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387호(2021. 8. 7. 토요일).
시편 시 22:6-8.
찬송 25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힘들 때마다 기대어 위로 받을 수 있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존재란 정말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런 존재란 부모나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처럼 살아있는 사람이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없는 그 누군가여도 좋습니다. 그 누군가의 작품이어도 좋습니다. 어쩌면 더 좋습니다. 원할 때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언제고 펼쳐 들고 읽어보고 들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정작 시인 김수영에게는 그렇게 힘들 때마다,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없었던 거겠지요. 그의 시 <거미>에는 그가 느꼈던 설움이 그대로 배어 있습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김수영 시인의 시에는 이 시 <거미>말고도 서러움 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너무 철저한 자유를 꿈꾸었기 때문에, 늘 서러움이 많았던 걸까요? 그래도 자신의 서러움으로 후대의 철학자와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 그토록 큰 위안과 힘을 주었으니, 그 설움이 위대하게만 느껴집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8월 15일 방송>b.
2. 오늘부터는 마가복음서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른바 참여 시인으로 4.19혁명에 참여하고 군사 독재에 항거한 전력이 있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가장 많이 찾아간 시비가 있다면, 도봉서원과 이웃한 김수영 시비일 것이고, 거기 친필로 새긴 <풀>이 마음을 먹먹하게도 하다 곧 바로 시원하게도 하는 시 때문일 것입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가난하고 바보 같은 그러나 여린 서민들을 풀에 비유하고, 강한 힘을 과시하는 권력층을 바람으로 비유했다고 합니다. 시대는 바뀌었어도 권력자들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고, 목소리는 오만불손합니다. 그 뒤를 떼를 지어 따라다니는 무리들은 잠재적 권력층입니다. 바람 앞에서 꺾여야 하고, 설움을 당해야 하는 우리 이웃들을 누가 어루만지고 위로와 용기 그리고 희망을 줄 수 있을까요? 말구유에 오셔서 평생을 갈릴리 호숫가를 거닐며 함께 웃고 울던 예수님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왜일까요? 이번 올림픽에서 태권도 금메달 8개를 7개국이 나눠가졌다 합니다. 태권도가 영원히 올림픽 주 종목으로 남아야 할 이유입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8개를 8개 나라가 획득했다 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자인 나라에서나 가능한 대부분의 운동경기와 달리 태권도는 가난한 나라에서도 가능한 운동인 때문입니다. 크게 기우러진 운동장에서 벌이는 평화와 화합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해 봐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1-6절)”과 “열 두 제자의 파견(7-13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는 선교 원칙을 오늘도 문자 그대로 따라하는 선교 단체가 있습니다. 카드를 휴대하지 말 것, 찾아간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잘 것, 환영하면 축복을, 박대하면 발의 먼지를 떨 것 등입니다. 제가 시무했던 교회 성도들 중에 그 선교단체를 이수한 분들이 몇 분 있었는데, 이분들이 받는 훈련 코스 중에 선교여행이라는 것이 있는데, 저를 찾아온 분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선교에 도움을 드리고 싶다며, 제가 잘 아는 교회 목사님을 소개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개해 준 목사님 중 한 분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죽는 줄 알았다.”는 내용입니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선교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러 명의 선교훈련생들이 한 주간을 목사님의 교회당에 머무르는데, 끼니마다 먹을 것을 챙겨주는 것은 물론,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결국 가난하고 어려운 교회에 큰 상처를 준 셈이 되었습니다.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부산으로 내려가는 새마을호 기차에서 5년도 지난 옛 지인을 만났습니다. 신학생인 제가 개척교회를 돕게 되었는데, 6개월이 되도록 교인 한 명도 늘지 않아서, <토요노래회>라는 프로그램을 열었습니다. 제가 기타를 치고 팝송이나 동요 명곡들을 함께 부르는 모임인데, 보통 50-70명이 모였습니다. 전도를 위해 연 프로그램이었지만, 억지로 전도해선 안 된다는 게 제 소신이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를 섬기는 동안에는 몇 분이 교우로 등록했을 뿐 큰 성과를 내지 못했는데, 기차에서 만난 그분은 밝은 심성 때문인지 가끔 교회 얘기를 꺼내기만 할 뿐 나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서울의 한 큰 교회에서 구역장이 되어 출석중이라는 얘기였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얘기를 하였는데, 결혼 후 이사 간 달동네의 한 크리스천의 도움이었습니다. 냉장고며 세탁기를 언제든 쓰게 했고, 때로는 어린 아이도 맡아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분이 어느 날 교회 가자고 권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더라는 말입니다. 훗날 저는 마음을 감동 감화시키는 성령님의 전도방법이라고 명명(命名)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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