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904호(2020. 4. 11. 토요일).
시편 75:8-10.
찬송 48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 하나 이어갑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세 개의 열매를 맺은 작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기쁨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 개에서 두 개는 여름 태풍에서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남은 한 개도 시름시름 앓더니 맥없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작은 나무는 태어나 처음으로 슬픈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 나무가 이렇게 위로합니다. “얘야, 첫 해의 꽃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는 없다. 그건 나무가 아니라, 한 해를 살다가는 풀들의 세상에나 있는 얘기란다.” 이순원 작가의 소설 <나무>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작가는 우리 사람의 일을 나무에 비유하면서, 한 두 번의 실패로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가 스트레스 받는 건 자꾸만 풀처럼 살라고 하는 것 같아 서지요. 첫해의 꽃으로 열매를 맺으라고 자꾸만 성화입니다. 누군들 욕심은 첫해의 꽃으로 열매를 맺고 싶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건 한해만 살다 죽을 풀들의 세상에나 있는 일입니다. 몰아치는 태풍 앞에 비록 올해 맺은 열매 전부 다 떨어지더라도, 나무들에게는 우리 사람에게는 다음이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실패한 경험 덕분에 실패를 피할 수 있는 방법 하나 터득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유독 실수나 실패에 냉정한 경향이 있습니다. 고작 한두 번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뿐인데, 재기 불능의 패배자로 낙인찍는 것이지요. 이러다보니 실수할까봐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시도조차 하지 않고, 미리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하지만 로마를 제국으로 키운 정신은 이것이었다고 합니다. 패배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포기가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온 군인들도 아낌없이 두 팔 벌여 환영했습니다. 패배의 경험이 다음 번 전투에 기여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실리콘 벨리가 오늘날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비결이, 도덕적으로 문제없고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실패했을 때, 다시 도전할 수 잇도록 지원해 주는 시스템에 있던 사실은 유명하지요. 개인의 실패가 사회의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인식 덕분입니다. 실패를 끝으로 여기고 더 이상 기회를 주지 않느냐, 아니면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자산으로 보느냐? 많은 걸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인식의 기준이 아닐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8년 4월 9일 방송>
2. “은총의 선물을 잘 관리하는 자(1-8절)”을 읽었습니다. 엊그제 묵상식구 오인근 목사님께서 프랑스의 한 기독교인들이 성당 주변에서 무릎을 꿇거나 벽이나 기둥을 붙들거나 손을 하늘로 높이 들고 기도하는 모습의 동영상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루에 1,500명씩 죽어나가는 재앙 앞에서,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 살아왔는지를 회개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입니까?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아리마대 사람의 새 무덤에 누워계신 날입니다. 그리고 큰 돌로 무덤 문을 막아버렸습니다. 절망의 날이고 슬픔의 날입니다. 마침 오늘 성토요일의 본문인 벧전 4:1-8은 주님께서 육체의 큰 고통을 받으셨으므로, 그 같은 각오로 무장해서 더 이상 죄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처럼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방탕과 술 취함 그리고 우상을 쫓던 삶을 멈추라고 권고합니다. 그건 지금까지의 삶으로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뿐이라고 말입니다.
사도들이 살던 시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박한 종말관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죽음이라는 차원에서 지금도 임박한 종말관은 유효합니다. 여전히 우주적 종말은 아직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호들갑을 떠는 선동에 끌려다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이 하나 둘 차에 치어 죽은 강아지 버리듯, 냉동 탑 차에 차곡차곡 쌓여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임박한 종말을 예상하자고 말입니다. 사도의 말씀처럼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하고, 기도다운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리석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고등학교 동창인 한 친구가 오랫동안 자신의 지병으로 입원중인데, 제가 기도하고 있다는 얘길 듣고 힘을 얻는다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듯 누군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사도의 말은 복음의 위력을 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불멸성과 넘치는 은총을 가늠하게 합니다.
3. 주님은 무덤에 내려가셨고 죽은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셨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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