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65(2025. 5. 16. 금요일).

시편 119:43-45.

찬송 34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올해 91세가 된 셜리 맥클레인은 미국인 배우로, “나는 기적의 힘을 사랑한다. 그리고 어려움에 놓였을 때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는 명언을 하였다. 기적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 기적을 경험하려면 기적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자신만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73.

 

2.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칙(1-11)”을 읽었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질문을 하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요즘 눈에 많이 띄는 글들은 특히 나이든 분들의 주장은, 누구도 의지하지 말고 특히 자식도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라고 말합니다. 나이 들어 보니까 서러운 것도 많고 배신감도 많이 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젊은 날에는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고 하면, 노년에는 자신을 돌보면서 살라고 합니다. 부모를 홀대하는 자식들의 얘기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참 못된 사람들이다 싶으면서도, 그들의 진심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살아가는 것도 힘겨운데, 부모님이 무거운 짐처럼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부모님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를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홀대하고 구박할 수 있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엊그제 신문에서도 좋은데 놀러가자고 모셔간 홀어머니를 공항에 버린 아들 얘기가 있는가하면, 아들 며느리가 짜고 요양원에 버린 얘기도 들려옵니다. 비정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도 효도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칭찬해 온 것은 그 시절에도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대는 달라도 부모 마음과 자식 마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부모는 열 자식을 돌봐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돌볼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찌하겠습니까? 내리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에게는 소홀해도 제 자식에게는 끔찍한 것으로 고맙게 생각해야 하겠지요.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몸은 땅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하늘에 두고 살라 하십니다. 참 어려운 일로,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은 것과 진배없다는 말씀입니다(1-4). 둘째는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라 하십니다(5-8). 많이 가지려고도, 높이 오르려고도 말라는 뜻입니다.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까닭입니다. 셋째는 거짓말로 서로 속이지 말라 하십니다(9-11). 거짓말은 자기 부정입니다. 자신의 선함과 진실함이 거짓말과 함께 사라져버리니 말입니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세상 사람과는 다르게 살라고 하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미친 얘기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제 스스로는 똑똑하다 하는데, 바보 멍청이가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살이와 절연하고 깊은 산속으로나 아무도 찾지 않는 사막으로 떠나 살게 된 은둔자가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도 아니면 세상살이의 일반적인 루틴을 부정하고, 수도자가 되거나 독신자 또는 결혼을 포기하는 성직자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런 세속 한 복판에서 독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높은 바위 위에서 혹은 사막 한 가운데서 은둔자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삶일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매일 전쟁터를 불사하는 시끄럽고 울고불고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평범한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삶이,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이 가장 힘겨운 고행일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 저의 집 울타리에는 빨간 색 크레졸 병을 여러 개 매달아 두었습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뱀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볼까 해서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한다면, 피차 경계를 정하고 평화협정을 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는 주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기를 구하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64(2025. 5. 15. 목요일).

시편 119:40-42.

찬송 24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소크라테스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분임은 나는 내 자신을 모른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객관적인 잣대와 기준이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점도 단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때문이다. 이를 어쩌나?

 

2. “세속의 유치한 원리에 대한 경계(6-23)”을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1세기의 기독교 공동체는 아직 일반 평신도들이 성경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사도나 다른 선배 교우들이 들려주는 구전/口傳에 의지하여 신앙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전 교우들은 기억력이 유난히 좋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는 21편의 서신들은 대부분이 당시에 흔히 사용하는 구어체이고, 그 기록물들 역시 가장 쉽고 많이 사용하던 코이네/Κοινή였습니다. 주후 1453년까지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지방에서 많이 사용하던 그리스어였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몇 가지 권고사항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6-7). 그것은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위에 살아가는 일인데, 다름 아닌 말씀을 기억하며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유명인사는 구약을 통째로 암기한다는 말을 했다 하는데, 실제로 감리교회 소재송 목사님이 그런 분이라고 해서 기자가 물었는데, 창세기로부터 외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요구절을 취사선택해서 외우려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진정한 할례인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8-13). 유대인들은 할례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의식을 갖는데, 이와 유사한 기독교회의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그분의 공로로 다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중요한 신앙의 척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 된 빚문서를 무효화시키셨다는 것입니다(14-15). 십자가의 진리를 깨우치기까지는 우리는 항상 죄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참 자유하게 되었다는 진리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형식적인 신앙생활, 곧 먹고 마시는 문제나,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는 등의 문제로부터 진정성 있는 신앙생활로 전환할 것을 말씀합니다(16-19). 형식적인 신앙생활에도 가치는 있지만, 그것은 겸손을 가장/假裝한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다섯 번째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살아가는 세례의 삶이 요체라 하겠습니다.

