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362호 (2013. 4. 26. 금요일).
시편 시 88:1-5.
찬송 51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11년 파리에 있는 조르즈브뜨 갤러리 장 오기스트 도미니끄 엥그르의 전시가 열렸습니다. 이 전시에 일흔일곱 살의 노인이었던 애드가 드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갔다고 하는데요. 앵그르는 드가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때 드가의 눈은 거의 멀어 있어서, 그저 그림들 위로 손을 저어볼 뿐이었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그는 앵그르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존경하는 화가 앵그르에게 특별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매일 전시에 갔던 겁니다. 눈먼 노인이 매일 전시회에 와서 그림위로 손을 젓는 모습. 다른 여느 평범한 노인이라고 해도 가슴이 뭉클한 장면인데요. 극도의 인간 혐오증 때문에 평생 아무도 마음에 들이지 않은 채, 고독하게 살았던 드가라서 더 뜨겁게 느껴집니다. 동시에 드가의 성취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질투와 존경의 출발은 비슷합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을 이미 성취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라는 점에서요. 그러나 출발만 비슷할 뿐 과정도 끝도 다르지요. 질투가 상대방을 나와 동급으로 여기면서 경쟁으로 치닫는 반면, 존경은 상대를 내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로 인정하고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벅찬 기쁨이 샘솟는 감정이지요. 존경의 대상이 꼭 위대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예전에 한 50대의 선배가 30대 후배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내가 너를 참 존경한다.” 이렇게 진심으로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요. 그 날 이후 그 선배가 다시 보였습니다. 까마득한 후배에게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큰마음이 존경스러웠고, 닮고 싶었습니다. “존경할 만한 인물이 없는 세상이다.” 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요, 혹시 우리 안에 타인을 존경할 마음이 없어서는 아닐까요? 존경하는 마음이란 세상과 사람을 고귀하게 보는 시선이고,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마음이고, 또 계속 배우려고 하는 자세일 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존경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존경하기 힘들다는 말도 사실이고요. 존경 받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 또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3월 20일 방송>
2. 최근에 가까운 분들을 떠나보내는 일을 겪으면서, 새삼 죽음 앞에 무력한 인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죽음이 무엇인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등등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죽음을 눈앞에 둔 한 백부장의 종이 등장하고(2-10절), 나인 성의 한 과부의 젊은 아들이 이미 죽어 무덤으로 가는 장례 행렬이 나옵니다(11-17절). 백부장의 종이라고 했으니까 아마도 백부장 사택의 관리인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주인에게 충성스러워서 백부장이 지극히 아끼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하인은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절망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인 백부장은 그를 살리고 싶어서 유대인 장로 몇을 주님께 보내 간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나인성의 과부의 경우는 더욱 절망적입니다. 남편이 먼저 떠난 것도 서러운 일인데, 하나 뿐인 아들마저 죽어 무덤으로 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듯 죽음이란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가장 힘센 원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너무도 초라하게 맥을 쓰지 못합니다. 백부장의 경우는 심부름 간 사람들에게 말씀만 해달라고 해서 그리하였고, 과부의 아들 역시 관에 손을 대시고 “일어나라.” 고 말씀하시니,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주님께 있어서는 아무 문제가 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은 삶과 죽음을 손에 쥔 주인이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 같은 절망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더 붙잡을 이유라고 말입니다.
3. 오늘 고 지원용 박사님과 고 지원상 목사님의 추모 예배가 루터대학교에서 열립니다. 저는 조사(弔辭)를 맡았는데, 그 분들을 추모하는 가슴 따뜻한 시간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그랬을까? / 눅 7:36-50. (0) | 2019.05.19 |
---|---|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가는 것입니까? / 눅 7:18-28. (0) | 2019.05.19 |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 주옵소서. / 눅 6:39-49. (0) | 2019.05.19 |
불가능에 도전하라 하십니다. / 눅 6:27-38. (0) | 2019.05.19 |
행복하게 살려면 거꾸로 살아야. / 눅 6:12-26. (0) | 2019.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