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08호(2021. 8. 28. 토요일).
시편 시 26:5-9.
찬송 13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산문집 <비>에는 당연히 비에 관한 정의와 비유 묘사가 가득합니다. 가령 비는 여행이라면서, 비가 기차처럼 역으로 들어온다고 묘사하기도 했지요. 그런가하면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 70%도 물, 사람의 몸의 70%도 물이지요. 그러니 지구나 사람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 즉 비에도 형제자매처럼 이끌린다고도 썼습니다. 가족이 재회하듯이 비를 반긴다고도 썼지요. 그런데 비에 관한 마르탱 빠주의 묘사들을 읽다보니, 문득 우리 몸에서도 하늘처럼 때때로 비가 내리는 게 아닐까 그리고 눈물이 바로 비가 아닐까 싶어집니다. 때론 역으로 기차가 들어오듯, 혹은 형제자매나 가족과 재회하듯 흘러내리면서, 우리 마음속에 깃든 서정과 감성을 촉촉하게 일깨워주는 비가 바로 눈물이 아닐까. 그런 눈물을 우리는 주로 슬플 때 흘리지요. 하지만 기쁠 때도 흘립니다. 그리고 두 가지 감정이 다 뒤섞인 채, 만감이 교차할 때도 흘립니다. 이왕이면 오늘은 그 중에서도 너무나 그리웠던 가족과 재회하는 듯, 기쁨의 눈물을 한껏 쏟았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서, 오늘은 마르탱 빠주의 산문집 <비> 속의 한마디 “우리의 혹성처럼 우리의 몸도 물 70%를 함유하고 있다. 우리 내부의 물방울들은 자력의 원리에 따라 하늘에서 떨어진 자매들에 이끌린다. 따라서 우리의 만남은 가족 간의 재회이다.” 이 한 마디에 물들어 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5년 8월 14일 방송>b.
2. “예루살렘 입성(1-11절)”을 읽었습니다. 박태준 작곡의 <오빠 생각>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 중에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라는 게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르던 1950년대의 저 역시 서울에 대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비단구두를 신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생각은 이스라엘의 갈릴리 시골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제자들에게는 막연하지만 상상할 수 없는 환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들 제자들에게 수천 명의 사람들을 몰고 다니던 당대 최고의 인기인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서울로 가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뭔가 엄청난 희망을 가져도 좋을 그런 타이밍이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역시 이들과는 전혀 다른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썩어빠진 정치가들과 허울뿐인 종교가들에 염증을 느낀 소시민들로, 로마의 식민통치에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제대로 이끌어 줄 정직하고 헌신적인 영웅의 출현을 기대했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 인물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희망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일단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희망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의욕도 없이 퀭한 눈으로 먼 산을 쳐다보는 사람들 말입니다. 제가 목회할 때 한 권사님이 계셨는데,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주 잘 잡수시고, 당신의 모친보다는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제게 자랑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혼자 식사를 해결하는 것이 힘들어서 요양원에 들어가셨습니다. 은퇴하신 의사선생님도 계시고 자격증을 가진 간호사도 있다 했습니다. 10명 남짓한 큰 방에 두 분의 요양사가 상주하며 돌봐주신다 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후에 하루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은 방문을 쳐다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이나 교우들이 문병을 오는 것을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을 기다리는 일, 그것도 반가운 마음으로 만나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라, 지극한 의무감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 말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던 예루살렘 시민들 그 중에서도 정말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나무 가지를 흔들며 소리칩니다. “호산나, 호산나!”하고 말입니다. 아람어로 “부디 도와주십시오.” 또는 “우리를 살려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희망은 자신들의 삶을 구원해 줄 메시야 곧 구원자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부모는 자신의 어린 아이만이라도 살리려고 철조망 너머 군인에게 아이를 건넸습니다. 호산나라는 용어는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그리고 매우 중요한 말로 사용되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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