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84(2024. 4. 30. 화요일).

시편 시 62:5-8

찬송 20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바뀔 수 있을까? 나는 말한다. ‘바뀔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바뀔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다 치자. 어린아이 적부터 나가 놀지 않고, 망령된 짓을 하지 않고, 성실하고 단아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너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니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라고 유혹하였다. 그럴 법한 말이라고 여긴 그가 드디어 입으로는 야비하고 상스러운 말을 내 뱉고, 몸으로는 경박한 행동을 자행하였다. 그와 같이 사흘을 보내고 난 뒤에 그는 기분이 나빠져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마음은 바꿀 수 없어. 사흘 전에는 내 마음이 무언가로 충만했는데, 사흘 뒤에는 내 마음이 텅 비어버렸어.’ 그러고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익과 욕망을 말하면 기가 꺾이지만, 산림(山林)을 말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문장을 말하면 마음이 즐거워지며, 도학을 말하면 뜻이 차분해진다. 완산(완산, 전주) 이 씨는 옛 것에 뜻을 두어 물정에 어둡다. 산림과 문장, 도학에 관한 말을 듣거나 좋아할 뿐, 그 나머지 것들은 들으려는 마음이 없다. 설사 듣는다 해도,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제 타고난 바탕을 오로지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이리라. 이러한 까닭으로 매미와 귤을 좋아한다. 그의 마음이 드러난 말은 고요하고도 담백하였다.” 1).

    조선 정조 시절의 학자이자 시인이며 산문가인 이덕무(1741-1793)의 소품문의 하나입니다. 이 글은 20, 30대의 자신을 말한 짧은 산문입니다. 젊은 학자 이덕무는 사람은 바뀔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사람은 바꿀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거기다가 요지경을 부리는 것이 사람마음으라고 토로합니다. 마음이 충만했다가 사흘 뒤에는 텅 비어버리는 그런 존재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매미와 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평합니다. 2).

                                               1). 안 대희, 고전산문 산책, pp.164-165. 2). 박 성완, 24. 4. 29.

 

2. “전 국민이 죄를 벗는 날(20-34)”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제사제도를 공부하면서, 죄는 쉽게 짓고 용서받은 것은 매우 힘든 과정을 보고 있습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과 어리석은 생각으로 죄의 수렁에 빠지는 경우는 너무도 비일비재해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죄에 대해서 너무 무딘 삶을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얘기를 읽고 있는 것 또한 얼마나 황당하고 미친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선배들이 겪었던 삶의 수고로움을 생각한다면, 캄캄한 밤중에 팔을 휘둘러 길을 찾기 보다는 성경말씀이 전해 주고자 하는 의미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 인간에게 걸고 계시는 뜻과 희망에 눈을 뜨는 기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악의 힘이 얼마나 가공할 세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씀과 그 상황에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속죄제를 마친 제사장은 살아 있는 염소를 제물로 바치는 예식이 있는데(20-22). 제사장은 두 손으로 염소의 머리에 안수한 후, 이스라엘 자손을 모든 불의와 범죄를 아뢴 후에 그 염소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불의를 짊어지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땅으로 내 보내는 것입니다. 모든 제물은 그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죄를 대신해서 속죄의 의미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먹고 마실 것도 없는 광야 한복판으로 내몰려 죽어 쓰러질 때가 온갖 배고픔과 고통을 맛보게 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제사제도를 우리에게 역설하는 것은 죄의 가공할 위력을 일깨워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동거하며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란 반드시 그 책임과 응분의 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의 성전 행사는 죄로부터 자유하기 위한 제사가 이루어지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이고 형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행하는 모든 의식과 절차는 큰 의미를 갖지 않은 형식적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이런 외형적인 의식의 중요성은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광야로 염소를 보낸 후, 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모든 옷을 벗어 버리고, 목욕을 한 다음 다시 옷을 입고 나와 자신과 백성의 번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제물의 기름기는 제단에서 불사르고 불사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자기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유대인의 제사는 죄의 가공할 위력에 맞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일이면서, 죄 가운데 살면서도 그 죄에 싸워가는 우리들 인생을 주목하게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83(2024. 4. 29. 월요일).

