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211호(2012. 11. 26. 월요일).
시편 50:22-23.
찬송 52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옛날의 도공들은 자신이 만든 도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후하게 쳐준다고 해도, 넘겨주지 않고 깨트려 버렸다고 하지요. 유혹에 흔들림이 없는 장인정신에 대해서 말할 때, 흔히 쓰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작가 이 외수는 살짝 비틀었어요. “장인 정신이 투철한 도공은 흔히 마음에 들지 않는 도자기를 모조리 깨트려버리지만, 예술적 안목이 없을 때에는 명품만 골라서 깨트린다.” 장인 정신이 투철한 도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깨트려버린 도자기가, 명품으로 재탄생 할 수도 있습니다. 미술가 이 수경의 이름을 세계 미술계에 알린 것은 <번역된 도자기 시리즈>. 작가는 도자기로 태어났지만, 도자기이기를 거부당한 파편들을 주어 와서 맞추고 붙였습니다. 산산이 깨졌던 파편들을 이어 붙였으니, 그 자리가 흉터처럼 보기 싫을 수 있는데요, 작가는 그 자리에 금박을 칠했습니다. 상처입어서 금이 간 자리가 반짝이는 금이 되는 반전이 일어난 겁니다. 세계 미술계는 이렇게 탄생한 번역된 도자기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왜였을까요? 이 수경작가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버려진 존재가 다시 아름답게 나타났을 때 위로 받지요. 어디 위로뿐일까요? 사람들은 치유 받고 그곳에서 희망을 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애초에 왜 버려진 걸까요? 번역된 도자기라는 제목에 힌트가 있습니다. 작가가 2001년 이탈리아 알비솔라 비엔날레에 참가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탈리아 도공에게 조선 백자와 관련한 시와 설화를 들려주고 재현하게 했다고 하지요. 그렇게 완성된 백자는 흰 바탕에 파란 색 그림이 들어간, 도저히 조선 백자라고 할 수 없는 도자기였습니다. 아무리 상세하게 설명해 주어도 생길 수밖에 없는 이해의 차이. 그로 인해서 생생히 깨져버리는 애초의 의도와 기대. 많은 사람들이 그 지점에서 상처를 입고 파편이 돼버린 마음을 포기해 버리지만요, 작가는 깨져버린 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어 붙여서 작품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번역된 도자기를 보면서 생각했어요.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꿈 꿨던 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심지어 산산이 깨져도 괜찮아. 이어붙이면 돼. 이어붙인 자국은 흉터가 아니라 아름다운 무늬가 될 수 있거든. 레너드코인도 말했잖아. “모든 것은 금이 가 있다고. 빛은 거기로 들어온다고.”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9월 24일 방송>
2. 이번 주는 사도서간문들 중에서 본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연속된 본문이 아님을 양해 바랍니다. 아마도 교회력 마지막 주간을 다채롭게 여행하라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늘의 본문은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기독인의 신앙과 생활에 관한 말씀으로, 기독인은 좋은 대인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말씀과(1-5절), 재물에 대한 올바른 사용에 관한 권면의 말씀입니다(6-10절). 언제나 말씀은 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종종 기독인들은 말씀 자체의 배경보다는 자기 자신의 배경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많아서 엉뚱한 결과를 얻곤 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는 갈라디아서의 배경을 이해할 때, 비로소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바르게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바울이 개척한 교회 중의 하나인 갈라디아 교회에는 바울 사도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율법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 교사들이 교회를 흔들고 있는 배경에서 쓰게 된 서신입니다. 서신의 마지막 권면으로 앞의 두 주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기독인은 모범적인 대인관계에 대해서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우리들 기독인이 모난 성격이나 다투기 잘 하는 생활 등은 자칫 복음을 전하기는커녕 가로막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자기 역할에서도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가정에서의 역할, 일터에서의 역할 등은, 복음을 전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가족에게 불충실하기로 유명한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기독교 자체에까지 주는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3. 새로운 생활은 여러 가지 점에서 피곤케 합니다. 어제는 현관 앞에서 두 차례나 오랫동안 서 있어야 했습니다. 현관문이 우리를 환영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A/S 센터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때문입니다. 열쇠 가게에서는 부시고 새 것을 권고하면서 엄청난 돈을 요구했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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