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93(2024. 5. 9. 목요일).

시편 시 65:1-3.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별주부전>을 보러가는 사람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러가는 사람은 눈물 보자기를 준비해야 하는가 여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웃음을 기대하는 사람과 눈물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에는 애통하는 자의 복이 있다. 애통한다는 말은 애간장을 끓이며 슬퍼하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애간장을 끓이며 슬피 우는 사람들을 만나는데 남의 일이긴 하지만, 그 서러움은 왠지 모르게 우릴 슬프게 한다.

    마태복음서에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5:4), 누가복음서에서는 우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6:21). 가난한 것이 반드시 복이 아닌 것처럼, 모든 슬픔에도 위로와 복이 오는 것도 아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슬픔이란, 냉소와 절망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슬퍼하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당하는 슬픔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위로를 발견하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슬픔 속에 빠져있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슬픈 사람은 없을지 모른다. 세상을 다 잃은 듯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등을 토닥여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큰 힘과 위로를 받을 것이 틀림없다.

 

2. “다니엘의 꿈 : 네 짐승(9-14)”을 읽었습니다. 유독 꿈을 자주 꾸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바닷가 고성에서 이사해 오신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은 새벽기도회가 끝나면 그 전날 밤에 꾸셨던 꿈 얘기를 하면서 해몽을 요구하셨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도 나고 그 분의 삶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관심을 가졌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다 보니 제 밑천이 다 들어나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저처럼 꿈을 거의 꾸지 않는 사람에게는 매일 꿈에 시달리는 분들을 보면서 한편 감사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생활의 고통도 모자라 꿈속에서 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는 분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 주인공 다니엘 역시도 제대로 잠 못 이루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던 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가 꾼 꿈은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꿈이었습니다. 네 짐승이 등장하는데 사자 몸뚱이에 독수리 날개를 한 생물이고, 두 번째는 곰 몸뚱이에 갈지 세 개를 물고 있으며, 세 번째는 호랑이 몸뚱이에 머리가 넷 옆구리에는 새의 깃털 달려있습니다. 네 번째는 형용하기 힘든 무서운 짐승인데, 쇠로 된 이빨을 가졌고, 뿔이 열 개나 돋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목해서 바라보니 열 개의 뿔들 사이에서 작은 뿔 하나가 솟아나 먼저 나온 뿔을 뽑아내고 있었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뿔이 계속 건방진 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 짐승은 처형을 받아 불속에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밤에 또 꿈을 꾸었는데, 사람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는데, 모든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모든 백성들에 의해 섬김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반부에 나오는 기괴한 네 짐승의 꿈은 심판을 연상하게 하는 내용인데 반해서, 후반부에 나오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 사람에 관한 꿈은 재림주로 오실 하나님의 아들을 연상하게 하는 내용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 끝날과 심판이라는 성경의 대 주제에 대해서 종종 둔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일에 취해서 아니면 세상 즐거움에 빠져서 다들 잊고 사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심판과 천국에 관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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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2(2024. 5. 8. 수요일).

시편 시 64:8-10.

찬송 16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자원봉사자 교육에 열정을 쏟아 붓던 1980년대 초만 해도,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돈 한 푼 소득 없는 봉사라는 말을 낯설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성경에는 우리가 본 받아야할 많은 봉사자들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마을 주변만이 아니라, 수해가 난 지역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심지어 어려움을 겪는 외국에 까지 원정 봉사를 가는 이들까지 생겨났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힘든 봉사활동을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도 다양한 이유와 사연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인도 캘커타 <사랑의 선교회>를 찾은 이들을 소개하는 이야기입니다.

    ‘안젤로는 캘커타 자원봉사자들 중에서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비사교적인 이탈리아노였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흔히 떠벌리기 좋아하고 아무 데서나 큰 소리로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죠. 안젤로는 항상 조용했고, 항상 제일 끝까지 일하는 봉사자였습니다. <중략> 저는 안젤로의 모습에서 저를 떠난 한 친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을 비극으로만 보았던 한 친구의 모습이었습니다. <중략> 안젤로에게 인생은 장밋빛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 안젤로로 하여금 장밋빛 인생을 믿지 않게 만들었는지 저는 모릅니다.’

    자신의 삶이 어둡기 때문에, 자신의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또는 더 나은 내일이 올 것이라 믿으면서, 우리들은 선한 삶에 눈을 뜹니다. 그런데 자신의 변화는 물론 내일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슬픈 인생들도 있습니다. 조병준, <내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 pp.43, 45. 박성완, 24. 5. 7.