시편 시 62:1-4

찬송 18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놀부같이 사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흥부 같은 사람, 그리고 이도 저도 속내를 알 수 없는 무미무취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끔 저는 제 품에 안겨 저를 올려다보는 강아지의 눈빛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왜 이렇게 날 사랑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는 눈빛 말입니다. 저는 제 강아지에게 충실합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늘 생각해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고 언제든 밖에 나가 잔디밭에 볼 일을 보겠다면, 추운 한 밤중에도 일어나 문을 열고 닫아 줍니다. 손과 발이 닿지 않는 등과 오금쟁이를 시원하게 긁어주기도 합니다. 아무튼 말 못하는 강아지에게라도 사랑을 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혼자지내는 아산생활에서는 유일한 말벗이니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아무런 대가나 공치사를 기대치 않고 다른 사람들, 특히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고 참 별종이다 싶은 사람들입니다. 시간과 돈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능까지 다 털어서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 그래도 세상을 아직 괜찮구나! 싶기도 합니다. 그 얘기 한 토막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하는데, 결국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냐? 세상에 완벽하게 타인을 위한 행동은 없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얘기죠? 제가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면 안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안디와의 만남을 통해서, 캘커타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이제 저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 일을 하면서 나는 행복했어! 내가 행복한 걸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지? 일단 내가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행복의 분량만큼 내가 사는 세상의 행복이 불어납니다. 인연이 닿아 내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연결될 때면, 그때부터 행복의 합이 달라집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 더하기 하나는 셋이 되는 겁니다.’(조병준, [제 친구들과 얘기하실래요?], pp.81-82). 박성완, 24.4.28.

 

2. “전 국민이 죄를 씻는 날(1-19)”을 읽었습니다. 내용을 읽지 않고 표제어만 보고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전 국민이 함께 죄를 씻는 날이라니! 저는 여러분보다는 죄가 많아서 흥분을 넘어 까무러치게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는 죄인이라는 굴레에 씌워서 평생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복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는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죄에 대한 불감증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국민을 대상으로 청력테스트를 하기도 하고, 뻔한 거짓말을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마 잘 모르긴 해도 교회의 부패 타락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지 않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고 기고만장들입니다. 우리는 창 11:1-9의 바벨탑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 끝에 닿는 마천루가 바벨탑이었는데, 그게 무너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죄의 결과는 멸망인 때문입니다.

    전 국민이 죄를 씻는 데에는 지켜야 할 절차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죗값을 치르는 일입니다. 아론의 네 아들 중 엘르아살과 아비후가 야훼가 명하지 않은 향로의 불을 가져온 죄로 죽음을 당한 후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론에게 평일에는 지성소에 있는 속죄판 앞으로 나아가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성소에 들어가려면 황소 한 마리를 속죄 제물로, 수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치라 하십니다. 맨살에 모시 잠방이를 걸치고 모시로 만든 거룩한 옷을 입도록 명하십니다. 그 밖에도 목욕을 한 후 옷을 입어야 하고, 수 염소 두 마리 중 제비뽑아서 한 마리는 야훼를 위해서,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들 귀신)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라 명하십니다. 이렇듯 제사장 아론과 그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백성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온 이스라엘 회중을 위해서 속죄제를 절차대로 드릴 것을 명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모든 속죄제는 제사장 자신과 그 가족을 위한 것으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죄가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81(2024. 4. 27. 토요일).

시편 시 61:1-4.