    어느 강습회 자리에서 백발이 성성하신 목사님이 손을 드셨습니다. 성경에서는 기도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하는데, 말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납득이 안 된다는 질문이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은, 문자주의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언어생활에서 충분히 검증이 되는 일입니다. 어떤 주제로 설교를 한다거나 강의를 할 때, 중요한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악센트를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저는 여러 해를 여러 종류의 가정교사를 했었는데, 주의가 산만한 학생에게는 소위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선생님을 주목해 보는 일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주목해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에 해당되고 있습니까? 집중력이 필요한 사람에게 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절을 일반화시켜서 어디에나 인용한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책읽기를 가르칠 때는 매 단락/paragraph 마다 요점을 적어두게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단원을 정리할 때는 그 요점들을 연결 지어 맥락을 찾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은 살 전 5:16-18에 나오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만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수백 가지의 하나님의 뜻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을 앞에 두고 하신 기도에는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22:42)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모든 말씀은 그 맥락 혹은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Text in Context).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63(2025. 5. 14. 수요일).

시편 119:37-39.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카를 융은(1875.7-1961.6) 아주 귀한 명언을 남겼다. “무의미는 인생이 꽃피우는 것을 억눌러 결국에는 병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의미 있음은 모든 일을 참고 견디게 해준다.” 그래서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항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삼는다.

 

2. “교회의 일꾼 바울(24-2:5)”을 읽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전도한 친구가 장로가 되었습니다. 제가 고향을 갔을 때, 고향 교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친구 마을의 교회 장로님이 되신 것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기뻤는데, 몇 번째인가 부터는 무슨 논쟁 대상이라도 만난 양 교회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고 공격적이었습니다. 화도 나고 만나는 것이 꺼려졌지만 생각해 보니 그를 전도한 책임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샛말로 하면 A/S를 해 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몇 가지 문제점이 분명했습니다. 첫째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성경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판에 박은 듯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도에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바쁘기는 한 것 같은데, 집안 살림과 취미생활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도시의 대형교회의 목사들을 부러워하며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골의 작은 교회 목사로 교인들을 수송하는 승합차로 만족하지 못하고 개인 승용차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대원생들을 지도할 때, 신세계인가 대형 백화점에서 영업부를 맡았던 이력이 있는 나이든 학생이 졸업을 하고 교회를 개척해서 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막 개척한 교회인데도 불구하고 목사님이 승용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제게 참고하라며 일러준 말은 현대 교회는 갖춰야 할 것은 다 갖춘 교회를 교우들이 선호한다며, 피아노, 에어컨, 냉장고, 컴퓨터, 자동차 등등을 얘기했습니다.” 일리는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교우들은 시작하는 교회가 시작하는 교회다워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목회자 부부가 개척교회를 위해서 합심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중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목회에 목숨을 걸고 일하는 그런 목회자를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장로 친구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일꾼으로써 자신을 예로 들어 몇 가지를 권고합니다. 첫째 교회의 일꾼은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24). 둘째 교회의 일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25-28). 사도는 이 대목에서 아주 많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교회의 일꾼이 존재하는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인건 이방인이건 모두가 복음을 듣게 될 대상들이었습니다. 셋째 교회의 일꾼은 일면식도 없는 골로새 교우들 뿐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우들에 대해서도 이 말씀을 전하고 싶은 진정성을 밝히고 있습니다(1-3). 넷째 교회의 일꾼은 바른 복음과 거짓 복음을 분별할 수 있기를 가르쳐야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4-5). 1세기 초대 교회 안에는 이단은 물론 도덕주의자나 율법주의자 등의 거짓 교사들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21세기인 우리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위해서 교회에 침투한 세력들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대표적인 집단들이 문선명의 통일교회나 박태선의 천부교 그리고 이만희의 신천지와 같은 집단들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왜곡하고 있으며, 죽지 않고 영생할 것이라든지, 부자가 되어 근심 걱정 없는 삶을 살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가장 쉽게 속아 넘어가는 것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가르치는 근본주의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은 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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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2(2025. 5. 13. 화요일).

시편 119:34-36.