 

2. “야훼를 바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화 2(27-42)”을 읽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가령 부모에게 순종하고 학교 선생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고 실천하며, 사회적으로 모나게 살지 않으며, 묵묵하게 자기 역할을 실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무미건조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렇듯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 정상적인 삶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삶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나 스승에게 불순종하고, 못된 일만 일삼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나쁜 소행의 사람들 말입니다. 특히 말없이 자기 가정을 잘 보살피며 성실하게 일하면서도 자기 신앙생활을 꾸준히 하는 사람들, 그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말을 듣는 이들은 삼시세끼 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할뿐더러 자녀들도 공부를 시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문전옥답에 수목이 울창한 앞산을 소유하고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린 마음에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서 몸의 일부가 부서지거나 자녀들이 잘못되거나 생활고를 겪어야 정상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주목해서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한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노해서 다른 이 보다 일곱 배나 더한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과 딸들의 살을 먹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읍들을 폐허로 만들고, 성소를 쑥밭으로 만들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원수들로 하여금 그들과 살게 하시겠다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조상들의 죗값까지 받게 하고, 원수들의 땅으로 끌려가게 되리라고 말입니다. 참 무섭고 떨리는 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이 성경 구절을 읽을 당시에는 웬지 모르게 빈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수천 평의 땅을 물려받고, 죽을 때까지 먹고 입고 살아가는데 어려움 없는 평탄한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생전에 벌써 자녀들이 명절이나 가정일로 모이게 되면 대판 싸움이 일어나는 게 다반사였고, 형제 자매간에 의절을 하고 부모님께도 여간 못된 일을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밥 먹여 주느냐?”고 어머니 속을 후벼 팠던 저의 백부님은 마침내 항복하셨습니다. “너희가 믿는 예수가 이겼다. 나도 예수를 믿을란다.”하고 말입니다. 저의 백부님은 여든이 다 되어서 명예 집사님이 되시고 평안히 별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뜻대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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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1(2024. 5. 7. 화요일).

시편 시 64:5-7.

찬송 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처럼 남대문 시장엘 갔습니다. 제가 안경을 맞추는 곳이 거기에 있는데, 누워 지내는 일이 많다보니, 안경을 벗어둔 걸 깜빡하고 안경다리를 늘어트린 것입니다. 다행히 안경다리에는 금이 가거나 상처가 나지 않아서 쉽게 고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곳만 이용하니까 혹시 조금 싸게 맞출 수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남대문 시장 입구에 있는 안경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다리가 늘어졌는데 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 말하니까, 여자 주인이 이거 부러질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혹시나 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전혀 기대 밖의 얘기였습니다. 부러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얼른 되돌려달라고 한 후, 다리를 고친 후 안경을 맞출 생각을 했는데, 아닙니다. 하면서 한참을 더 가서 원래 맞춘 집으로 갔습니다. 젊은 주인은 알아보고 앉아 계세요. 곧 고쳐드리겠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똑 같은 안경테로 요즘 얼마면 맞출 수 있어요?’ 물으니까, ‘아직은 쓸 만하니까 한 1년 후에 오세요. 옛날 값으로 해 드립니다.’ 좋은 집을 골랐구나, 안심했습니다.

 

2. “야훼를 바로 섬기는 사람에게 내리는 복(1-13)”야훼를 바로 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화(14-20)”을 읽었습니다. 오늘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그래야 마음이 편하고 즐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많이 생각해 왔고 얘기해 왔던 것들이 정리가 되는 듯 하였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첫째 제 때에 비를 내려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땅을 소출을 내고, 나무들은 열매를 맺고, 그것들을 먹고 안심하고 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둘째는 평화를 주실 것인데 다리를 뻗고 잠잘 수 있도록 말입니다. 원수들을 너희 땅에서 몰아내시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셋째는 야훼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 하십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우상이 아니라, 참된 신이신 야훼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주인으로 계신다는 것은 복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것, 이를 바른 신앙생활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느 종교인들처럼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 때에 비를 내려주셔서 땅과 나무 그리고 뭍과 물에서 필요한 수확을 거두는 일이라고 하니, 거기다가 다리를 뻗고 편히 잠들 수 있는 평화를 누리고, 하나님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꿈에도 그리던 천국의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 이유는 소박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후에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누리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새벽 동이 트는 시간에 못자리판에 물을 가득 가득 채운 논들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50, 60년 전만 해도 겨울에 눈이 적게 내리거나, 초봄에 비라도 부족하면 항상 못자리판까지 쩍쩍 벌어져서 근심에 쌓이곤 했는데 말입니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명시 <피파의 노래>때는 봄, 아침 7,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되어 빛나고, 종달샌 높이 나는데, 달팽인 가시나무 위에 도사렸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온 누리가 평화롭도다.” 모나지도 톡톡 튀지도 않은 부드러운 시어는 평범한 우리 이웃들을 소환해서 평화로운 세상을 느끼게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 날 대체 휴일에 종일 조용하게 내리는 봄비에 마음이 포근해 지는 저녁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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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90(2024. 5. 6. 월요일).