찬송 5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96년도 여름 저의 교회 청년 한 분이 인도의 캘커타 <사랑의 선교회>에서 2주간의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얘기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음성 꽃동네에서 봉사하는 장로님이 계셔서 신경이 쓰였고, 용미리 시립묘지에 들어서는 야트막한 산자락에 무의탁 노인을 위한 <정원노인 요양원>에서, 목욕봉사를 요청해 와서 10여명의 선한 사마리아 회원들이 9년여 간을 봉사하는 중이어서, 인도엘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해서 조금은 사치스러운 여행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조병준의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를 읽으면서, <사랑의 선교회>에 세계 도처에서 모여와 봉사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세 번에 걸쳐 약 12개월간 자원봉사를 했던 조병준씨가 만났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제한된 사람들일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사랑의 선교회>를 창립하고 평생 이곳에서 빈민과 죽음에 이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안아 주는 일을 하신 마더 테레사는(1910.8-1997.5) “살아있는 성자라는 호칭을 들었음에도 그의 내면은 번민과 갈등으로 가득했음을 마이클 반 데어 피트 신부에게 털어놓은 자신의 심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은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가까웠던 피트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 등을 실은 [마더 테레사-내게 빛이 되어주소서]라는 책이 출간돼 신의 부재를 고민했던 테레사 수녀의 내면세계를 알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48년 하반기에 쓴 편지에서 외로움을 얘기하면서 제가 얼마나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488월 인도 콜카타 (당시 캘커타) 빈민가에 들어가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신의 존재까지도 의심한 테레사 수녀는 그녀의 신앙의 위기를 빈민가에 들어가 봉사함으로 이겨내려고 힘썼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향기 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 열심당 크리스천의 믿음이 얼마나 허세로 뭉쳐있는 것인지 가늠하게 합니다. 박성완. 4.26.

 

2. “야훼 성막을 세워 바치다(18-38)”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짓도록 오랜 시간 모세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였습니다(35-39). 성막은 회막 그리고 성소라고도 불리고 훗날 가나안에 정착하고는 솔로몬에 의해 건축되었을 때는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성막을 짓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곳으로 인간의 죄로 인해 드려지는 제사를 받으셨던 곳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9:23-26). 그래서 성막을 구성하는 여러 기물 중 등대와 등잔은 성막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곧 성막의 등잔에 불이 비치는 동안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로마 가톨릭교회나 정교회 그리고 루터교회와 성공회 등에서는 지켜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시다는 의미는 우리가 드릴 예배가 엄숙하고 장중해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막을 지었다고 밝힙니다(16).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대로 되었다.”고 하는 말이 7번 반복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제 마음대로 제 생각대로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대로 순종함으로 성막을 완성했다는 내용입니다.

    예배학을 공부하면서 저는 새로운 많은 것에 눈을 떴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 것이 첫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기도를 배우고 훈련을 받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친교를 배우게 되고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 신학을 배우고, 봉사를 배우게 됩니다. 예배는 이렇게 많은 과제들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성도들을 가르치는 목사는 예배의 형식적 의미와 함께 내용에 대해 확실한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부흥회나 전도 집회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교회로 연결지어주는 활동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방법이 요구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는 코미디처럼 가볍거나 열광주의자처럼 광란에 빠지거나 신비주의자처럼 뜬구름 잡는 일체를 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때야 하는지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가르치는 주제처럼 야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막인 우리의 교회를 섬겨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80(2024. 4. 26. 금요일).

시편 시 60:9-12

찬송 22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산에서의 7년간 목회를 마칠 즈음 리처드 범브란트의 저서 [하나님의 지하운동]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으로(1909-2001), 14년간 공산치하에서 옥살이를 하고 풀려난 루터교회 목사이다. 고맙게도 거창고등학교 출판부에서 범브란트 목사님의 책들을 여러 권 발행하였고, 번역자인 전 덕애 선생을 통해서 그 책들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이 [새장을 벗어난 새의 이야기/ 원제 Victorious Faith], 목사님이 살아온 삶을 녹여놓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이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서 함께 목사님의 얘기들 듣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물음은 있을 수 없다. 이 물음은 잘못된 물음이기 때문에 답도 있을 수 없다. 당신이 아무리 큰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선물에 상당한 일을 할 수는 없다. 당신의 눈()을 위해 얼마나 드릴 수 있겠는가? 크리스천은 단순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셀 수 없는 많은 선물을 받았으므로, 이제까지 나에게 이렇게 잘해 주신 분께서 계속해서 잘해 주시리라 믿는다. 그분이 승리도 주실 것이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을 단순하게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승리할 것이다. 크리스천은 달성코자 하는 스스로의 목표가 없다. 그는 수동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을 쓰시도록 맡겨버리기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지 않고 성화/聖化된다. 야심에 의해 충동질을 받을 때에만 긴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당신의 성화가 당신의 야심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야심이다. 당신은 긴장을 풀고 마음 편히 있음으로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새장을 벗어난 새의 이야기], pp.114-115.)

