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212호(2012. 11. 27. 화요일).
시편 51:1-5.
찬송 39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말을 할 때 내심 이러길 바랍니다.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알기를. 부디 쇠귀에 경 읽기 같지 않기를.” 하지만 내가 겨우 한번 말한 것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입니다. 얀 마틀의 소설 [베아트리스와 버질]에는 버질이 베아트리스에게 먹는 배를 설명하는 장면이 장장 아홉 페이지에 걸쳐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베아트리스는 배를 먹어본 적도 본 적도 없기 때문이지요. 버질에게 한참동안 배의 모양에 대해서 설명을 들은 베아트리스가 묻습니다. “그래 맛은 어때?” 그러자 버질은 냄새부턴 맡아 봐야 한다면서 이렇게 설명하지요. “잘 익은 배는 향기는 우리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정신이 몽롱해지고 멈춰버리는 것 같다고. 온갖 기억과 그에 관련된 생각을 하얗게 지워버리고. 정신이 그 매혹적인 향내에 매력을 알아내려고 그 매력을 알아내기는 정말 힘들지.” 베아트리스는 계속 그 맛이 어떤지 궁금해 하고, 마침내 버질이 맛을 설명합니다. “배를 작게 잘라내면 속살은 새하얗지. 안에 전등이 켜진 것처럼 하얗게 빛난다고 그래서 과도 하나와 배 하나만 있으면, 어둠도 무섭지 않아. 배를 씹을 때 입안에서 느껴지는 느낌이나 감각도 정말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어. 어떤 배는 아삭아삭하기도 해.” 그 맛을 상상하기 위해서 버질이 묻습니다. 사과처럼? 베아트리스가 펄쩍 뛰면서 부인하지요. “아니라니까. 사과하고는 완전히 다르다니까. 괜찮은 배는 맛이 굉장해. 그러니까 배를 깨무는 환희에 빠지는 순간,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버릴 거야. 배를 먹겠다는 것 말고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을 거야”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끝내 묻고 말았습니다. “그럼 배 맛은 뭐랑 비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우리는 지금 반쯤 아는 것들 듣고 이해한다. 라고 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말을 연상시킵니다. 바질도 백기를 들고 말지요. “배 맛은 뭐랑 비슷하냐면, 뭐하고 비교할 수 있냐면, 모르겠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배 맛은 배 맛 그 자체야. 어떤 맛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어.” 베아트리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합니다. “아, 너한테 배가 있으면 좋을 텐데.” 버질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이지요. “그러게 나한데 당장 배가 있다면 당장 너한테 맛을 보여 주었을 거야.” 둘은 침묵합니다. 이렇게나 오랫동안 배의 모양과 향기 맛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끝내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고, 또 확실하게 알지도 못했습니다. 얀 마틀이 배에 대해서 이렇게 긴 분량을 썼던 이유는, 이렇게 흔하디흔한 과일 하나도 알려주기가 힘든데, 나는 겪었고 너는 겪지 않은 일을 설명하기란 오죽하겠는가! 옅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언어로 말을 하고, 그러니 그 언어는 결코 공통된 언어 체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하나 가득 나눠도, 그 대화는 그저 그런 지부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지요.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나의 느낌과 생각을 어떻게든 그 느낌 그대로, 그 생각과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예술가라 부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9월 6일 방송>
2. 오늘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주시는 권고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적어도 세 가지 단락을 가지고 있습니다만(10-15, 16-17, 18-23),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신앙태도를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 단락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 둘째 단락은 그리스도인의 세상 사람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며, 셋째 단락은 그리스도인의 세상에 대해서는 바보가 되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단락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후배나 제자들에게 <바보 론>을 제안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은 바보가 되는 것을 싫어했던 게 사실입니다. 이른바 세상 물정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어찌 보면 순진해 보이지만 역시 바보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최근 두 가지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새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디지털 도어 록이 열리지를 않았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이 계속되니까, 화도 나고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집 주인으로부터 경험자들에게 물어볼 만큼 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자, 바꾸는 게 낫다는 교우의 말을 듣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열쇠 옆에 붙어 있는 가게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디지털 도어 록은 고장이 나면 무조건 해체해야 한다는 겁니다. 해체 비용이 3만원이고, 새 것은 최하 20만 원 이상이라고 합니다. 대학교수라는 아들이 화가 잔뜩 나서 그렇게 하자고 불렀다는데 20분이면 도착할거라는 분이 1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도어 록 안쪽에 작은 글씨로 적힌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는데 아주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안내를 받고 있는 중에 열쇠가게 사장이 도착했고, 충전만하면 고칠 수 있는 것을 알아낸 제게 미안한 기색도 없이 문을 열어주고 출장비만 받고 떠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속이려는 사람들뿐인 듯 했습니다. 다른 일화는 이삿짐을 옮기러온 분들과 점심을 먹게 된 평범한 얘기입니다. 자장면 대신 순댓국을 사 드리겠다고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주인 할머니에게 힘을 쓰시는 분들이니 고기를 넉넉히 넣어드려 달라고 부탁을 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목사여서 술대접을 못해서 미안하게 되었지만 식사 시중을 들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생한 얘기를 몇 마디하면서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대부분이 목사도 별 것 아니구나 느끼는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작은 목사가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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