시편 시 64:1-4.

찬송 1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유독 복이라는 말을 많이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민족은 중국인과 한국인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중국 선교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선물 둘은 복/자를 천에 수를 놓은 글귀였습니다. 복이란 밖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별의 별 모양의 복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되다거나(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6:20)에 관심을 쏟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내적이고 인격적인 상황을, 가난하다는 말은 삶의 외적 형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심령이 가난하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 곧 하나님의 도움이나 은총이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교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18:9-14). 바리새인과 세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신의 장점들을 자랑스럽게 남김없이 열거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자신의 단점을 부끄럽게 여기며 기도드립니다. 대부분의 자랑쟁이에게서 발견하는 내용은 자기 자랑이 넘쳐 남을 무시하고 경멸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금물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숨을 죽이고 작은 소리로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고해하듯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시고 복을 주실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박성완, 24.5.5.

    ‘천국은 영광스러운 복지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 사람들은 그분의 자녀답게 처신하는 그런 영역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며, 그 나라의 참된 시민이다. 그보다 더 큰 축복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축복이 지금 그들의 것이다. 다음 세상에서 만이 아니고, 여기에서 지금 사람의 마음이 바쳐진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 로버트 슐러, [현대인을 위한 팔복과 십계명], p.45.

 

2. “희년에 관한 법(35-55)”을 읽었습니다. 희년이란 히브리어로 요벨(Yobel)로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인데, 이 해가 되면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가 가나안 땅에서 나누어 준 자기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고 땅은 쉬게 한다. 희년은 710일 속죄일에 선포되었습니다(레위기, 25:8-10). 오늘 본문에 나타난 희년의 정신은 가난하게 살게 된 자기 민족을 구제하고 자립을 도울 수 있는 사회제도로, 돈이나 양식을 빌릴 경우에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고, 양식도 장리로 꾸어주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근본정신은 그들이 남의 나라 이집트에서 종살이 했던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된 동족을 종이나 노예처럼 부리지 못하고 식객처럼 살게 하고 일을 시키다가 희년이 되면 그의 자식들과 함께 자기 지파를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제도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 공동체는 해외에서 이민을 오거나 다른 지방에서 실패하고 찾아온 유대인이 있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유대인 공동체가 그들의 재기/再起를 돕기 위해서 발 벗고 나선다고 하니, 우리 크리스천 공동체도 연구해 볼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차제/次第에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희년을 정신을 잘 연구해서 우리들의 실생활에 적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성경이 지적하는 희년의 구체적인 정신은 집과 노예와 부채면제로 분류해서 살필 수 있습니다. 예나 제나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신의 집에서 살고 있느냐 여부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은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을 한번 팔면 되물릴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위 부동산 투기물이 된다는 점에서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반인의 집은 1년 안이면 무를 수 있고, 레위인의 집은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도록 하였습니다(25:9-34). 그리고 희년이 되면 유대인이 부리던 노예들에게 다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29:39-41). 마지막으로 삶을 무겁게 하던 부채도 안식년에는 면제해 주도록 하였습니다(15:1-3). 이런 희년의 정신의 밑바탕에는 그들도 무려 430년이라는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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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8(2024. 5. 4. 토요일).

시편 시 63:4-7.

찬송 29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떠올리는 방법인지 모른다. 이것을 가르쳐주신 분은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도움을 청했던 부산 개금동의 한 노인정의 회장님이셨다. 첫 번째로 신문을 거꾸로 읽으라 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을 비롯하여 정치가들의 얘기도 거꾸로 읽어보라 하셨다. 그러다 55년도 훌쩍 지난 어느 날 또 한 번 그런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김 누리 교수다. 왠지 엇박자 놓기를 즐기는 듯한 화법인 그 분의 책은 계속 도발적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책을 놓지 않았던 건 다행이었다. 그 책의 여는 주제는 <병든 사회에서 거울보기>라는 주제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11월 독일에 유학중이던 김 교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자신을 말하며, 그 때 독일이라는 낯선 거울을 마주하게 되었다 합니다. 냉정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인데, 그때 우리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다. 살인적인 경쟁, 승자 독식의 정글 속에서, “그동안 정상이라고 생각해 온 많은 것들이 혹시 비정상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갖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이라는 낯선 거울로 본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현상을 꼽고 있고, 다음 하나는 통일에 관한 이해가 우리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박 성완, 24. 5. 3.

