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한 유행가 가수가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불러 대단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유행가는 일반 대중들에게 공감을 사는 가사와 가락을 만들기만 하면 소위 대박을 터트리곤 했습니다.
최희준의 <인생은 나그네길>이나 송대관의 <해뜰 날> 등이 그랬습니다.
이런 대중가요들은 예측할 수 없는 인생 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 "내 얘기야!" 하는 노래에 심취하게 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저의 선배 목사님 한 분이 혼자 소리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 십권의 책을 써도 제대로 된 단 한 곡의 찬송가를 당해낼 수가 없구먼.
내가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매우 흔한 질문이면서 그 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 듣곤 했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잘 산다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요즘처럼 일생을 나름 올곧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잠시잠깐의 일탈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면서
새삼 이 질문이 진지하게 다가오곤 합니다.
5천만원을 뇌물성으로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자기 직원에게 상습적인 음담패설을 던졌다는 게 알려지면서,
평생을 지켜온 신념과 고통을 한꺼번에 내던지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저런 삶의 고통을 참고 견뎌온 그 큰 목적이 뇌물이나 성적 가해자로 낙인찍히는 순간,
자신들의 목적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서 인생의 길을 걷고 있다 하겠는데,
그 목표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택한 것이 올 곧게 사는 것이라고 믿어왔는데,
그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스스로 무너트리는 바보짓을 하였으니 온 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갔을 것입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과연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앞서의 사람들은 그래도 뭔가 거창한 목표를 향해서 달음질 하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탈로 그 목표를 스스로 무너트린 결과를 마주했을 때,
도무지 한 순간도 버티고 서 있을 힘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 그냥그냥 생명줄을 버티던 갑남을녀들은 왜 삶을 포기하는 것일까요?
그들 중 대부분은 잘 산다는 말조차 꺼내기도 힘든 삶이거나,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칫 야망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얘기할 수 있을까요?
늦은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온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교수인 저보다는 15년은 더 연배였던 사회 경험도 풍부했던 그 분이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목사님, 제가 목사가 된 것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한때는 별을 모자에 달고 가슴을 쫙펴고 살던 친구들인데 지금은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제가 하는 일이 너무 멋있게 보인다고 합니다."
물론 평생 자부심을 가지고 살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꼭 목사나 신부가 되는 것만이 잘 살고 있다거나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야 맞기 때문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나 일이나 꿈이나 미래를 제자리에 두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특별한 직종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면 될 일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 97살에 별세하신 촌노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매일 낡고 빛 바랜 유모차를 밀고 마을 길로 나옵니다.
그리고 때론 낫으로 때론 호미로 길 옆의 잡초들을 베거나 뽑곤 했습니다.
그분이 별세하신 후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그분이 유모차를 끌고 나와 앉은뱅이 노릇을 하며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일찍 별세하셨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한번은 그 촌노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밖에 없어요. 이 일을 하면 마음이 기쁘거든요."
그렇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높은 야망을 가질 수도 없고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 촌노가 말했던 것 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 말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공화정을 이상으로 삼았던 영국의 크롬웰 장군은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다 합니다.
정치하는 분들이 하나같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하는데,
어느 날 크롬웰 장군이 말을 타고 언덕 위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시골 집 앞 마당에서 부부로 보이는 한 촌노 부부가 곡식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이 너무 행복해 보이고 아름다워서 가까이 갔더랍니다.
그런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노동요를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 그 노랫말이 너무도 자신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그 노랫말의 한 구절엔 "우리에게 크롬웰 장군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 다가가서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 백성을 사람답게 살도록 힘쓰고 계시지 않느냐고 반문하더랍니다.
그때 크롬웰 장군은 소극적이고 낙심하기 잘 하던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합니다.
크롬웰 장군도, 그리고 시골 타작마당의 촌노 부부도 모두가 삶을 제자리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이면 잘 살았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도 마음이 아프고 아쉬운 것은 너무 거창한 목표를 세웠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실수를 해서 그에 걸맞는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고쳐진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드시 국회의원직을 유지해야 하고, 시장직을 유지해야 잘 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는 것이 인생이고, 고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생각하는 세태가 너무 보잘것 없어 보입니다.
OECD 36개 국가 중에서 자살 율 1위라는 우리 나라가 너무 허약해 보입니다.
그리고 잘못을 인정하는 방법치고는 너무 무책임한 때문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끝까지 완주하는 인생입니다.
물론 상도 받고 벌도 받고, 고칠 것은 고쳐가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환경도 그렇게 발전되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잘 산다는 것은 아픔과 허물을 껴 안고 사는 것,
그것을 성경에서는 거듭남의 삶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날마다 거듭나며 살아가는 길목에 서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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