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25호(2021. 9. 14. 화요일).
시편 시 30:10-12.
찬송 31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10살 난 아들이 있다는 걸 안 박사는, 아이를 혼자 두지 말고 박사의 집으로 데려오라고 합니다. 아이를 만나자 아이의 머리가 평평하니 루트 기호를 닮았다면서,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주며 말하지요. “루트를 사용하면 무한한 숫자나 눈에 보이지 않는 숫자에도 번듯한 신분을 줄 수가 있지.”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아이에게, 박사는 따뜻한 사랑을 줍니다. 박사를 통해서 나와 아이는 아름다운 수의 세계와 사랑을 배워갔지요. 숫자를 통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인생의 법칙을 발견해 갔던 박사. 결국 박사는 병이 깊어져서 요양원에 갑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박사에게 이런 소식을 전합니다. “루트가 중학교 교사 시험에 합격했어요. 내년 봄부터는 수학 선생님입니다.” 박사는 몸을 쑥 내밀어 루트를 껴안으려고 합니다. 들어 올린 팔은 가냘프고 힘이 없어서 부들부들 떨립니다. 루트는 그 팔을 잡고 박사의 어깨를 껴 않습니다. 그리고 박사는 행복한 수의 나라,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납니다. 다만 80분의 시간밖엔 기억을 못하지만, 80분이 지나면 다 스러지고 마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만큼은 완전히 사람을 사랑할 줄 하는 박사. 소수를 사랑하고 함께 더불어 완전한 수가 되는 수식을 사랑한 박사. 그 박사로 인해서 외로운 아이와 미혼모가, 아름다운 수식과 같은 사랑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함께한 시간의 길이에 있지 않을 겁니다.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다면, 80분이 80년보다 더 영원할 수도 있을 겁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년 8월 30일 방송> b.
2.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66-72절)”을 읽었습니다. 우리 말에는 세 번이라는 말에 대해서 특별히 강조하곤 합니다. “이번이 마지막 세 번째야. 알아서 하라고.”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 번은 유대인들도 흔하게 쓰는 강조어이기도 합니다. 발락의 원수를 저주하는 대신 세 번이나 축복한 발람(민 24:10), 사무엘을 세 번 부르신 하나님(삼상 3:8), 다니엘이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한 일(단 6:10), 부활하신 주님께서 요한에게 세 번째 부탁하신 말씀(요 21:17) 등등 많습니다. 그러니까 세 번 축복했다는 말은 할 수 있는 축복을 다 했다는 말이며, 세 번 부르셨다는 말은 마지막까지 부르셨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다는 말은 끝까지 부인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어쩌다 겁에 질려서 헛소리로 주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끝까지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본문에는 등장인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처음과 두 번째는 제사장의 몸종과 같은 한 여인에게 부인하였고, 세 번째는 불을 쬐며 구경하던 한 이름 없는 사내에게 부인하였습니다. 모처럼 꿈을 꾸었습니다. 장소는 제가 사는 아산 집 뒷산이었고, 시간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 땔감으로 쓰던 60년대였습니다. 나무 가지를 긁어모으고 있는데, 벌목을 방지하기 위해 지키던 감독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불법 벌목이라며 저를 영림서로 가자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죽은 지 오래된 나뭇가지만을 잘랐던 것인데, 아무리 변명을 해도 도통 들어줄 기미가 없었습니다. 땀에 흠뻑 젖어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꿈에서 깨지 않았다면 영림서에 끌려가 벌금을 물었을 것입니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교회당 지붕 용마루에 장탉이 홰를 칠 듯한 몸짓으로 앉아 있는 조각을 보셨을 것입니다. 무심코 지나치셨다면, 고속도로를 지나가면서 서초동 어느 성당 지붕에 있는 장탉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지 마시라는 경고 조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라고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다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기독자라는 사람들이 매일 매순가 너무도 자주 주님을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에 세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을 주님을 부인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아산 마을에 살기 시작했을 때, 처음 시도한 일이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라는 이유로 실패하였습니다. 예수쟁이들은 거짓말에 욕심꾸러기에 얌체들이라는 편견이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목사라고 제 소개를 주저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혀 아닙니다만, 아직도 기독교인에 대한 색안경은 여전합니다. 주님을 부인해온 인과응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일에 가장 비협조적인 사람들 역시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마을 문제로 인감증명을 시청에서 요구할 때, 끝까지 반대하고 고집을 피운 사람도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인감사용 란에 명기한 대로만 사용한다고 설득해도 먹혀들지 않은 사람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몇 번이고 협력을 부탁했지만 끝끝내 거부했던 사람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감증명서를 떼 오느라 수고했다고 교통비로 나온 5만원은 앞을 다투어 수령하던 사람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체면도 없는 불통의 대명사였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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