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27호(2021. 9. 16. 목요일).
시편 시 31:5-8.
찬송 13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청소부 밥]은 처음 대화를 시작한 젊은 사장에게, 자신의 말들을 애써 기억하지 말라고 합니다. 1분 1초를 다투는 일에 지친 사장에게는, 자신의 말이 잘 들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서는 차를 권했습니다. 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장은 차를 마시며 셔츠 단추 하나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청소부 밥이 전해 준 종이를 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첫 번째 지쳤을 때는 재충전하라.” 그리고 이런 조언도 합니다. “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몸도 에너지가 떨어지면 멈추어 버린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맞는 재충전 방법을 찾았다.” 퇴근 후나 시간이 나면 가볍게 산책하기, 책, 잡지 등을 읽으면서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기 같은 실천하기 쉬운 거였습니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장과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청소부 밥은, 인생이란 오래 담가 둘수록 깊은 맛이 울어나는 차와 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만남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효과를 기대하기보다, 천천히 깊은 맛을 우려내기를 그는 바라고 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8월 31일 방송> b.
2. “가시관을 쓰신 예수(16-20절)”을 읽었습니다. 은퇴를 하고나서 제일 먼저 달라진 것은 모자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집안 내력이라 불가항력인 문제로 모발이 부쩍 빠진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계절별로 그리고 등산용으로 몇 개의 모자를 구비해 두고 번갈아 사용합니다. 이렇듯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 쓰는 모자도 있지만, 멋을 내기위해서 그리고 명예를 한껏 뽐내기 위해서 쓰는 모자도 있습니다. 학위 모자가 그렇고 마라톤의 우승자가 쓰는 월계수관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처럼 가시관이라는 게 있습니다. 가시나무로 역어 만든 관으로, 벗겨지지 않도록 씌우려면 자연히 가시가 두피와 이마의 살을 파고들어 피를 흘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가시관을 씌웠다고 하는 것은 그를 모욕하고 수치를 주려는 목적이 분명한 것입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께 죄인에게 입히는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운 후에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치게 하고 경례를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갈대로 머리를 치고, 침을 뱉었으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는데, 할 수 있는 모든 조롱과 수치를 안겨드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서 끌고 나갔던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 주님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존감까지 다 빼앗기고 가장 굴욕적이고 비참하게 유린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이런 포악하고 잔인한 인간성을 종식하고, 본래의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마지막 행동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가시관을 쓰신 예수상을 그린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로 “르네상스 시대에서는 그려지지 않은 주제 중 하나가 가시관을 쓰신 예수였습니다. 아름답고 이상적인 그림을 추구하는 르네상스 회화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표현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셨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묘사했지만 카라치는 예수님께서 가시관 쓰시는 고통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천사들을 추가로 등장시켰다. 가시관을 쓰신 채 피를 흘리는 예수님의 표정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그분은 온 몸은 이상화 된 몸이 아니라 채찍을 맞고 가시관에 찔려 피가 흐르는 고통에 지쳐 있는 축 쳐진 몸이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부축하고 있는 천사들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넋을 잃고 하늘과 관람자들을 보고 있는데, 관람자들이 천사들의 표정을 보면 그 슬픔에 금방이라도 동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크 미술은 사실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장면을 통해 관람자가 그림을 실제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처럼 느끼게 하면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6년 동안 학부와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학교 학생회관 기도실 골방에 걸려있던 십자가상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신 주님의 그림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가장 큰 행운이었습니다. 30분 동안 그 그림을 응시하고 나오는 제 마음에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가시면류관을 쓰신 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의 힘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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