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조국 사태에 대해서 국민적 찬반 집회가 한참이다.
이를 두고 대의 민주주의에서 직접 민주주의로의 전환이라는 주장들이 있다.
그러니까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국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이런 국민의 정치 참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지난 대통령 하야 촛불집회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경험하였고,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찬사를 받았다. 심지어 유럽이나 홍콩은 부러워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데 요즘의 종교인들의 대중적인 정치 참여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과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 또 누군가의 말처럼 기독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현실 문제에 외면할 수 없다 생각했다.
과거에 유신 독재의 폭거에 항의하는 종교인들의 정치참여가 있었다.
천주교 정의사제 구현단이나 개신교의 KNCC 등이 그런 역할을 하였고,
김수환추기경이나 박형규목사 등이 개인 자격으로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물론 이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 하나가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종교인 역시 국민의 한 사람이다. 충분히 정치적인 관심사를 표현할 수 있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옳다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 양심에 따라서 말하고 행동할 자유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이고, 또 자기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 합의된 범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어느 종단이나 교파가 일치된 목소리라며 표현하는 것은 말릴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개신교 내에서도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단과 소극적인 교단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개인 자격이 아니라 어느 집단을 대표하게 될 때는 구성원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적인 주장이라고 말할 때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보편적 기독교 신학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못할 때는 반드시 개인의 생각이거나 해석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할 것이다.
이유는 자칫 기독교인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성경의 중심점과 역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몇 목사들이 공개적으로 보이고 있는 주장에는 너무도 많은 기독교 신학에 비출 때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전광훈 목사이고, 장경동 목사의 대중적인 발언이다.
한기총을 대표한다는 전광훈 목사는 특유의 독설을 쏟아내고 있는 인물로 열띤 찬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그 분은 기독교 지도자 이전에 특유의 독설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많은 빈축을 사고 있다.
그 하나가 빤스 목사라는 별칭이고, 현직 대톻령을 가만두지 말아야 하며, 청와대를 진격해 갈 용사를 주문하였다.
참고로 전광훈 목사가 대표회장이 되기 전에는 개신교회의 60%이상을 점하던 한기총이
지금은 30%대로 하락하였다 한다. 많은 교단이 탈퇴를 하고 있는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은 장경동 목사의 발언인데 북한이 침략해 오면,
북한 사람이 2천만명이니까 남한 사람 2천만명이 1:1로 끌어안고 죽어도 3천만명이 남으니까 문제없다 라고 말하거나,
2019년 10월 9일 광화문에 모인 보수단체 집회에서, 거기 모인 사람들을 100만명의 의인이라고 부르면서,
의인 100만명이 있으니까 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다. 성경에 대한 곡해를 한 것이다.
이런 인물들의 발언의 정당성에 대해서 기독교회 밖에 있는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심히 우려되는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한 폄혜와 오해를 낳는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성도가 자기 앞에서 빤스를 벗으면 내 교인이고, 안 벗으면 내 교인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얼마나 수준 낮은 표현인가!
그리고 충분히 명예훼손 고소를 당할 발언들과 국가 전복시도라는 죄목으로 입건될 발언은 도를 한참 넘었다고 본다.
1:1로 끌어안고 죽으면 된다는 표현은 아마도 논개를 연상하게 하는데, 어린 아이 수준이어서 빈축을 살 뿐아니라,
의인 100만명 발언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라는 차원에서 정말 목사의 말인가 의심스러운 주장이다.
개인적인 발언이었다고 한다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처벌을 받던지 하면 되겠으나,
이 분들이 기독교 지도자라고 소개되고 스스로도 그렇게 자처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그런 주장들이 기독교의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거나 신학이라고 오해받을 소지가 충분한 때문이다.
기독교 성경은 그들처럼 말씀하지 않는 때문이다.
성경은 언제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한 구절만 따와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언제든지 오해를 낳게 된다.
비폭력이 성경의 중심사상이지, 폭력이 중심사상이 아닌 때문이다.
선거라는 수단을 통해서 얼마든지 정부나 대표자를 바꿀 수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1:1 죽자는 표현이나, 100만명 의인설은 유치 찬란한 표현이다.
원수와 적을 구별하자는 논리도 그렇다.
원수는 기도할 대상이고 사랑할 대상으로 성경이 말씀하니까 유화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크게 다른 말이 아니다. 오히려 원수가 훨씬 더 강한 적인 때문이다.
성경은 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적이 힘이 세면 화해를 하라고 권하는 말씀이 그것이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사람 정도를 원수라고 할 때, 원수와 적 중에서 누가 더 증오의 대상이 될까?
이런 말장난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분의 신학적 성향이 그런 수준인 것은 많은 TV 연예물에서 방영되었다.
나는 기독교의 중심사상이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오해 내지는 곡해되어 기독교회를 천박하게 만들까 걱정한다.
기독교회는 공자 사상이상으로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높은 차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회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라는 깊이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무식함과 성경 전반에 대한 몰이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분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학의 부재에서 온다고 평소에 생각했다.
마음이 많이 아프다. 이런 류의 목사들이 큰 비난을 받지 않고 건재하는 것에서 많이 슬프다.
그리고 우리 한국 개신교회의 형편이 이런 수준인가 하는 자괴감을 감출 수가 없다.
이 모든 문제의 바탕에는 성경과 정반대 주장 성공제일주의에 있다고 본다.
성경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나
문명과 발전의 변방인 갈릴리에서 평생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산상수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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