성에 대한 욕구의 정도, 이런 식으로 열다섯 가지가 되지요. 성격을 구성하는 것이 열다섯 가지밖에 안 되나 싶기도 하고요. 열다섯 가지나 되는구나 싶기도 해요. 그걸 어느 쪽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도 성격이 복잡한지 단순한지로 나누어질까요? 그런데 이렇게 성격 검사해 주는 검사법은 발달해도, 사실 성격은 거의 크게 바뀌기 힘들다고 하지요. 그러니 갖고 있는 성격을 가능한 좀 더 좋은 쪽으로 고치고 다듬는 게 최선이라는 말, 성격 검사의 기준항목들 만큼이나 잘 헤아려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15일 방송>

 

2.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라(1-11)”작별 인사(12-14)”을 읽었습니다. 22대 총선을 치르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행복하게 살도록 도울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말의 실수가 적어야 하느냐에 주목한 선거가 아니었느냐로 기록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통령의 대파 값 얘기나, 황 상무의 회칼 얘기가 결정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일화는 오래 전에 했던 말이 아니라, 선거 기간 중에 일어났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시사 하는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말에 대해서 실수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선거 판세를 좌우할 그런 엄청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실수를 알아차리는 순간, “제가 잘못 알고 한 말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땀 흘려 수고한 농민들의 고충을 잘 살펴서 마음 다치게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고개 숙여 사과했더라면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며, “제가 너무 열이 나서 욱하는 기분이 떠든 망언이었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고개를 숙였더라면 훨씬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실수를 하지 않도록 사전에 자기 관리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그러지 못했을 경우라도 잘못을 인정하는 그런 마음이 항상 내재되어 있는 성품이 아쉬운 우리 모습인 것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중심에서 솟아나오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양떼를 잘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위대한 과제가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양떼를 잘 돌보는 일입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첫째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돌보는 일입니다. 교회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많은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학교의 선생님들이나 직장의 상사들이 그들이고, 나라 살림을 돌볼 선량(選良)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초심을 잃지 말고 그 직분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정당하게 힘쓰는 자세와 모범을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둘째는 젊은이들은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윗사람을 존경하고 복종하는 자세입니다. 좋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이 있습니다. 좋은 학생은 교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은 금방 알아낼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권능에 복종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인류 역사를 비극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결정적인 잘못은 자신들이 바벨탑의 꼭대기에 올라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잃게 하였습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세상을 슬프게 만드는 악마와 싸우는 사람이 되라고 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신앙적인 문제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힘들게 하고 악의 소굴로 만들어 가는 불의의 세력을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신앙적인 관심사 곧 천국시민으로써 만이 아니라, 이 땅의 죄악과 불의에 대해서도 앞장서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날마다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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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7(2024. 4. 13. 토요일).

시편 시 58:1-3.

찬송 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취직을 위해서 입사 지원서를 냈습니다. 그리고 1차로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을 통과했지요. 이제 2차 관문만 넘어서면 됩니다. 그런데 그 2차 관문이 전문적인 심리 적성검사 같은 게 나을까요? 아니면 회사의 인사담당직원이나 임원이 직접 하는 일반 면접이 더 나을까요? 어느 쪽이 더 정확하고 또 공정할까요? 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입사시험에서의 심리검사 결과와 입사 후의 직무수행 능력 평가가, 늘 일치하지는 않았답니다. 심리검사나 적성검사 결과가 좋다고, 입사 후 직무수행 능력도 똑 같이 좋았던 건 아니었지요. 하지만 일반 면접관이 보고 평가하는 점들이 심리검사나 적성검사의 결과와 다른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일반면접관도 결국 지원자들의 행동이나 말을 관찰하고 분석하지요. 심리검사나 적성검사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다 전문적이고 과학적인 심리검사나 적성검사가 낫다는 주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요. 때문에 앞으로의 입사시험에서는, 일반 면접관에 의한 평가보다 심리검사 같은 것에 의한 평가와 선발이 늘어날 거라고 하지요. 그러니 앞으로 취업준비생들 사이에 면접시험 대비요령이 아니라, 심리 검사 대비 요령 같은 게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방법이야 어떻든 면접 받을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분들 많으시겠지요. 요즘. 그런 분들 모두 힘들게 오는 봄이 더 반갑듯이, 내 인생의 봄날도 좀 힘들고 더디게 올 뿐, 더 크고 반갑게 꼭 오리라는 희망과 인내, 절대 잃지 마세요<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16일 방송>

 

