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46(2020. 8. 31. 월요일).

시편 103:15-18.

찬송 4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빠 보세요> 언니랑 통화하다가 오빠 건강 검진 결과 얘기 들었어요. 혈압도 조금 높고 간도 조금 나쁘다면서 언니가 한숨을 푹푹 내 쉬더군요. 전화를 끊고 나서야 비로소 오빠의 나이, 언니의 나이 그리고 우리들 나이를 곰곰이 헤아려 봤어요. 살다보니까 나이 헤아리는 것도 잊고 지냈나 봐요. 오빠의 나이, 아이들 어지간히 키워놓고, 말하자면 인생의 가장 큰 숙제를 마친 다음, 비로소 슬슬 자신의 노년 준비에 힘쓸 때이더군요. 스스로를 그런데도 오빠가 돌봐주는 정성을 보이지 않으니까, 아마도 몸이 병고를 주기로 했나 봅니다. 다행히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은 아니고, 그저 주의를 기우려주어야 할 만큼이라니, 저는 딱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빠처럼 장남에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야, 뭐 아직도 할 일이 태산이라고 아직 쉬엄쉬엄 걷기에는 이르다고 하시겠지요. 그렇게 고집을 피울 것이 뻔 한 오빠를 위해서, 연꽃 이야기 하나 해 볼까요? 어디선가 들었던 연꽃의 정화작용 이야기예요. 연꽃이나 토란처럼 자신의 뿌리를 잘 키워내야 하는 식물은 자신의 몸, 그 중에서도 양분을 섭취하는 이파리를 정말 열심히 닦고 보호한다고 그러더군요. 먼지나 더러움이 오래 머물 틈이 없이 반들반들하게 자신의 이파리를 닦고 보호하기 때문에, 물방울 하나조차 오래 머물지 못하고 또르르 굴러 떨어질 정도라고 하지요. 그런 연꽃의 정화작용. 자신의 겉모습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뿌리에 양분을 듬뿍 전해 주기 위한 한 방편이라고 합니다. 오빠, 이젠 오빠도 스스로의 몸을 지키고 돌보는 데 더 힘을 쓰세요. 그게 언니나 애들, 그리고 식구들을 위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니까요. 곧 찾아뵙겠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512일 방송> a.

 

2. “니고데모와의 대화(1-21)”을 읽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율법사이며 유대인의 의회격인 산헤드린의 의원으로 진리에 대한 궁금증을 풀려고 예수님을 찾아온 인물입니다. 성경에는 니고데모에 대한 기록이 3군데 나오는데, 첫 번째는 오늘 본문으로 주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기적을 행한다고 말할 때,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셔서, 저 유명한 거듭남의 진리에 대해서 배우게 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바리새파 공회에서 예수님을 정죄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반박한 일화가 있고(7:45-51), 세 번째는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시체를 수습해서 무덤에 장사한 일이 있습니다(19:38-42).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니고데모로 하여금 바리새파 중에서 보기 힘든 양심적인 지도자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본문은 거듭남이라는 천지개벽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사람이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태어난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환골탈태(換骨奪胎)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철이 들면서 보다 나은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 가난에서 부유함으로, 무지에서 지혜롭게, 연약함에서 담대함으로, 무능에서 유능으로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쉽게 달라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대물림한 가난을 부자로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무지나 연약함은 한 번 더 노력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능을 유능으로 바꾸는 것 역시 이미 때가 늦은 듯합니다. 이런 형편의 인간을 대표해서 니고데모가 주님 앞에 나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태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태어나는 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우스갯소리처럼 대답합니다. 이 나이에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갈 수도 또 나올 수도 없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처음부터 그런 방식의 출생을 말씀하신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라고 말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일, 바로 세례예전이었습니다. 세례란 단순히 물속에 들어가거나, 머리에 물을 뿌리는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는 세례식 선언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19-20)는 새로운 탄생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자신의 세례를 기억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새로운 삶이라고 갈파했던 것입니다. 놀랍고도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인 것을 기억하며 사는 한 여러분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니 기를 쓰고 자신을 바꿔보려는 노력이 아니라, 세례의 은총을 기억하는 삶을 삽시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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