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68호(2022. 12. 1. 목요일).
시편 시 107:40-43.
찬송 24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문학사를 이야기할 때, 김소월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요. 이는 우리 가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월이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우리에게 <동심초>에 노랫말을 지은 그의 스승 김 억 덕분이지요. 그는 소월의 재능을 알아보고 [창조]와 [개벽]에, 그의 시를 실을 수 있게 주선해 주었습니다. 32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못 잊어> <산유화> <초혼> 같은 그의 시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즐겨듣고 즐겨 부르는 우리 가곡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오늘은 소월이 23년에 발표한 <못 잊어>에 곡을 붙인 작품을 소개해 드립니다. 두 명의 작곡가 김동진과 하대응이 이 시에 곡을 붙였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하대응 의 곡입니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힐 날 있으리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도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 한껏 이렇지요.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나지요.”
못다 이룬 사랑에 대한 미련과 애수가 느껴집니다. 이 곡의 작곡가 하대응은 강원도 홍천 출신입니다. 한국 전쟁 당시 고향을 떠나 머물렀던 피난지 대구 근처에서 작곡을 했지요. 절박한 상념이 담긴 시와 함께 어우러진 곡의 정취가 무척 인상적입니다. 그가 곡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성악가로써 무대에 서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악가로써 무대에 서지 못하는 대신 곡에 쏟아 부은 그의 음악적 열정 그리고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2월 1일 방송>
2. “부활에 대한 토론(20-40절)”을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불가에서는 흥미롭게도 환생을 주장하는데, 윤회(Samsara)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어떤 업(Karma)을 이룩했느냐에 따라 환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이해를 둥근 원으로 도식화하는 것에 반해서 기독교 역사관은 선적인 것으로,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 중에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부정하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 아랍문화권에서 통용되었던 남아(南兒)선호사상, 특히 장자(長子)선호사상에서 생긴 수혼법(Levirate Law)을 위해서라도 부활은 불가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본문에 여과 없이 등장하는 대로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게 될 경우, 차남이 형의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형수와 관계를 맺고, 그래도 안 되자 셋째 넷째 그리고 일곱째까지 형수와 관계를 맺은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 부활이 있어서 일곱 형제들이 다시 만나게 될 때, 첫 형수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학이 성경보다 더 중요하다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수단이 목적을 삼켜버린 현상입니다.
부활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우회적이긴 하였지만 분명합니다. 천국은 시집가는 일도 장가드는 일도 없는 나라라고 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나라로 촌수가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입으로 이를 증언하였는데,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선언적인 말씀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인식되고 이해되는 부활이 난해하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부활을 기대하는 데서 생겨난 물음들입니다. 도마뿐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도 그런 질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신앙이란 보고 듣고 만지는 실체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에 기초를 두고 있느냐에 달린 솔루션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해서 모든 신앙인들은 실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밤 한 마리 물고기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깊은 데로 가서 던지라.” 말씀하실 때, 시몬 베드로는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 이다.”하고 던진 그물에는 두 배에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말씀합니다(눅 5:1-7, 마 4:18-22, 막 1:16-20, 요 21:1-11). 부활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이며 주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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