 

2. “축절들 2(23-44)”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명절들 가운데는 흥미로운 명절도 소개되는데, ‘새해맞이(23-25)’죄 벗는 날(26-32)’ 그리고 초막절(33-44)’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은 세 번째 단락인 초막절입니다.

히브리어로 숙곳(sukkot)이라고 불리는 초막절은 유대인들의 절기 중 가장 기쁜 절기로 속죄일(Day of Atonement) 이후 5일이 지나서 시작된다. 초막절은 일주일 동안 진행되며, 전 세계의 유대인들은 초막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의 역사와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섭리를 기념한다. 레위기 2334~4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추수의 마지막에 절기를 정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 첫째 날과 마지막 날에 일상적인 업무를 쉬는데, 그 일주일간을 초막에서 지내며 음식으로 제사를 드린다. 절기를 정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이스라엘 자손대대로 알게 하려하심이다. 고대에 행해졌던 3가지 의식은 물 긷고 따르기, 등 밝히기, 장막 짓기 등이다. 처음 2가지는 성전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성전이 무너진 후 이러한 전통들은 더 이상 관찰되지 않는다. 많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초막을 짓고, 최소한 그 안에서 식사를 하면서 숙곳을 기념하고 있다. 나뭇가지나 과일, 예술품 등으로 이곳을 꾸미는 것도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전통 중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초막절의 이면에 놓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숙곳은 기쁨의 절기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떠돌 때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 있는 그분의 궁극적인 섭리를 받아들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뉴스에 따르면, 2017106일부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막절에는 약 6,000명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동참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일보>, 20171012일자 기사 발췌.

    저는 3.1 절이나, 광복절 그리고 한글날과 개천절 등을 지낼 때마다, 많은 아쉬움을 갖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그냥 창밖에 태극기를 내다 거는 날 정도로 생각하게 될 우리 후세들을 위해서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 3.1절에는 아이들과 함께 태극기도 만들어 보고, 백범 선생 등 독립 운동을 한 선열들의 얘기를 들려줘야 하며, 광복절에는 가슴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얼싸안고 뛰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날에는 한글 시낭송회를 개최해 보거나 한글을 배우러 외국에서 온 분들을 초대해서 한글 얘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고, 개천절에는 단군 신화에 얽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발췌하도록 숙제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은 우리의 명절이 우리의 현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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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7(2024. 5. 3. 금요일).

시편 시 63:1-3.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마천루 속에 파묻혀 겨우 머리만 내밀고 있는 교회당 종탑을 볼 때면, 겨울엔 너무 춥게 보이고, 봄과 가을엔 너무 헐벗어 보이고, 여름엔 너무 불쌍해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 길을 지나가다가 교회당을 보면 한번 들릴까? 요즘 어떤 기도를 많이 하시냐고 물어볼까?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엔 왜 우리 교회가 이렇게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을까? 한숨만 나온다. 전국 명소에 낀다는 아산 은행나무 길 옆에는 오래 전에 폐가가 된 교회당이 하나 덜렁 서 있다.

    ‘마을 한쪽에 처음으로 세워졌던 작은 천막교회/ 예수쟁이는 몰아내야 한다면서/ 그 비방/祕方으로 팥죽을 쑤어 예배당 주변을 물들였던 마을 사람들/ 전도사는 며칠을 굶은 채/ 그 안에서 기도만 드리고 있다며 조잘조잘 전해주는/ 내 열 살 또래친구들/ 돈을 주든지 밥을 주라고 졸라대어/ 밥에 돈까지 챙겨 엄마와 함께 찾아갔던 그 예배당/ 몇십 년이 지난 지금/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장엄한 건물/ 자리를 꽉 채운 교인들/ 그런데 정작 우리 믿음의 양식은 어디쯤 와 있을까

    신학을 공부하고 시를 쓰시는 신을소 교수님의 눈가에는 감개무량이 아니라, 화난 무서운 모습으로 보인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천막교회도, 장엄한 교회당도 아닐 것이다. 메마른 영혼들의 타는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줄 믿음의 양식을 찾을 수 없는 까닭이리라.              신을소 시집, [외출, 믿음의 양식], p.56. 박성완, 24.5.2.

