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12호(2021. 9. 1. 수요일).
시편 시 27:7-9.
찬송 2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잡지 에디터인 기낙경의 글에 나오는 한 마디입니다. “조르주 모란디는 같은 사물을 같은 방에서 거듭거듭 그러나 한 번의 반복도 없이 그려낸다. 그것은 한 곳에서 오래 그리고 홀로 정주해 본 자만이 얻어내는 일종의 득도의 미이다.” 이 한마디에 물들어 봅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가을이 느껴지면, 꼭 몇 번이고 다시 펼쳐보는 화집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주 모란디의 화집인데요. 벌써 몇 년 째 계속해 오는 습관인지. 이젠 책꽂이에서 화집을 꺼내려는 순간 벌써 모든 그림들이 한 눈에 다 들어오는 전시회장 입구에 들어선 듯, 화집안의 모든 그림들이 전부다 환하게 떠오를 정도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모든 작품들이 다 한 눈에 떠올라도, 모란디의 그림들에선 결코 많다거나 과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그림들에서는 점점 더 많은 작품들을 보면 볼수록, 점점 더 단순하고 정갈하게 비워져 가고 넓어져 가는 시간과 공간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여러 개의 짐들을 버려가면서 점점 더 정갈하고 소박한 산사의 방이나 수도원의 방으로 옮겨가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느낌은 괜한 게 아닐 겁니다. 모란디의 삶 자체가 그랬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예술가는 정확히 그들이 살았던 만큼의 작품을 쓰거나 그린다는 말에, 모란디 처럼 잘 들어맞는 화가도 없을 겁니다. 그만큼 작품과 인생 사이에 멀리 동떨어진 거리감이나 이질감이 없는, 순수하고 정직한 화가도 없을 겁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5년 9월 1일 방송>a.
2. “카이사르 것은 카이사르에게(13-17절)”과 “부활에 대한 토론(18-27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사후(死後) 세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반박할 뚜렷한 자료가 부족하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멋대로 떠들어댑니다. 한국 교회 부흥사들이 요한 계시록을 단골 소재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부분이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특징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 사후 세계가 있다면 아마도 엉망진창이 될 것이라면서 일곱 형제의 얘기를 꺼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첫 아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둘째 아들이 형수와 관계를 맺어 형의 아들을 낳아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아들까지 첫 형수와 관계를 맺어 첫 형의 아들을 낳아주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아무튼 그러다 모두 죽어 천국에서 만났다고 할 때, 그 첫 형수는 일곱 형제 중 누구의 아내로 만날 것이냐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지금도 아랍 문화권에서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는 수혼법(Levirate Law)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천국에서는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천사들처럼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땅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신세계가 열린 것을 오해하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사후 세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고,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데, 그 의미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죽은 자, 혹은 산 자라는 말은 육신처럼 살고 죽는 그런 존재의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될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근대 한국사에서 기독교회가 박해를 받은 이유 중 하나가, 애비나 자식이 모두 같은 분을 아버지라고 부르니 상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혈통적 하나님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차제에 우리는 땅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하늘 질서를 향해 열린 마음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생에도 지금의 남편을 사랑하시겠습니까?” 같은 우문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모시고 모든 인류가 형제와 자매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더 이상 수혼법과 같은 어리석은 율법에 얽혀서 쓸데없는 마음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 세계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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