   동묘 빈티지 샵 골목에서 6권의 책을 구입한 얘기를 일전에 드렸는데,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책을 구입할 때마다 부자가 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뒷주머니에 꽂아둔 지갑을 잃어버릴 정도로 말이다박성완/24.4.25.

 

2. “모세가 빛나는 얼굴로 산에서 내려오다(29-35)”을 읽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변화산에서의 변모사건을(9:2-8) 기억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변모산에서 회동을 하셨는데, 그 분들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17:2), 여기에서 암시하는 빛나는 얼굴이란 구원받은 천국 시민들의 모습이라는 의미입니다. 모세 자신도 야훼 하나님을 대면했을 때, 자신의 얼굴 살결이 하얗게 빛나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빛나는 얼굴을 보고 백성들은 두려워 가까이 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들 회중의 지도자들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와 허물 때문에 빛 앞으로 나가갈 수가 없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고 다시 받아온 두 개의 증거 판에 관해서 전하고 나서야 백성들이 가까이 나아왔다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모세가 백성에게 전할 말을 다한 후에, 다시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는 대목입니다. 빛나는 얼굴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도 있고, 실제로 자랑했어야 당연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는 겻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선 출애굽기 기자는 모세가 다시 야훼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하여 들어 갈 때까지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 했다고 해설을 붙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신앙의 본질 보다는 수단이나 방법에 지나친 관심을 갖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한때 천국을 다녀왔다는 여러분들이 있었는데, 그분들의 책은 천국의 현상을 말할 뿐 천국의 본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이나, 신성종의 [내가 본 천국과 지옥] 등이 그렇습니다. 신 성종 목사를 지옥으로 안내한 사람은 북한 김일성시대의 목사 강 양욱이었다고 하는데, 지옥은 지하 3층으로 그곳에는 배신자들을 비롯해서 악행을 한 자들로 12개의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국을 안내하는 3천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가브리엘 라파엘 미가엘 천사 장들이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서 12개의 계단이 있는데, 1계단에는 순교자들이, 2계단에는 전도를 많이 한 사람들 무디와 스펄전 빌브라아트 등. 3계단에는 신성종이 있고, 4계단에는 테레사 수녀가 있는데, 생전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갈등을 많이 한 때문. 5반열에는 신성종 부인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비하면 성경 66권을 번역한 대구 제일교회의 이상근 목사님의 간증(아들 이성희목사)을 읽었는데, 꿈을 꾸신 아버지가 천국엘 들렸는데, 평생 존경하고 사모했던 칼뱅은 만나지 못했고, 루터만 보았다고 했습니다. 훨씬 더 진실성이 보이지 않습니까? 천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새로운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79(2024. 4. 25. 목요일).

시편 시 60:5-8.

찬송 49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든을 목전에 두고서야 조금씩 철이 드나 보다. 요즘은 소설보다는 산문과 시에 더 눈길이 간다. 소설보다는 너무도 사람 냄새가 나는 때문이다.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거나, 공지영의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읽은 후에는, 앞으로는 산문을 읽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을 다시 꺼내 읽었다.

    “<중략> 7시 반쯤 목욕탕에 갔더니, 모녀 세 사람의 여자 거지가 와 있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살갗이 검고 어깨까지 늘어뜨린 머리칼은 엉클어지고 까실까실 했습니다. <중략> 그 때 한 아주머니가 탕에서 나와 야아, 이것 봐, 구질구질하게 시리, 밖에 나가 입어!’ 하고 밀어내듯 닦달을 했습니다. 그러자 중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언니가 아니에요. 이는 없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이가 옮을까봐 나가라고 하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중략> 나는 내가 가난한 때문인지, 이런 사람을 보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옵니다. <중략>. (1955. 4.23).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누나인가 하고 뛰어나가 보았다. 낯선 남매거지가 깡통을 들고 받을 얻으러 왔어요. ‘밥 좀 주이소.’ 하는 소리가 내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중략>. 두 남매는 눈이 둥그런 채 나를 한번 보고, 밥그릇을 한번보고 했습니다. 이게 웬일인가 싶었던 모양이지요. ‘퍼뜩 먹어라. 배 안고프나.’ 하니 두 남매는 숟가락을 들었습니다. 정말 맛있게 밥을 먹었어요. 나와 순나는 우두커니 서서 밥 먹는 남매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불쌍한, 이것들이 옛날의 우리였습니다. 정말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아버지만 술을 잡숫지 않고 부지런히 상/일을 하신다면, 이놈들 둘쯤은 같이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남매를 보내며 나는 다음에 또 오라고 당부했습니다. 대문간에 한참 동안 서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가는 두 남매를 지켜보았습니다. (1965. 10),

