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41(2020. 12. 4. 금요일).

시편 시 119:9-12.

찬송 35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정 선배에게> 얼마 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세대별 논쟁이 불붙는 것을 잠깐 지켜봤었지요. 논쟁에 참여하지는 않고 그저 잠자코 서로의 주장을 지켜봤는데도, 마음이 정말 착잡하기 이를 데 없더군요. 20,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지금의 모든 문제들을 만들어 냈거나 방치해온, 개다가 정규직의 자리들을 여태 꿰 차고 있는 386세대 때문에, 자신들이 그 모든 피해를 떠안고 있다고 공격을 했고요. 이른바 386세대 40이후의 세대들은, 문제의 본질을 바라볼 때라고,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 논쟁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는데 가해자는 없고 그저 피해자만 있는 상황이었고, 서로 누가 더 손해를 많이 받는지를 헤아리는 모습이더군요. 그런데 더 쓸쓸한 것은 두 쪽의 주장 모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지요. 살다보면 늘 이렇게 서로 피해자인 사람들끼리,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고 쓰다주는 대신에, 상처 크기를 재보자고 누가 더 크게 상처를 받았는지 따져보자고 나서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깝더라고요.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정 선배 생각을 좀 했습니다. 조기 퇴직을 원하는 사람들은 신청을 하라는 공고가 회사 알림판 에 붙은 뒤로 사무실 온도는 난방이 돌아가고 있음에도 싸늘해져 버렸었지요. 들려오는 말에는 그 와중에 정선배가 제일 먼저 신청을 했다더군요. 이렇게 어색하게 이렇게 쓸쓸하게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던 선배였는데 싶었습니다. 회사에서 더 이상 선배를 볼 수 없는 1월이 되면, 아마 한 동안 회사 초년생 시절일 때처럼, 어디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좀 헤맬 것 같습니다. 어느 곳에 계시건 건강하세요. 지금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소중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이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129일 방송> a.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1-12)”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게 됩니다. “인간 중심의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품게 됩니다. “나는 왜 사는 것일까?” 이런 물음은 인류가 기록을 남기는 시대부터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아브라함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시대적인 차이 등 극복하기 힘든 내용들이 많아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들이 남긴 글을 참고해 볼까 합니다. 톨스토이는 1828-1910에 러시아를 무대로 활동한 시인이며 작가인데, 그는 <세 가지 질문>이란 단편에서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첫째 질문의 답은 지금, 둘째 답은 곁에 있는 사람, 셋째 답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러시아 정교회를 다닌 크리스천이라는 점에서 그의 언행을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왜 사는 것일까?”

   사도는 삶의 의미를 거룩함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거룩함이란 도덕이나 윤리 혹은 철학에서 말하는 지고지순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구별된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말하는 가장 소중한 때인 지금,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 그에게 제구실을 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구별된 삶이라고 말입니다. 이에 비해서 세상 사람들의 삶을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 거룩하지 않은 삶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을 탐욕과 음행이라고 묶었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 중 하나인 자급 목회는, 교회의 사회적 기대에 부응한다는 이유로 본질보다는 비본질에 시간과 여력을 탕진해 버려서, 유급 목회로 고착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의 순수성이 세속적 욕망에 희석되거나 매몰되는 부작용이 곳곳에서 돌출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순수성이 퇴색하게 될 때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입니다. 무소유와 빌 공()을 최상의 신앙 덕목으로 훈련하는 불가의 유명 외국인 스님도 부동산 투기자로 발목이 잡힌 것도 같은 현상일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한참 벗어난 이런 현상은 현대 기독교회가 풀어야 할 시급한 문제일 것입니다. 하늘에 뜻을 품기에는 아직 멀었다 생각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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