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331호(2021. 6. 12. 토요일).
시편 시 10:1-3.
찬송 37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반딧불이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한자 고사성어이지요. 전기불이 없던 시절, 밤이면 반딧불이를 모은 불빛이며 흰 겨울 눈 빛에 책을 비추어가며 공부했다는 일화가 만든 고사 성어입니다. 전깃불이 너무나 흔하고 당연한 요즘으로썬,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일인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이 쓴 글이 생각납니다. 독일은 우리나라보다 흐린 날도 많고 해가 일찍 지는 가을과 겨울이 훨씬 일찍 찾아드는 나라이지요. 그러니 형광등을 켜는 시간도 우리보다 훨씬 길고, 형광등 불빛도 우리보다 훨씬 강할 듯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라고 합니다. 사무실이든 집이든 어지간해서는 형광등을 잘 켜지 않거나, 켜도 낮은 도수의 불빛을 사용합니다. 늘 어둠침침한 기분이지요. 그래서 처음 독일에 간 이들이 크게 애를 먹는 것 중의 하나가, 언어문제 못지않게 어둠침침한 강의실이나 사무실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한국인 아내도 밤이면 거실이나 주방을 오갈 때마다, 자신은 어둡다고 자꾸 형광등을 켭니다. 하지만 독일인 남편은 눈이 부시다고 자꾸 끄지요. 그래서 서로 형광등을 켰다 껐다 반복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한국으로 돌아와서 살 생각이라고 하네요. 그러니 독일인 남편을 밝은 형광등에 적응시킬 생각이라고 합니다. 반딧불이 들만 좋아하는 빛의 색깔이나 농도가 서로 다른 게 아니라, 사람들도 저마다 익숙하거나 좋아하는 불빛이 조금씩 다른 거겠지요. 때론 룸메이트나 아내가 잠잘 때에도 불을 켜놓고 자는 게 습관이어서, 상대방들이 애를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날씨가 더울 땐 눈부신 형광등 불빛 때문에 더 더워지기도 하지요. 그건 마음 속 불빛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너무 밝고 환하기만 한 것도 늘 너무 어둠침침한 것도, 다 마음 안팎의 불편을 가져온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형광등 불빛과 마음의 불빛의 강약을, 특히 더 잘 조절해야 할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6월 14일 방송>b.
2. “모세가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서다(23-33절)”을 읽었습니다. 가끔 철부지처럼 말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나로 하나님을 뵙게 하옵소서!” 라거나, “나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은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와 12지파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모였을 때, 불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왜 우리는 지금 죽어야 합니까?”하고 떨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죽을 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무서운 불길이 그들을 집어 삼킬 듯 하였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뵙는 일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은 매우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무력한 존재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무서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살아남은 백성이 자신들 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에게 담대하게 청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들은 말씀을 자신들에게 전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소극적인 자세 억지로 끌려가는 자세가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는 들을 자세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모든 사람들의 기본자세를 확립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 그것은 단순히 말의 의미만을 듣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 말씀의 중심 뜻을 따라서 생활에 옮긴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른바 맥락적 듣기, 중심점을 찾는 듣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기 보다는 듣기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를 가르치신 선생님들을 보면, 훌륭한 선생님과 그렇지 못한 선생님을 구별할 수가 있었습니다. 들을 수 있도록 들을 귀를 열어주신 선생님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처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줄거리를 외우게 하고, 공식을 잘 적용하도록 가르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선생님들은 그 모든 가르침의 목적이 제정신을 차려서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도록 안내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영어를 가르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인생의 긴 여정에서 기운을 북돋게 하는 용기와 꿈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시인이 되려는 학생이 수학점수가 낙방수준일 때, 그에게 수학의 멍에에서 벗어나 신세계를 달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오덕, 권 정생, 전 영창, 성 내훈, 김 찬국, 문 상희, 원 경선, 장 기려 선생님은 제가 만난 스승님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귀를 열게 하셨고, 암울했던 시대에도 서광이 비치는 미래를 품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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