    이 두 개의 일기 중 앞의 것은 일본에서 사는 동포 소녀 스에꼬의 것이고, 뒤의 것은 윤복이의 일기다. 두 어린이는 한 10년 사이를 두고 태어나 똑같이 열 살 때부터 일기를 썼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pp.110-112.

 

2. “모세가 새 증거판을 받으러 시내산에 오르다(1-4)”야훼께서 이스라엘과 다시 계약을 맺으시다(5-1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언약의 말씀을 새긴 증거판을 받으러 시내산을 오른 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동요하였고, 마침내 모세가 의지하던 하나님을 대신해서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도 없는 허술한 믿음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두 개의 증거판을 들고 내려온 모세는 해괴하게 벌어진 아론과 백성들의 행동과 믿음에 화가 나서 두 증거판을 금송아지에게 내리쳐 금송아지와 함께 증거판도 깨트려지고 말았습니다(31:18-32:24). 그래서 다시 새 증거판을 받기 위하여 두 개의 석판을 준비해서 시내산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증거판도 그리고 깨트려진 증거판을 대신할 두 번째 증거판도 하나님께서 기획하신 일이고 실행토록 추진하신 것입니다. 오랜 훗날 예레미야 선지자는 돌 판에 새긴 언약이 아니라, 마음에 새긴 새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소개하였습니다(31:31-34).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모른다 핑계치 못하도록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약속이란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 서로 합의가 될 때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약속이나 계약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질문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은 쌍방적인가 아니면 일방적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형식적으로는 하나님 주도형 언약임에 분명합니다. 구체적으로 십계명을 말씀하고 있는데, 십계명을 구성하는 열 가지 내용에 대해서 모세의 의견이 얼마나 보태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문구의 형식으로 보아, 하나님 편에서 준비하신 것임은 분명합니다. 모든 계약관계는 쌍방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둘 중 누군가에 의해서 주도되기는 마련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과정에서는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모세는 언약을 기록할 돌 판을 준비한 것입니다.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입니다. 돌 판에 기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내용을 알리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모세는 자신이 준비한 돌 판에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계약서를 받아들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신과 민족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78(2024. 4. 24. 수요일).

시편 시 60:1-4.

찬송 48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전에 동묘 빈티지 가게를 찾아 여름 셔츠 한두 벌을 사러갔는데, <청계서점>에 들려 한나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두어 시간을 책방에서 보냈는데, 귀한 책 6권을 건졌습니다.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 중의 두툼한 책 한권이 오늘부터 소개드릴 우리 조선의 문장들의 산문입니다. 청주 사람 노긍/盧兢은 자는 여림/如臨 호는 금석/今石을 썼는데, 과거 시험장에서 과문/科文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평안북도 위원군에 귀양 가서 6년을 고생하였습니다. 노긍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과문의 명수이었는데, 그 죄목은 억울하게 덮어쓴 것이었다 합니다. 특히 제문과 묘지명을 많이 남겼습니다.

