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492호 (2013. 9. 3. 화요일).
시편 시 118:1-4.
찬송 41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클라라는 가난이나 돈 문제에 대해서, 너무 이상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보면, 좀 답답해집니다. 후배 한 명이 요즘 다시 전세를 살아야 할지. 내 집을 사야할 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지요. 클라라는 복잡한 이 후배의 심정이 너무나도 이해되기 때문에, 욕심내지 말라는 충고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서민이 집 한 채에 모든 것을 건다는 것, 전문 투기꾼과는 좀 다르지요. 주거로써의 개념만이 아니라, 재테크며 노후보장까지 생각하는 것을, 그저 욕심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는 게, 클라라의 생각이거든요. 오히려 복지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라라는 복지라는 것이 안전한 사다리를 타고 잘 올라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삐끗하고 발을 한번 잘못 디뎌 떨어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받아주고 임시 사다리를 만들어서, 계속 다시 오를 수 있게 해주는 장치라고 믿지요. 그런 것들이 비교적 잘 되어 있다면, 집 한 채에 모든 걸 거는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복지 체계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우리도 내 집 마련에 연연해하지 않고, 선진 복지 나라의 서민들처럼, 일 년 동안 모은 돈을 한날 여름 휴가비로 사용하면서, 욕심 없이 살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회 안정망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서민들은 집 한 채를 사면서 거기에 모든 희망도 함께 거는 것이겠지요. 그러다가 안타깝게도 스스로 부동산 투기의 덫에 걸리기도 합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클라라는 집하나 가질까 말까 하는 서민들의 경우만큼은, 부동산 투기라거나 욕심이라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서민들의 허약하고도 쓸쓸한 자기 방어책이라고 생각하지요.<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10년 4월 12일 방송>b.
2. 재판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이 모닥불을 쬐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 속에 베드로도 어정쩡한 자세로 손을 내밀어 불기운을 당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베드로를 보고 아는 체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화들짝 놀라는 표정으로 부정도 인정도 아닌 중립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식 표현대로라면 “무슨 말이야?” 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종은 다시 옆 사람에게 더 분명한 어조로 예수의 당이라고 했을 때는 부인하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다른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지적합니다. 갈릴리 사람이라는 점과 그 예수 당이 맞다고말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러자 예언대로 닭이 두 번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하는 모습에서, 갑자기 오한을 느낍니다. 우리라고 얼마나 다를까 해서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럽의 교회 종탑들이나, 교회 지붕에는 유난히 장탉이 두어 마리 씩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장탉을 보면서 너 자신을 살펴보라고 말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을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주님을 부인하는 일이란 우리들 삶의 구석구석에서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불의와 부정에 눈 감는 버릇은 그냥 봐준다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탁류에 휩쓸려 내려가는 것을 즐기듯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남들이 피하는 힘들고 어려운 좁은 문이 아니라, 오히려 편하고 쉬운 문을 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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