 

2. “축절들(1-3)”, “과월절과 무교절(4-8)”, “햇곡식을 바치는 축절(9-14)” 그리고 추수절(15-22)”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햇곡식을 바치는 축절, 오순절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유목생활을 하던 분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때까지는 그래왔습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장소에서 생활하는 농경문화와는 달리 풀을 따라 계절을 따라 짐승들을 먹일 풀을 찾아서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바야흐로 가나안 생활을 하게 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을 것이며, 자신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많은 오해와 곡해를 경험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농경생활에 대한 많은 실패와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 현지에 살고 있는 토착민들의 생활방식을 답습하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농경문화를 배운다는 처지에서 관용을 하였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그것이 우상숭배인 것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전해오는 농경문화가 있는데, 유월 유두라는 행사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선 초기의 성현成俔유두날 수단병水團餠을 마시면서[流頭日 飮水團餠]’라는 작품을 지은 바 있는데, 시간이 흘러 농사짓는 일에 수고하는 머슴과 같은 일꾼들에게 햇보리나 감자로 잔치를 열어 쉬게 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배경은 신앙적인 바탕이 중요하였기에, 첫 곡식을 거둔 후 첫 곡식단을 사제에게 바치게 하였고, 사제는 그 첫 곡식을 야훼 앞에서 좌우, 상하로 흔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이를 요제/搖祭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태어난 양 한 마리를 번제/燔祭로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를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제주/祭酒로 포도주 1/4힌을 바치게 했습니다. 참고로 유대인의 제사방법으로는 번제와 요제이외에도 거제/擧祭와 전제/奠祭가 더 있는데, 거제란 제물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 의식을 행하는데, 이는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되돌려받는 의식으로 제사장 몫으로 드리는 제물을 말하고, 전제란 제물에 피를 뿌리는 의식, 혹은 포도주를 뿌리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이런 복잡하면서도 까다로운 절차의 제사를 드린 것은, 절차 하나 하나에 대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며, 이를 부모가 자녀에게 잘 가르쳐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했을 것이나, 그 근본목적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물을 향해 가리키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는 모든 율법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후의 제물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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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6(2024. 5. 2. 목요일).

시편 시 62:9-12.

찬송 25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부터 사람들은 넉넉하게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뭔가 부족하고 조금은 약한 삶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선조에 김종국(1485-1541)10세와 12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형(趙有亨)에게서 양육되었다. 1509(중종 4)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이조정랑·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 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 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1540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조실부모하고 이모부 밑에서 자랐으나, 힘써 학문을 이뤄 대성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길 세상 사람 중에 집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 거처가 사치스러워 분수에 넘치는 자는 머잖아 화를 당하지 않음이 없다. 작은 집에 거친 옷으로 검소하게 사는 사람이라야 마침내 이름과 지위를 누린다.’ 그 자리에 있던 종실 이종/李鍾이 이렇게 답했다. ‘내 들으니 큰 집을 옥/이라고 하고 작은 집을 사/라 한답니다. /이란 글자를 파자/破字하면 시지/尸至 즉 송장이 이른다는 뜻이 되고요, /자는 쪼개서 읽으면 인길/人吉 곧 사람이 길하다는 뜻이 되지요. 큰 집에 사는 자가 화를 받고, 작은 집에 사는 자가 복을 받는 것이야 괴이할 일이 없습니다.’1).

    부자가 일생의 심력을 다 쏟아 자신 재물을 자손에게 물려주지만 그 재물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고 마니 안타깝다. 시지인길/尸至 人吉 큰 집에는 시체가 이르고, 작은 집에 살면 사람이 길하다. 부족해야 넉넉하고, 분수에 넘치면 제 몸을 망친다.” 1). 정민 [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 p. 24, 26. 박성완, 24.5.1.

