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9107호(2026. 4. 23. 목요일).
시편 37:19-21.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이며 신학자이자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죄인들과 다른 하나는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는 의로운 자들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참고로 루터는 크리스천을 자신을 의롭다 여기는 죄인이라 정의했습니다.
2. “십계명을 받다(1-21절)”을 읽었습니다. 십계명의 의미와 정신은 예수님의 요약된 해석(마 22:37-40)에 따르면, 첫째 돌 판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둘째 돌 판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구분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인 십계명의 근거가 된 내용에서는, 제일은 제이는 제삼은 제칠은 제 십은 이라는 십계명의 순서가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십계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각 종교나 교파마다 신학적 역사적인 점을 들어 차이가 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교, 로마가톨릭-루터교, 그리고 기독교에서는 각기 3가지 다른 분류법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두 개의 돌 판에는, 유대교는 하나님 사랑을 다섯으로, 그리고 인간 사랑을 다섯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로마가톨릭과 루터교는 3:7로, 기독교는 4:6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를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하면, 유대교는 첫돌 판에 하나님만 섬기라부터 부모를 공경하라 까지를, 로마가톨릭과 루터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까지를, 기독교는 하나님만 섬기라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를 나누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까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돌 판에서는 자연스럽게 로마가톨릭과 루터교가 마지막 계명 탐내지 말라를 사람과 재물로 둘로 나누고 있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분류법은 유대교는 기원전 3세기의 필로(필론)이라는 학자의 주장을 따르고 있고, 로마가톨릭과 루터교는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을 따르고 있으며, 개신교는 16세기의 칼빈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용에 있어서는 빠지거나 더해진 부분이 없이 동일하지만, 오직 분류상에서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로마가톨릭과 루터교가 같은 주장을 하고 있고, 개신교와 정교회 성공회가 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같은 색깔을 가진 줄 알고 있었던 교파들이, 신학적인 차이에 따라서 또 다시 주장이 갈리고 있는 점입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어떤 분류든 믿고 싶은 대로 믿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 대 인간을 3:7로 나누는 것이 신학적이다 싶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시며 인간은 7수가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차제/此際에 우리는 계명과 율법의 차이에 대해서도 묵상해 봐야 하겠습니다. 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우리 주님의 대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율법사가 물었는데, 율법 중에서 계명이 상위 개념인 것은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십계명의 요약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고 큰 계명이며,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6-40). 이 주옥같은 말씀은 십계명을 요약하는 말씀일 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정신과 내용을 함의/含意하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신 6:4-9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인지를 눅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눅 15장의 찾으시는 아버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가 설교하는 농인교회에서는 가끔 질문들을 받기도 하고 그것을 설교에 반영하기도 합니다. 가령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교인들은 거의 습관적으로 똑같은 대표기도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죄의 고백이 유별납니다. “알고 짓고 모르고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라는 문구입니다. 저는 이 문구를 이제는 뺄 때가 되었다 생각합니다. 오늘의 십계명에서 그 해답을 찾자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자고 말입니다. 또한 제 이웃을 정성을 다해 사랑하지 못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구체성을 지적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할 우리의 이웃을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의 신앙의 큰 줄기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방법은 어때야 하는지를 찾아가는 노정이 신앙생활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옳은지를 찾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그런 맥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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