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411호 (2013. 6. 14. 금요일).
시편 시 99:4-6.
찬송 48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짧은 여행길에 만난 풍경을, 휴대전화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주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보냈건만,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다, 멋지다, 고맙다,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공감해 줬던 사이입니다. 다음 날도 감감 무소식이라, 이번에는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 받지 않았습니다. 익숙한 목소리 대신 신호음만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 막막한 신호음을 듣고 있자니, 지금까지 알던 사람에게가 아니라, 미지의 우주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것 같았지요. 이틀이 지나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사흘이 지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 안부를 알아 봤습니다.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친하다고 믿었던 사이였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스누피가 쓸쓸하게 읊조렸던 말이 떠오릅니다. “누군가와 굉장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 같기도 하다. 내 밥그릇은 늘 60cm 거리에 있었는데, 가끔은 90cm 거리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닐지 모릅니다. 혹은 잠시 그랬다가 다시 60cm로 가까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유에 대해서 묻지 않는 까닭은, 어떤 답을 들어도 두렵기 때문이고, 먼저 다가가지 않는 까닭은, 다가가는 만큼 뒤로 물러설까봐 두려워서입니다. 공존에는 공감이 필요한데, 서로에 대해서 더 이상 공감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멀어졌다고 느낍니다. 우리가 멀어졌다고 느낄 때,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보다 더 알 수 없는 사이가 돼 버립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년 5월 28일 방송>
2.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좋은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설교학을 배울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설교를 먼저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렇게 하면 좋은 설교를 배웠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두 사람을 객관성을 갖고 주목하게 하십니다. 한 사람은 유명한 신앙인 바리새인입니다. 그의 기도의 특징을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공개적이라는 점인데,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가운데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는 점이고, 둘째는 자신의 장점을 알리는데 충실했는데, 다른 사람의 약점을 비교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기도유형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세리의 기도인데, 역시 그의 특징은 첫째는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감추듯 속삭이는 기도였다는 점이고, 다음으로는 불쌍히 여겨달라는 내용이 전부였습니다.
어리석은 질문 같습니다만, 우리는 왜 기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가르치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정신 줄을 놓고 있어서 깨우려는 것입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의 삶의 모습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훤히 살피시는 분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제 자랑이나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해서 말입니다. 주님이 칭찬하신 세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는 너무 벅찬(?)기도가 아니었을까요? 도대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게 만들 테니까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대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 눅 18:31-43. (0) | 2019.05.21 |
---|---|
부자, 낙타와 바늘귀의 문제 풀이. / 눅 18:15-30. (0) | 2019.05.21 |
진정성을 가진 기도를. / 눅 18:1-8. (0) | 2019.05.21 |
천국은 어디에? / 눅 17:20-37. (0) | 2019.05.21 |
믿음의 또 다른 역할. / 눅 17:11-19. (0) | 2019.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