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11호(2021. 8. 31. 화요일).
시편 시 27:4-6.
찬송 50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손 홍규 시인이 객원 연구원으로 터키의 앙카라 대학에 갔을 때 얘기입니다. 한국어 문학과가 있는 대학이었지요. 그런데 가서보니 도시 안카라는 하지만 스펠도 ANKARA 터키어 발음 안카라 이었습니다. 시인은 한국어 문학과 터키인 전임 강사에게 물었습니다. “안카라를 한국인들은 왜 앙카라로 발음할까요?” 터키인 전임강사는 자신도 모르겠다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안카라의 옛 이름이 안고라였는데, 영어식으로는 앙고라였다. 그러니 안카라 역시 앙카라가 된 게 아닐까? 그러자 시인은 터키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앞으로는 앙카라가 아닌 안카라로 부르겠다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안카라의 닷새째 풍경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산을 점령한 빈민촌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그보다 더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갈탄을 때는 연기가 어두운 하늘로 치솟는다. 그러나 터키어로 자미라 일컫는 이슬람 사원에서, 하루에 다섯 번씩 울려 퍼지는 애잔, 기도 시간을 애잔 소리만은 척박하지만 뜨거운 사람들이 사는 이 도시를 차별 없이 뒤덮는다. 하지만 거리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기란 어렵다. 기도용 깔개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 노인들은 시골에 가야 볼 수 있다고 한다. 자신도 하루에 다섯 번의 기도를 잘 지키지 않는다며 터키인인 일심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일하는 것이 기도지요. 이곳은 도시잖아요.” 도시에서는 일하는 것이 기도라는 말, 참 상반된 의미가 느껴집니다. 도시에서의 일이란 고요한 기도를 못하게 할 만큼 분주하고 각박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도를,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게 일이기도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8월 22일 방송>a.
2. “예수의 권한에 대한질문(27-33절)”과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12:1-12)”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우리말에 “물에 빠진 놈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저는 사람이란 제 것에 대한 소유욕을 감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 뿐인 생명을 구해 주었으면 감사인사로 며칠을 보내도 모자랄 판에, 살아나자마자 보따리부터 챙기는 그 심사가 괘씸한 때문입니다. 논어 술이 편에 나오는 글귀로 평생 간직하는 금언이 있습니다. “반소사 음수 곡굉이 침지 낙역재기중”이 그 말입니다. 그 의미는 나물먹고 맹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 베게하고 잘지라도, 기쁨과 즐거움이 그 가운데 있다는 뜻입니다. 거친 반찬과 맹물 한 그릇, 제 팔을 구부려 베개하고 잠을 자는데 무슨 기쁨과 즐거움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어진 소박한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는 삶 속에 즐거움이 있다는 철학적인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르는 데서 온갖 불행이 출발하고 있는 것을 깨우쳐야 하는데, 아직도 그에 이르려면 하세월(何歲月)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인생을 보란 듯 살고 싶어 하는 보통의 사람들의 마음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옛 속담에 “말 타면 견마(牽馬)잡히고 싶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욕심이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에는 주님께서 이른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하셨는데, 남의 포도원에서 이런저런 잡일을 보던 소작인이 있었는데,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일정한 임대료를 내면서 포도원을 관리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자 이 소작인이 욕심이 생겨서,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예 주인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뺏을 궁리를 한 것입니다. 이를 알게 된 주인이 그 소작인을 죽이고 다른 사람에게 맡길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이 떠오르는 얘기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이런 모양새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그랬고, 아론이 그랬으며 사울과 다윗 그리고 솔로몬도 그랬습니다. 본래 그들은 말잡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택함을 받자 하나님의 권위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처럼 군림하고 싶어 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도진개진(도긴개긴)입니다. 크게 달라지기는커녕 도토리 키 재기라고 하겠습니다. 개구리 올챙잇적 모른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평생 종으로 살라거나, 가난뱅이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옛날을 기억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아담이 하나님 자리를 넘볼 수 있으며, 어떻게 다윗이 남의 아내를 넘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빤히 바라보고 계시는데 말입니다. 오늘도 제 분수를 지키려 애 좀 쓰십시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거짓되고 위선적인 것. / 막 12:28-34. (0) | 2021.09.02 |
---|---|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는 새 세상. / 막 12:13-27. (0) | 2021.09.01 |
내 뜻 보다는 하나님 뜻을 살필 것. / 막 11:12-26. (0) | 2021.08.30 |
오늘날에도 반드시 사용해야 할 용어, “호산나!” / 막 11:1-11. (0) | 2021.08.28 |
우리의 믿음, 그 현주소. / 막 10:46-52. (0) | 2021.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