 

2.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2(26-37)” 모든 종교는 도덕적인 바탕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부도덕한 종교 비윤리적인 종교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전자는 고등 종교라고 부르고 후자를 하등종교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고등종교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밝히고, 건강하고 풍성한 삶을 위해서 도덕적이고 건강한 삶을 추구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등종교는 사람들의 삶을 병들게 하고 피폐하게 만들며, 결국은 불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대체로 도덕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술수를 써서 점을 치지 말고, 관자놀이의 머리를 둥글게 깎지 말고, 구레나룻을 밀지 말라. 몸에 먹물로 새기지 말고 등인데, 유대인의 613가지 속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성소를 소중히 여기고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가서 물어보지 말라는 등 신앙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그 밖에 함께 사는 외국인을 괴롭히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자기 백성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전에 한 인간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사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 지켜야 할 윤리가 필요한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행스럽게도 신앙인에 대한 높은 도덕적 가치와 태도를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삶이란 그 실제에 대한 평가도 따라야 하겠지만, 소위 죄로부터 자유 하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눈떠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613가지의 율법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런 형식적인 도덕적 울타리보다도 그것을 지키고 있다는 인간의 내면세계는 그 어떤 율법으로도 규제할 수 없고, 또 그런 율법으로 인간을 고양/高揚 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예시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이 가르치는 이른바 고행성사입니다.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없는 죄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엄청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더 죄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게 진실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현상적인 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은밀한 죄로부터도 해방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까?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7:24-45).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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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5(2024. 5. 1. 수요일).

시편 시 63:1-3.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화에서 많은 깨우침을 받는다. 범브란트 목사는 이런 우화들을 알고 있어서 그 힘든 옥살이를 잘 견뎠는지 모른다. 한번은 해와 달이 싸웠다. 해가 나뭇잎은 초록색이야.’ 라고 말하니까, 달은 아니 은색이야.’ 라고 고집했다. 달이 사람들은 주로 잠만 자지.’ 라고 말하니까, 해가 아니, 사람들은 주로 움직이지.’ 라고 주장했다. 달이 그럼 왜 지구가 이렇게 조용하니?’ 라고 물으니까, 해는 누구한데 그런 소리를 들었니? 지구는 늘 시끄럽단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들이 싸우고 있으려니까, 바람이 나타났다.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들 싸우니? 나는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에도 불고, 달이 하늘에 떠 있을 때에도 분단다. 낮에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는 바로 해가 말한 대로야. 지구는 시끄럽고 사람들은 모두들 움직이고, 나뭇잎들은 초록색이야. 그러나 밤이 되어 달이 떠 있을 때에는 모든 게 달라진단다. 사람들은 잠을 자고, 고요함이 온 누리를 다스리고, 잎들은 은빛을 띄게 된단다. 그러다가 구름이 달을 가리게 되면 잎들은 검은 색이 되지. 해 너도, 달 너도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하는 구나.” 1).

적어도 50년 전에 유행하던 노래 가운데,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Yes, and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노래 가사는 매우 평범한 인생얘기인데, 당시에는 젊은 데모대들에 의해 불려서 마치 저항 노래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앞에 소개한 범브란트 목사님의 우화와 이렇게 잘 매치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2).

                                                                1). 범브란트, [새장을 벗어난 새의 이야기], pp.78-79. 2). 박성완, 24. 4. 29.

 

2.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1-18)”을 읽었습니다. 신약학자 알 멘이 엮은 [성서어휘사전/Vocabulary of the Bible] 에 의하면 거룩이라는 낱말은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kadosh라고 쓰는데, 가나안에서 기원한 것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말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구약 학자들은 희랍어로 hagios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kadosh란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것에서의 분리, 혹은 구별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힘이라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표제어에 대입해 본다면, “거룩한 백성이란 구별된 백성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동안 우리 동양권에서의 거룩이란 의미는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의미로 알려져 왔는데, 성서 언어인 거룩은 이와 사뭇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서 언어인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별된 백성이 되는 길이 되겠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거룩한 백성의 길을 얘기하는 대목마다, 이 주장과 다른 것들은 정반대의 의미를 부여하면 맞겠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친히 말씀하는 것들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야훼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자기 부모를 경외하는 일이며,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며, 우상에게 절하지도 말고 신상을 만들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까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재물을 다 먹지 못했다면 다음 날까지 먹고 사흘째 날에는 불살라버리라 합니다.

둘째는 밭에서 나는 수확이나 과일 등은 가난한 자와 이주 외국인들 위해 적당히 남겨두고 거두어들이는 일이라 합니다.

셋째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도 말고, 동족끼리 속이지도 말로, 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약한 이웃을 억눌러 빼앗지도 말고, 품삯은 다음 날 아침까지 미루지 말라 하십니다. 장애인들에게 못된 짓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넷째는 재판할 때는 공평무사하게 해야 하는데, 영세민이라고 두둔하지도 말고, 세력가라고 봐주지 말라 하십니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그들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런 말씀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과 구별되는 가르침이없습니다. 세상과 다른 세상 속에 사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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