    다음은 죽은 그의 노비 막돌이의 제문/祭文입니다.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주인은 글을 지어 죽은 노비 막돌이의 무덤에 고하노라. 안타깝구나! 너는 성이 채 씨(蔡氏), 내 아비는 관동 땅의 양민이었고, 네 어미는 내 외가의 여종이었다. 네 아비가 내 말을 끈 지 스무 해 만에 길거리에서 죽어 내가 남원의 만복사에 장사를 치렀다. 네 어미는 내 몸을 받들어 기른 지 서른 해 만에 내 집에서 죽어 내가 공수곡 서산 밑에 장사를 치렀다. 네 형은 나를 위해 근면하게 수십 년 동안 봉사하다가 또 집에서 죽었고 나는 또 그의 장사를 치렀다. 이제 네가 또 아들도 없이 죽었으니, 너희 채 씨는 드디어 종자가 없어졌구나! 네가 태어난 지 세 돌 만에 네 아비가 죽었고, 여섯 돌 만에 네 어미가 죽었다. 네 안주인이 너를 거두어 길렀는데 굶주리고 잘 입지 못한데다가 병치레를 자주하여 오래 살지 못할까 염려했다. 네 안주인이 돌아갔을 때 너는 아직 5척 동자였는데, 고괴/古怪한 꼴에다 더벅머리를 하고 깡마른 잔나비처럼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중략> 네가 이제 지하로 들어가면 네 아비 네 어미와 네 형, 그리고 네 안주인과 작은 주인이 네가 온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앞 다투어 내 사는 형편을 물을 것이 틀림없다. 근년 이래로 사지가 불편하고 이가 빠지고 머리가 듬성듬성하여 영락없는 늙은이 꼴이라고 너는 고하겠지. 그러면 서로들 얼굴을 보고 탄식하고 낯빛을 바꾸며 나를 불쌍히 여기리라. 아 아!” 안 대회, [고전 산문산책], pp.146-147.

***과문/科文 : 과거시험은 특정한 형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과거를 보려는 유생들은 과문법 양식을 배워야 했답니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발을 명하시다(1-11)”모세의 기도(12-2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출애급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진군을 명하십니다. 이런 중대한 일을 앞에 둔 모세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함께 가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깨서 함께 가시지 않으면 여기를 떠나 올라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받아주셨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12-17). 둘째는 하나님의 존엄하신 모습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얼굴을 보여줄 수 없다 말씀하십니다. 까닭은 당신의 얼굴을 보고 나서 살아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뒷모습만큼은 볼 수 있으리라 대답하십니다.

    모세의 기도는 오늘 우리들에게 귀한 깨우침을 주신다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무작정 다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과 동행하게 해달라는 합당한 기도는 들어주셨지만, 합당하지 않은 기도는 거부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합당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존엄하신 모습을 구했지만, 하나님의 뒷모습은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에 관해서 완전한 이해를 유보해 두신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고전 13:12의 말씀처럼 지금은 희미하나, <중략>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온전히 알게 되는 그날을 위해서 남겨두신다는 의미입니다. 까닭은 거룩한 몸으로 부활하기까지는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따라 기도할 수 있기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77(2024. 4. 23. 화요일).

시편 시 59:14-17.

찬송 37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개신교회에는 널리 알려진 바가 없는 로마 가톨릭의 위인 가운데는, 서기 480년경에 로마 명문 아나치우스 가문에서 출생한 A. M. Sev. Boethius(보에시우스)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이후 대대로 가톨릭 신자였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보에시우스의 [철학의 위안]은 사형선고를 받고 유배지에서 처형 날을 기다리며 저술한 자신의 시와 산문을 채집한 책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 신앙이 느슨하다 못해 신앙생활과 세속적 삶을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정신을 차리게 해 주는 그의 생생한 마음을 나누고 싶어진 것입니다.

    [철학의 위안]은 제가 부산 제일 루터교회에서 목회할 때(1980.11.26.) 구입한 책으로, 가장 낡은 종이로 부스러질 것은 위험한 책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구름으로 별빛이 가리우고, 맑은 물이 흙탕으로 흐려지며, 시내가 바위에 부딪히면 인간의 숭고한 인식이나 정신도 혼란스러워지게 마련이니, 이런 것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쓰고 있습니다. 먹장구름으로 가리운 별은, 제 빛을 낼 길이 없다. 거센 남풍이 바다 위를 휘몰아칠 제, 파도는 사나워지고. 개인 날씨에 수정마냥 맑던 물도, 흙탕이 지면 보기 흉하구나. 높은 산허리를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도, 때마다 바위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진다. 너도 저 모양 맑은 눈으로, 진리를 알아내고자 한다면. 즐거이 좁은 길을 택하고 두려움도 희망도 지니지 말며, 고통도 또한 쫓아버리라. 저것들이 지배하는 곳에는, 정신이 흐려지고 번뇌의 쇠사슬로 얽매인다.”