찬송 10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레바논의 시인 <예언자>의 저자 칼릴 지브란은 낙관주의자는 장미에서 가시가 아니라 꽃을 보고, 비관주의자는 가시만 본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는 육신의 눈보다는 마음의 눈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2.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15-23)”을 읽었습니다.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우리 인간으로써는 신앙적인 문제들까지도 이성적으로 다시 말하면 설명이 가능한 듯이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물론 무식한 사람처럼 무조건 믿으면 좋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를 꺼려하고, 불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도덕과 윤리적인 차원에 머무르기 때문에 그들이 가르치는 경전에서는 이렇듯 설명이 가능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성경을 보면, 도덕과 윤리적인 주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깊이 들어가 보면 도덕과 윤리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서, 혼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가령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율법에 관한 가르침에는 도덕과 윤리를 훨씬 더 넘어서는 깊은 진리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5:21-22) 그러니까 형제(친 형제만이 아니라 일반인)에게 화를 내거나, 몹쓸 욕설을 퍼붓거나 미련한 놈이라 비웃어도 살인죄에 해당된다는 뜻입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 이 말씀에 의해서 가십을 늘어놓으며 낄낄대는 예능 출연자들은 모두 간음죄의 처벌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해 아래 한 인간도 죄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일반 종교에서는 이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덕과 윤리의 기준을 범하지 않는 경우에는 누구도 죄를 고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회에서는 이런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구세주라는 인물이 세상에 등장한 사실을 알리고 그가 세상의 모든 죄를 보속/補贖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고, 우리가 그 분이 행하신 일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의 길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진리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중심사상은, 세상에 오신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신앙 고백이라는 말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어떤 논리나 설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항상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이 신앙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이 신앙에 다가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교파마다 여러 종류의 신앙고백서들을 소개하고 있고, 신앙에 이르게 하는 가시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실증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나 희랍 정교회 등은 이른바 역사와 제도라는 측면에서 많은 강조점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성자 숭배사상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런 역사적 제도는 기독교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고 흔들리는 믿음을 단단히 붙잡아 주는 눈에 보이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신앙의 중심 성을 잃지 않고 견지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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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1(2025. 5. 12. 월요일).

시편 119:31-33.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지 않은 길>/ The Road Not Taken의 저자 로버트 프로스트는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곳을 빠져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 피하지 말고 정공법을 선택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당당하게 모든 문제와 맞서는 자세가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2. “인사(1-2)”, “바울의 감사(3-8)” 그리고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9-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셋째 단락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대로 골로새서는 바울에게는 조금 특별한 서신입니다. 바울 자신이 개척하지 아니한 유일한 그의 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회는 바울에게는 매우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였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를 병간해 주던 에바브라가 그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안의 어려운 사정을 바울에게 많은 시간 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해하는 부분이 하나님 이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민간신앙이 뿌리를 깊게 내린 사회에서는 하나님을 사람보다는 조금 우세한 힘과 지혜를 갖고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진안에 가면 마이산이라는 신기하게 생긴 두 개의 산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에는 이갑용이라는 도사/혹은 처사가 80여기의 돌탑을 쌓았는데,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의 농민반란으로 나라가 뒤숭숭할 때,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기도하며 돌탑을 쌓았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돌탑에 사용된 돌들은 그 지방 돌이 아니라 동해안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 처사가 축지법을 사용해서 하룻밤에서 몇 차례씩 동해안을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지방에 사는 분들 중에는 이런 전설 같은 얘기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가르쳐야 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인간보다 조금 우월한 능력을 가진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시고 하늘나라로 옮겨주셨다고 말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는 과정에 있어서 항상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타종교가 절대자로 한 분을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을 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부와 성령에 대해서는 일반 종교에서도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하지만, 성자에 대해서는 그분이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매우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아마도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인지 오늘 본문은 매우 헬라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은 소아시아 지방의 골로새 사람들에게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라는 점이며, 둘째로 성자 그리스도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하셨다고 말합니다. 셋째로 만물은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 분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성자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점입니다. 다섯째로 성자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만물의 으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이성의 차원이 아니라, 신비한 차원이라고 하겠습니다. 누구나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식으로 표현하면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감화 감동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이르렀다고 하면 이보다 더 큰 은총은 없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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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59(2025. 5. 10. 토요일).

시편 119:25-27.

