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99(2021. 11. 27. 토요일).

시편 시 41:10-13.

찬송 12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말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동방의 임금이 인간에 대해 알고 싶어서, 현자에게 500권의 책을 가져오라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나라일이 바빠 500권이나 되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고, 그래서 간단히 요약해 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20년 후 현자는 인간의 역사를 50권으로 줄여서 가져왔지만, 임금은 너무 늙어 무거운 책을 들을 수 없었고, 또 줄여오라고 했지요. 그로부터 또 20년이 흘렀습니다.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하는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왔지만, 임금은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한 권으로 줄인 책마저 읽을 수 없었습니다. 현자는 깊이 생각하다가 단 한 줄로 줄였고, 인간의 역사를 담은 그 한 줄은 이러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서늘한 유머처럼 들리지만, 인간 역사에 대해 변치 않는 진실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왜 이렇게 고생할까요?” 푸념했더니, 오히려 이런 물음을 받았다고 하지요. “고생하지 말고 살라는 법이 대체 어디 있느냐?” 작가 피터 한트겐은 소설 [소망 없는 불행]에서 그 고생의 내용을 이렇게 한 줄로 표현했습니다. “피곤하고, 기진하고, 병들고, 죽어가고, 죽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굳이 500권의 책을 읽지 않아도, 40년 동안 고민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이야기에 500권의 책과 40년의 세월을 등장시킨 이유는, 그 정도가 돼야 비로소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전에는 알아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불운이 닥쳐도 나만 왜 이렇게 고생하느냐며 세상과 운명을 원망합니다. 또 반대로 대단한 별개 있는 줄 알고 생을 바치는데, 그게 오히려 생을 소모하는 사실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지요. 그렇다면 인간에는 태어나서 고생하고 죽는 것 말고 축복은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보프는 <고요한 생활>이라는 시에서 축복받은 사람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이다/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시간도 날짜도 해도 고요히 흘러가서/ 봄은 건강하고 마음은 평안하며/ 낮에는 별일 없다/ 밤에는 깊은 잠에 학문과 휴식이 있고/ 즐거운 오락도 있으며/ 잡념 없이 전적으로 즐기는 일이란/ 고요히 묵상하는 것.” 건강하고 평안하며 별 일 없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축복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우린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4122일 방송>

 

2. “이스라엘은 썩었다(1-7)”, “하나님께서 구해 주신다(8-13)”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다(14-20)”을 읽었습니다. 가난한 농부 출신의 예언자 미가는 남왕국의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으며(주전 735-700), 이사야와 동시대를 살았으나, 귀족 출신인 이사야가 다윗 왕조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대신, 미가는 메시야가 태어날 곳을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이라고 선언하는 점이 달랐습니다. 미가서는 8세기 예언자들의 사상을 종합한 것으로 평가하는데, 아모스의 정의에 대한 강조, 호세아의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해 신실할 것을 호소하는 것과 이사야의 겸손한 신앙의 강조를 미가의 예언에서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미가 6:8인데, 옮기면 이렇습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의 이름을 어려워하는 자에게 앞길이 열린다.”(엄현섭, <구약성경의 길잡이>, pp.221-224).

   사실 미가서의 백미는 5:1-5의 메시아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다 족속 중에서도 보잘 것 없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태어난다고 말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는 당연히 예루살렘이어야 했을 것입니다.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장군과 부자들의 도시가 어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가는 베들레헴을 주목하게 했습니다.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 그리고 입산과 엘리멜렉 보아스의 고향이었습니다. 다윗의 흔적도 있는데, 다윗이 이곳에서 사무엘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은 곳입니다(삼상 16:13). 그러나 이 역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윗은 정신병을 앓는 사울 왕의 심기를 달래는 악사로 살아야 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답게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가를 통해서 베들레헴을 역사의 무대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비천한 것들을 들어서 귀하고 값있게 사용하시는 분이며,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통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 인간은 하나같이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 그것을 늘 잊고 교만하게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베들레헴이 인류 역사의 한복판에 서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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