2. “은총의 선물을 잘 관리하는 자(1-11)”그리스도인이 받을 고난(10-19)”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엊그제 52년 만에 만난 대학 동창의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 인상은 여자처럼 귀여운 외모에 말씨도 정감이 넘치는 앳된 소년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입학 후 한 두 달이 되어 학교 신문사의 기자가 된 후로는 온갖 핑계를 대고 수업을 빠져 밖으로 돌았습니다. 아마 출석은 다른 친구들이 대답을 대신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학점관리조차 제대로 못해서 입대를 하게 되어 헤어졌는데, 제가 대학원에 다닐 때 복학을 했지만, 여전히 신문사 기자로 생활을 하느라 저와는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50년이 훌쩍 넘어 재회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친구의 중학교에 다니던 여동생을 한 6개월 가르치느라, 매일 저녁은 이 친구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가족들의 면면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부친은 한국에서 제일가는 화장품 회사의 전무이사로 자녀들에게 헌신적인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시쳇말로 부모의 후광이 자녀들에게 나약함을 길러주었다 얘기했습니다. 물론 모든 자녀들이 어디 하나 빠지는 곳은 없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없다는 것과 주어진 삶을 넉넉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으로 만족하는 아주 평범한 생활을 했다 합니다. 지금도 매일 정해진 아침 시간에 수영장을 찾고, 친구는 해 오던 광고 일을, 아내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강남에서 제일간다는 교회를 다닌 부모님 덕에 그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지만, 결혼 후에는 교회 출석을 꺼린다 했습니다. 자신이 신학대학 출신이지만, 확고한 신앙관도 정체성도 없어서 쉽게 포기한 것 같다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앙생활에 나태해 지는 과정을 잘 소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신앙생활에서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삶이란 누구든 땀 흘려야 하고 인내해야 할 것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을 매우 낯설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을 땀 흘려야 하고,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욕정을 따라 살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안국동 현대 본사 지하층에서 1년 동안 과장급을 대상으로 성경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한 번도 지각도 결석도 하지 않겠다 다짐한 분들이 차츰 낙오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모임을 갖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편함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즐겁게 살고 싶은 욕망을 이겨내지 못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종말론적인 시대 조류를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더욱 더 정신을 차려야 하고, 기도해야 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자신이 받은 은총의 선물인 재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재능을 잘 관리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오해하면 교만해 지고, 잘못 관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영광을 돌린다는 정신으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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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6(2024. 4. 12. 금요일).

시편 시 57:9-11.

찬송 4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순간 우리 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시계가 생긴 듯합니다. 굳이 시계를 보지 않더라도 밥 먹을 즈음이 되면 시장해지고 매일 비슷한 시간에 잠이 들고 일어나게 되지요. 주말만큼은 좀 더 늦은 시간까지 게으름을 피우고 싶지만, 몸 안의 시계는 마음과 달리 늘 같은 시간에 눈을 뜨게 만들곤 합니다. 그러고 보면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지요. 어느 순간 큰 오차 없이 주어진 시간들이 저절로 꾸려져 나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몸 안의 시계는 이제는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한 주를 위해서 좀 더 편안하게 쉬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늘 참인 이 명제는 대상을 아이들이나 어른으로 제한할 필요도 없지요. 주중의 일과나 다른 사람과 약속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고, 온전한 나로써 보낼 수 있는 시간. 이것을 일컬어 어떤 이는 휴식이라 부르고, 또 어떤 이는 무위의 시간이라 부르기도 하겠지요. 무엇으로 부르던 그 시간은 분명 필요합니다. 가끔씩 이러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는 건, 내 삶의 주체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기도 할 테니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힘들고 어려워지면, 사람들 사이에서 벗어나 늘 홀로 있는 것을 택했다고 하지요. 친구는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말할 만큼, 벗들을 아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 때문에 친구들이 걱정을 하고 염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탓이었지요. 친구에 대한 그의 마음은 속 깊고 두터운 것임엔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혼자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친구라는 울타리 이기게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현대적인 우정이란 오히려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남들에게 내 보이기 힘든 곳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러한 신망 깊고 단단한 관계 말입니다<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412일 방송>

 

2. “정의를 위한 수난(8-22)”을 읽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정의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정의의 개념은 윤리, 합리성, 법률, 자연법, 종교, 공정함, 혹은 균등함, 그리고 선포된 윤리의 위배에 따른 처벌 등에 바탕을 두고 내리는 도덕적인 옳음의 개념이다.’ 고 합니다. 마이클 샌들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의론을 설명합니다. ‘(1). 사람들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공리주의, (2).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3). 정의를 행복의 합계나 자유보장으로 단순히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다양한 도덕적, 종교적 가치에 대한 논의로부터 공동체 구성원의 좋은 삶과 공동선에 대한 답을 천천히 찾아보자는 공동체주의, 이 중 마이클 샌델은 세 번째 공동체주의, 미덕 추구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센델은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해 온 도덕에 기초한 정의 개념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도덕적 이해는 불완전해서 계속해서 보완과 발전이 첨부되어야 하는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정의는 무엇입니까? 아모스는 인간의 약점을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의해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십일조와 정결한 제사와 같은 종교적인 헌신에서 환멸을 느꼈습니다. 형식과 진정성이 빠진 위선적인 종교 생활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고후 5:17).

    이제 우리는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써 예수님께서 위임하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갈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는 결코 공 맹자가 말하는 도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이란 이론적일 뿐 실현 불가능한 공론(空論)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인간은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우리를 향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살아가는 길을 가르쳤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도덕적인 완덕(完德)에 이르도록 힘쓰는 수행 또는 수련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실을 그리스도에게 정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말할 때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듯 하고, 누군가를 섬길 때는 그리스도께서 섬기듯 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빌지 아니하면 안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를 하기 전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역시 우리들에게 숱한 시행착오가 따를지 모릅니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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