찬송 53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역설의 진리를 설파하는 책 <그래도/Anyway>는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 의심할지라도, 착한 일을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올바르고 선하고 진실한 일을 할 때, 그 속에서 존재의 의미와 만족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인사(1-4)”, “협력과 반대(5-12)” 그리고 작별인사(13-1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요한 삼서는 요한 일서 그리고 이서와 두 가지 점에서 다른데, 요한 일서가 일반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할 때, 삼서는 첫째 가이오 에게 보낸 사신이라는 점과 둘째 다른 서신들이 거짓 교사들의 문제를 취급하는데 반해, 삼서는 문제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 서신의 배경이 되는 초대교회는 아직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회가 구성되기 전이긴 하나, 지역 교회들 마다 이런 저런 문제들이 불거져나오고 있었고, 이를 지적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그곳이 어디든 문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특유한 이기심과 욕망은 향기가 아니라 냄새를 풍기게 마련인 때문입니다. 표제어가 협력과 반대라고 공동번역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5-8절에서는 나그네 된 교우들에 대해서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진리를 위해서 함께 일하는 동역자인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9-10절에서는 야망이 큰 디오드레베와 같은 지도자에 대해서 분명한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우리 기독교회 안에서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직제가 세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제 지인 중에도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나,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에 선출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늘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그 공동체에 합당한 지도자가 필요한 법인데, 사회적인 성공여부로 교회 지도자를 선출할 수도 선출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사회 공동체와 교회는 정반대의 목적을 갖고 있는 때문입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섬김을 지도자가 갖출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11-12절에서는 선행에 힘쓰며 모든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데메드리오와 같은 인물에 대한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섬김과 봉사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교회 공동체에 필요한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는 밖으로부터 공격하는 거짓 교사들뿐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지도자들의 문제 또한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요한 삼서가 바로 이런 문제였습니다. 그런 구체적인 문제들이란 나그네 크리스천에 대한 우호적인 환대가 부족한 점이었습니다. 어느 사회에서건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는 피할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는 많은 봉사 단체들이 있는데, 그중에는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것을 가장 큰 덕목으로 삼는 곳도 있는데, 바로 분도 수도회입니다. 주후 529년에 설립된 베네딕투스 수도회는 아브라함이 낯선 행인 3명을 극진히 섬김으로 자신의 조차 놋을 구할 수 있었던 옛 역사를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18:1-33). 그리고 교회 안에 일어났던 세속적인 권력 다툼의 문제였습니다. 일반 사회와 교회 공동체는 근본적인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자리를 잡아가면서부터는 우쭐대는 사람들이 교회를 흔들게 되었습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지배자로 군림하기 위해서 힘을 규합하는 경향이 있는 것에 반해, 교회 공동체는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는 사람으로 가장 밑으로 내려가는 그런 자세가 요구되는 것을 망각한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와중에서도 섬김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문명 시대에 사람들은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서 안정을 가지게 되자, 신앙의 중요함을 잃어버리고 사는 경향이 있지만, 교회가 본래의 자리로 내려갈 때, 다시 말하면 세상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정위치를 유지할 때, 세상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은 욕구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3. 지난 8일 제267대 루이 14세 새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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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58(2025. 5. 9. 금요일).

시편 119:22-24.

찬송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근면한 자만이 휴식의 진정한 참맛을 안다.” 헨리 포드가 남긴 말입니다. 마치 땀 흘려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한 바가지의 물이 꿀맛이듯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열심과 열정으로 대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2. “인사(1-3)”, “속이는 자와 그리스도의 적(4-11)” 그리고 작별인사(12-1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1세기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방의 서신은 일정한 양식이 있었습니다. 발신자와 수신자에 대해 밝히고, 간단한 인사와 덕담이나 종교적인 경우에는 축복의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발신인은 원로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일서와는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신인은 아주 가까운 지인인 듯한 선택받은 귀부인과 그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요한 일서가 교회에게 보내는 공적인 서신임에 반해서, 이서의 수신인은 극히 발신인과의 가까운 사적/私的인 관계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발신인은 많은 성도들의 안부를 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적인 편지로써 끝날 내용은 아니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고 폭넓은 안부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구절을 삽입함으로 극히 개인적인 편지이면서 동시에 그 배후에는 많은 지인들이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우리들이 흔히 의례적으로 언급하는 기도한다든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기도와 사랑이 진정성을 품고 있음을 드러내는 설명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 안에 있고, 또 앞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진리 때문에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우리와 그들 사이에 공통점은 함께 공유하고 있던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축복의 말 가운데서도 이를 잊지 않고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내려주시기를 빕니다.”고 말입니다.

