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038(2012. 6. 6. 수요일).

시편 7:10-12.

찬송 3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계가 없는 나라]는 에반티 프리처드가 쓴 미국 인디언 원주민들의 삶의 지혜를 담은 책입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습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에 이런 것이 있다. 오래 전 이 땅이 생명으로 충만할 때는, 그 누구도 훌륭한 사람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대표로 선출하지도 않았다. 지도자는 그저 나무의 가장 높은 가지였고, 백성은 그 숲에 사는 큰 사슴과 같은 존재였다. 사람들은 정직하고 정의로웠지만, 인간으로써의 의무를 다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성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주고받으며 살았지만, 베푸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에반티 프리처드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그 말이 동양의 장자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자신이 좋은 일을 한다는 별도의 의식이나 생색 같은 것은 애초부터 아예 없고, 그냥 지극히 평범하고도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일 뿐인데, 그것이 곧 가장 인간적이고 성실하고 선한 행동의 사람들이 사는 곳, 진정한 이상향이겠지요. 그런데 땅이 생명으로 충만했을 때는 그런 이상향이 얼마든지 가능했고, 그런 곳에서는 훌륭하다든지 훌륭한 사람이 따로 필요도 하지도, 특별히 의미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런 이상향에서의 지도자란 그저 난무의 가장 높은 가지 같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었고, 모든 백성이 바로 숲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사슴처럼 크고 훌륭한 존재들이었다는 장자의 일깨움. 요즘의 우리들에게는 새삼 되새겨 볼 일깨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49일 방송>a.

 

2. 똑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어떤 이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삶을 전부로 알고 사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보다 나은 삶으로 바꾸어 보려고 생각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것을 삶의 태도라고 한다면, 시인도 화가도 그렇게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순수시를 지향하는 이들과 현실 참여를 지향하는 이들이 그런 차이라 하겠습니다. 그림도 마찬가지겠지요. 눈에 보이는 사물을 사진처럼 옮겨놓는가 하면,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삶의 내용을 그려 넣는 그림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삶의 태도는 단연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놀이만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놀이를 통해서 당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말씀하는 때문입니다. 즐거워서 피리를 부는 아이들과, 슬퍼서 우는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을 함께 즐기려는 춤추는 반응이 없었습니다. 슬피 울지만 따라 울어주는 반응도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빗대어 세례 요한에게로 눈을 돌리게 합니다. 그는 시대를 염려하며 금식하며 살았는데도, 그 까닭을 생각해 보려고는 하지 않고, 오히려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는가하면, 또 이를 빗대어 예수님 자신에게로 눈을 돌리게 합니다. 신랑을 맞은 혼인집처럼 기쁘게 살게 되었다고 함께 즐겁게 먹고 마시자고 하니까, 이번에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할 뿐이라고 말입니다. 시대를 읽지 못하는 눈 먼 자들의 도시가 돼 버린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하얗게 생각이 멈춰버린 이 세상의 의식 없는 군상들을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제대로 눈을 뜨고, 생각을 깨우고 살고 있는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울어주고 함께 춤으로 화답할 그런 세상을 살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묵상할 주제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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