    [철학의 위안]을 번역한 정의채 교수는, 서울 가톨릭 대학과 로마 올바노 대학,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박사, 그 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과 독일 뮌헨대학 연구교수를 거쳐 가톨릭 대학 교수, 서강대학교 교수로 지냈던 분으로, 가톨릭 신학을 집대성한 중세의 대표적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저 <신학대전>을 번역하셨습니다. 9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는데, 특이한 사항은 자신의 생일날에(1925.12.27.) 별세한(2023.12.27.) 분이시라 하겠습니다.

보에시우스(정의채역), [철학의 위안], 성바오르 출판사, pp.55-56.

 

2. “모세와 레위인들이 우상숭배를 숙청하다(21-29)”모세가 하나님께 다시 빌다(30-34)”을 읽었습니다. 오늘 북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40년 광야생활은 두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과, 다른 또 하나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이 필요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광야생활은 고통과 시련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곤 합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적절한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고위 공직자들 가운데 여러 가지 이유를 핑계 삼아 국방의 의무를 회피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분들 중에는 국군 통수권을 가진 자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훈련이란 여러 가지 종류가 많습니다. 건강한 남자들은 19-35세에 입대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징집제로 무조건 신체검사를 받고 이상이 없으면 입대 영장을 받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논산훈련소를 비롯 지방 군부대에서 6주간의 훈련을 받게 되는데, 얼마나 엄격한지 모릅니다. 새벽 6시에 기상해서 저녁 10시 취침 시까지 11초도 훈련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탈영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곤 합니다. 훈련을 잘 마친 군인은 앞으로 남은 기간(14.5개월)을 부대 배치를 받아, 자신의 주특기(Mos.)에 따라서 근무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힘든 기간이 처음 6주 훈련소 기간입니다. 군인으로써 기초 훈련을 다 받게 되는데, 개인화기를 취급하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게 훈련시킵니다. 저는 논산 훈련소 25연대 출신인데, 그 후에 기갑학교(탱크)에서 14주간을 훈련받았는데, 그 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차 교육대대에서 작전과 작전 병으로 도합 311개월을 복무했습니다. 김신조씨가 청와대를 겨냥하고 남파되는 시기여서 갑작스럽게 28개월에서 36개월로 바뀐 것입니다.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제 얘기도 길게 곁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선택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헌신된 인간이거나 완성된 인간들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강도 높은 훈련이 필요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령 저의 과거의 경험으로 보면 입학사정관으로 학생들을 선발할 때의 제 나름의 기준은, 그 학생이 그동안 닦아온 인성이나 품성 그리고 학문적 능력이라면 조금 더 발전시킬 수 있다면 우리 학교에서 시행하는 공부를 감당할 수 있겠다는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보고 선발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 생활 40년이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들이 맡은 임무를 충분히 수행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고 택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아무리 선택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훈련을 잘 받지 못하거나 자포자기 하는 그런 무능한 사람이라면 벌을 받기도 하고 탈락시키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시련과 역경 앞에서 하나님 보다는 눈앞에 있는 가까운 우상을 택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76(2024. 4. 22. 월요일).

시편 시 59:12-13.

