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678호(2022. 5. 25. 수요일).
시편 시 77:19-20.
찬송 72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날은 빨라서 봄은 갑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꽃은 떨어지고 님은 탄식하는 계절, 봄이 서서히 지고 있습니다. 김소월 시 김형주 곡 <첫 치마>는, 지는 봄을 바라보면서 갓 시집온 새색시가 울고 있다는 그러한 내용이지요. 첫 치마는 시집올 때 입고 온 치마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 치마를 아직도 입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갓 시집 온 새색시라는 뜻이겠지요. 그 색시가 속절없이 울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온, 그렇게 시집 온 때문일까요? 아니면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동안 꽃처럼 속절없이 지는 청춘 때문일까요?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분명 내면의 슬픔 때문에 울고 있습니다.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도 끝내는 속절없이 지고 마는 생명의 원리가, 시안에 들어 있다고 평하고 있더군요. 지는 꽃과 가는 봄을 운다는 시인의 목소리 안에는, 봄꽃처럼 지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봄은 가나니 저문 날에, 꽃은 지나니 저문 봄에. 속없이 우나니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나니 가는 봄을. 꽃 지니 잎 진 가지를 잡고, 미친 듯 우나니. 해 다지고 저문 봄에, 허리에도 감은 첫 치마를 눈물로 함빡히 쥐어짜며. 속없이 우노나 지는 꽃을. 속없이 느끼노나 가는 봄을.” 시보다 곡이 조금 더 담백하게 표현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작곡가 김형주 선생은 사색시의 슬픔을 한번 걸러내서 인생의 깊은 의미로 승화시키고 싶었다고 하네요. 피고 지는 꽃처럼 태어나면 떠나는 생명의 원리를 곡에 더하기 위해서 애썼다고 하는데요. 1975년 발표된 곡입니다.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가곡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5월 26일 방송>
2. “십분의 일세(30-34절)”을 읽었습니다. 이른바 십일조에 관한 말씀으로 오랫동안 논란이 되는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십일조에 관한 말씀이 아브라함 때부터 나오는 등 결코 작은 양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와서도 변함없이 중요한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율법시대가 지난 은총의 시대라는 논리로 십일조 자체를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십일조에 관해서 만이 아니라,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전적(integrity)으로 이해할 필요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한 때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롬 10:4)이란 한 구절 때문에, 더 이상 율법에 종노릇할 필요가 없다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영지주의자들의 교부라 할 마르키온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율법은 필요 없다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문자적인 해석입니까? 흔히들 구약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반해 신약은 그 약속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서가 그 사실을 잘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둘을 제대로 이해하는 통전적인 방법을 십이분 찾아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오늘의 본문은 십일조가 무엇인지와 하나님께 당연히 드릴 의무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지 일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릴 성물이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은총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사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인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른 성경해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보다는 비본질적인 문제로 늘 골머리를 쓰고 있다는 점이, 오늘 본문에서도 예외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십일조의 올바른 이해와 실천보다는, 신앙생활의 기본을 마치 주일 성수와 십일조와 같은 것으로 율법 화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속적인 복을 넘치도록 받을 수 있다는 기복신앙으로 이끄는데 문제가 있다 하겠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모든 것들(일터와 기회 그리고 모든 선한 관계들 등)을 잘 사용한 후에, 그것에 감사하여 그 소득의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원리를 실천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겠는데, 여기서 엉뚱하게도 교회 운영이나 목회의 성공 기준으로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십일조의 용처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돕는데 사용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오늘 날 목회자들의 생활비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일 수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의 바로미터로 둔갑하고 있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주일 성수나 십일조 생활 그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성경의 정신은 매우 훌륭한 때문입니다. 다만 십일조의 용처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 재정의 투명성에 대해서 교회가 진실하지 못한 점이나, 훨씬 더 열악한 가난한 교회들이나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데 대해서 반성하고 바람직한 내규나 정관 등을 통해서 건전하게 관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의 말씀을 홀대하는 것이나, 무력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올바른 헌금정신과 실천 그리고 투명한 관리에 주목하고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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