    아주 짧은 인사말을 읽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주제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첫째는 서신의 품격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페이크 뉴스/ fake news 뿐 아니라, 너무 가벼운 띄우기에 식상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매일 시청하게 되는 국회 상임위원회에서는 존경하는 아무개 의원님이라는 말이 남발되고 있지만, 사실은 1분도 지나지 않아서 험악한 공격적인 말로 바뀌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그 예라 하겠습니다. 품격을 잃은 화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인사말은 시종일관 내용의 일관성과 진정성이 한결같다는 점이 감동을 줍니다. 특히 사랑한다는 표현을 처음에는 나에서, 진리를 아는 모든 사람들로 발전하더니, 그리고 진리 안에 거하는 이름 모를 사람들에 이르기까지로 확대되고, 마침내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둘째는 진리에 대한 언급이 많은데 비해서 진리가 무엇이냐는 설명이 없다는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충분히 공유하고 있는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다 중학생이 되면서 멀어진 친구를 55년 만에 타지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와 찍은 사진에는 영원히 잊지 말자.”라는 글귀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아주 친한 친구였음에 분명합니다. 동생을 통해서 만나보고 싶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그 친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강습회가 있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2-3시간을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눴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두 사람의 살아온 행적이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낳고 시집 장가보내고 잘 먹고 산다는 것 외에는 따로 할 얘기가 없었습니다. 그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만일 신앙이나 삶에 대해서 1차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함께 풀어갈 고민이나 문제에 대해서 할 얘기가 없다면, 그 대화는 무미건조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진리에 대한 대화가 가능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진리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예수가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 위에서 우리의 삶이 지탱되고 의미를 갖는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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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57(2025. 5. 8. 목요일).

시편 119:19-21.

찬송 5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70년대 가장 많이 불렀던 복음가는 <좋으신 하나님>이었을 것입니다. “1.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2.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네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3. 한없는 축복을 우리게 주시네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짧은 가사와 단순한 가락에도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 놀라운 힘이 들어 있어서 좋아했습니다.

 

2. “영원한 생명(13-21)”을 읽었습니다. 2020526,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라는 흑인 남성이 경찰에 의해 체포되던 중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질식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에 관련된 경찰관 4명은 해고되었고, 사망 과정을 촬영한 영상이 SNS를 통해 유포되어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다시 힘을 받으며 사건 발생지인 미니애폴리스를 중심으로 항의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20122월 흑인 10대 트레이본 마틴의 총격 사망 사건으로 조지 짐머먼이 무죄 판결을 받은 뒤, 2013년에 소셜미디어에 #Black Lives Matter를 사용하면서 이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공권력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강제 진압하는 특권을 주었기 때문에, 공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매우 거친 것이 사실입니다. 무기를 소지하는 것과 다민족 공동체 나라인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저마다의 특별한 법을 제정하고 집행할 것입니다. 이렇듯 법을 제정하는 것도, 그 법을 집행하는 것도, 목적은 하나입니다.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려는 목적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네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단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이며, 그러니 구한 것은 이미 얻은 것과 진배없다는 것. 둘째 단락에서는 죄짓는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신다는 것이나, 죽을죄를 지은 사람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며, 셋째 단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의 아들이 지켜주시며, 악마로부터 보호받고 살게 된다는 것, 넷째 단락은 우상을 멀리하라는 권고가 그것들입니다. 너무 짧은 설명이어서 자칫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만, 성경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살핀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씀들이라 하겠습니다.

    우선 첫 단락에서 오해가 가장 많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들을 다 이루어주신다던지, 구하기만 하면 이미 얻은 것과 다름없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 키 워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청하면이라는 대목입니다. 우리들의 기도를 반추해 보면 철부지 아이처럼 이것저것 모든 것을 생각 없이 구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다는 생각을 해 봐야 하겠습니다. 살전 5:16-18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매사에 감사하는 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기도하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엉터리 기도는 더 이상 하지 말고 제대로 된 기도를 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추천하는 제대로 된 기도는,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 주세요 입니다. 둘째 단락은 형제를 위한 기도인데, 죽을죄를 지은 사람은 예외로 하라는 말씀이 궁금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죽을죄란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하고 있는데(12:22-31, 3:28-29, 12:10),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고 거부하는 일을 의미하는데,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활동을 막아서는 때문입니다. 셋째 단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거듭난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씀이 궁금한데, 세상에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것이 죄의 한 가운데 있는 때문입니다. 이런 죄들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이라는 피난처에 머물고 있는 한은 주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있는 의인으로 살다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넷째는 우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라고 하시는데, 사실 하나님 보다 더 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우상인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나 하나님을 더 귀하고 중하게 여기는 의식 있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3. 오늘 어버이날, 따뜻한 한 마디 말이 필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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