찬송 1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 주위에 요즘 글씨 학원에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학창시절에 손 글씨를 아주 예쁘게 잘 써서 칠판글씨 같은 것을 도맡아 쓰다시피 했지요. 그런데 잡지사에 다니면서 취재 때마다 급히 받아 적다 보니 글씨가 엉망이 됐답니다. 그런데 컴퓨터자판 시대에 무슨 대수랴 했는데, 갑자기 학창시절처럼 예쁜 글씨의 다이어리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절실했다고요. 또 영화포스터 같은 곳에 제목 글씨를 쓰는 켈리그래피 일에도 관심이 갔답니다. 그래서 결국 글씨학원에까지 등록을 했지요. 얼마 전에는 마침내 옛날의 손 글씨를 되찾았다며 증거의 엽서까지 보내 주었어요. 이런 글씨를 가진 사람은 평소 마음도 일상도 이렇게 산뜻하고 깔끔하지 않을까 싶었던 바로 그런 글씨체로요. 실제로 심리분석가들은 글씨도 한 사람의 성격이나 심리상태에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하지요. 간단한 예로, 글씨체가 동글동글한 사람은 성격도 원만하지만, 다소 권위의식이 있고, 네모반듯한 글씨를 쓰는 사람은 조용하면서 무뚝뚝한 성격인데, 글씨가 작으면 소심하고 다소 신경질적일 수도 있지요. 또 영어필기체를 쓰듯이 날려쓰는 사람은 글씨 그대로, 간섭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성격의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그런 연관성 때문에 범죄수사 같은 데선, 필적감정으로 용의자의 심리상태나 당시 상황을 추측해 내기도 하는데요. 이젠 컴퓨터의 키보드 시대라 손 글씨 쓸 일이 훨씬 줄어들긴 했지요. 그래도 친구 엽서를 보니까 덩달아 기분도 깔끔해지고 산뜻해 지는 게, 수능 논술 고사같이 손 글씨가 들어가는 시험에선, 시험관의 채점 심리에도 아주 작게나마 영향을 좀 미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0426일 방송>

 

2. “새 생활의 인간관계(3:18-4:6)”을 읽었습니다. 크리스천의 인간관계라고 표제어를 바꾸어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은 크리스천 이전의 인간관계란 정 반대로 이해하면 되겠다는 내용입니다. 제가 처음 부산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 목표를 어린이와 노인에게 전도 대상을 삼고, 어린이는 어린이 집을 세워서 그 가정과 연결을 시도하는 것이었는데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을 설득하는 작업이 생각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황혼기를 보내는 노인들이 담배 연기 자욱한 노인 회관에 틀어박혀서 하릴없이 따분하게 지내는 환경에서 좀 더 의미 있는 활동을 하자고 노인회 임원들을 설득하였는데 회장님은 일본 유학을 하신 분으로 제 의견에 거의 동감하시고, 저를 기특하다고 칭찬까지 하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실패한 전도였습니다. 그러나 사탕이나 우유를 사들고 들어갔던 것은 결코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6년도였으니까 유신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시절이었는데, 노인 회장은 제게 신문 읽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거꾸로 읽으면 딱 맞는 말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적용시키면 재미있겠다 싶습니다. 첫째는 1세기의 유대 사회는 여자가 드세서인지는 몰라도 남편을 우습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크리스천의 중요한 덕목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둘째는 자녀들이 자신들의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망나니들이었습니다. 세 번째로 남의 수하에서 종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자기 주인에게 불복하는 일들이 잦았습니다. 넷째로 주인들은 자기 종들을 부당하고 불공평하게 대우하였습니다. 다섯째로 기도에 게으르고 불평하는 크리스천들이 아주 많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권/女權이 신장해서 자기 부인에게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서구사회는 우리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의 가르침이나 꾸중을 듣기 싫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꼴통이라고 되레 항의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민주사회는 주인과 종이 직능이라는 점에서까지 똑같은 의견을 갖는 줄 알고 자기 직원의 눈치를 보는 중이라고 얘기들 합니다. 기업가들에게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자기 사원들을 함부로 불편부당하게 관리하는 불합리성이 노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시대 조류/潮流라는 핑계를 대면서 기도에 게으르게 살면서도 부끄러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 낭패입니다. 이런 얘기는 미국 현역 목회자가 핏대를 올려가며 제게 성토한 얘기들과 같았습니다. 한편에서는 목회자들이 배가 부르고 여흥거리가 늘어나면서 목회에 대한 진정성도, 설교에서의 감동도, 실천하지도 않는 자기변명이나 빈말만 늘어놓는 삯군의 목자로 변신한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목회자가 소생해야 교회도 소생할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이 자신의 목회자를 위해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30%에 가까운 국회의원에, 50%에 육박하는 의사에, 전체 국민의 30%가 크리스천인 우리나라가 어떻게 절망을 성급히 논한단 말입니까?

 

3. 내일부터는 KBS FM1 의 이야기가 책 소개로 바뀌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