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95호(2020. 10. 19. 월요일).
시편 시 107:37-39.
찬송 48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주인의식이 없는 차주님께> 어제 컴퓨터로 뭔가를 하면서, 아니 사실은 뭔가를 하는 척 하면서 당신과 똘이가 하는 얘기를 가만히 좀 들어 봤소. 이제 아빠차가 생길거야. 그런데 아빠 차 생기면 우리 맨 처음 어디를 가볼까? 당신은 그렇게 아주 여러 차례 우리의 차도 아니라, 아빠차라고 말하고 있었고, 엄마 말이라면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 똘이 역시, 자연스럽게 아빠차라고 부르고 있더군. 둘 사이에서 끼어들어서 저걸 바로 교정할까 하다가, 똘이가 잘 알아듣기 힘든 어른들끼리의 이야기일 것 같기도 해서, 그냥 이렇게 메일로 먼저 이야기 하오. 며칠 뒤에 생길 그 차는 아빠차가 아니라, 우리 차이면서 더 정확하게는 당신 차 즉 엄마 차라오. 사실 그동안 능력도 없긴 했지만,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까지 자가용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면 살았소. 당신이 똘이 낳으러 갈 때, 또 똘이랑 세 식구가 택시타고 올 때, 문득 차가 있었으면 좀 더 편하게 오갈 수 있었을 텐데 싶어서, 당신한테 조금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우물우물 넘겼었소. 사실 내 생각만 하자면 택시타기도 어렵지 않고, 출 퇴근 때 지하철이며 버스 마을버스를 타면 되니까, 별로 불편할 게 없었거든. 그런데 언젠가 조금 일찍 퇴근할 때였는데, 당신이 한 손엔 똘이 손을 잡고, 가슴엔 작은 녀석을 매달고, 다른 한 손엔 뭔가를 잔뜩 담은 비닐봉지와 가방까지 겹쳐들고 걷는 모습을 봤거든. 그 때 처음으로 깨닫게 되더군. 차가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거. 항상 두 어린 아이와 함께 인 당신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것을 뒤 늦게야 깨달았던 거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건 우리 온 가족의 차이긴 하지만, 차 주인은 바로 당신이야. 물론 맡겨만 준다면, 내가 세차며 관리 담당도 자원 봉사직을 성심껏 할게. 그러니 똘이에게도, 이젠 “이건 엄마 차” 라고 제대로 알려 줬으면 해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10월 17일 방송>a.
2.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다(20-26절)”을 읽었습니다. 신앙생활의 다른 말이 기도생활입니다. 기독교 신앙생활 역시 기도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모를 리 없는 제가 어느 성경 공부 반에서 “말씀 먼저!”를 얘기했는데, 참석하신 한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기도 먼저!”가 맞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기도를 강조하거나 장려하는 성경말씀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집착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만능으로 치달을 공산(公算)이 크기 때문에 이런 분들을 만나면 참으로 난처하기 짝이 없습니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 역시 기도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불교나 모슬렘은 새벽 2시만 되면 경을 읽기 시작하고, 영험하다는 나무나 바위에는 어김없이 밤새 기도하는 무당들로 성시(成市)를 이룹니다. 자시(子時/23:30-24:30)가 되면 삼신(三神)할미에게 기도를 바치던 저의 할머니는, 부정 타지 말라며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시곤 했는데, 이런 기도생활을 따를 기독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기도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때는 크고 작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특별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잘 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생활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 내용과 목적이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제가 서울로 전근했을 때 교인 중의 한 분은 무당 출신이 있었는데, 죽은 사람을 부르듯 초혼(招魂)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야, 엘리아야”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를 잘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야지, 떼를 쓰듯 억지를 부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남겨질 당신의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출세하고 성공하기만을 바라신 기도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 안에 그리고 주님 안에 거할 수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기는 것보다 더 귀한 소망과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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