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793(2022. 9. 17. 토요일).

시편 시 99:1-3.

찬송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시에 다른 선율을 붙이는 곡은 수없이 많습니다만, 같은 곡에 여러 시를 붙이는 일은 드물지요. 일전에 정지용 시 채동선 곡 고향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는 같은 곡의 이은상 선생의 시를 붙인 <그리워> 준비했습니다. 특히 이 곡은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후 개사된, 조금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가곡이지요.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 님은 아니 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그 대 가슴엔 내가 내 가슴엔 그대가/ 그것만 지니고 가자구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매다 가네

   작곡가가 독일 유학 당시 구상을 해서, 귀국 후에 완성한 곡입니다. 나라 잃은 설움을 되씹으며, 조국을 멀리 떠나 간절했던 망향의 정을 새기며 작곡한 곡이지요. 원래는 정지용 시인의 시 <망향>에 선생이 곡을 붙여 알려진 곡입니다. 그런데 시인이 납북으로 노래가 금지곡으로 묶이자 작곡가는 박화목 시인에게 개사(改詞)를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동안 <고향>으로 불리던 곡이 가곡 <그리워>가 된 사연은 유족들의 요청 때문이었지요. 1966년 이은상 시인의 시로 바뀌어 오늘날의 곡이 됐습니다. 그리움의 대상을 조국으로 불러도 될 수 있겠습니다만, 또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시지요. 그리움이 사무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그런 시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917일 방송>

 

2.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는 욥(1-26)”을 읽었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 아니 극심한 고통가운데 허우적거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제 주변 가까운 사람들은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 희생양을 만드는 것으로 그 분노와 아픔을 풀어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술주정뱅이 남편을 만난 때문이라거나, 시대를 잘못 만난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에게로 화살을 돌리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자식을 잘못 두어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분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자주하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보다 훨씬 더 게으르고 잘못 살고 있는 사람도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렇지 못한 자기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범주에 들지 않습니까?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대결은 우리들 인간을 대표한 욥이 등장하고 있고, 그가 겪는 온갖 시련을 통해서 누군가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희생양으로 삼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한 인생의 삶을 두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잔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얘기라는 점에서 자세를 곧추세우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고난과 시련이란 하나님에게 그 원인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끔찍한 고통을 당하던 욥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오랜 생각 끝에 입 밖으로 내 뱉은 말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으면 좋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나는 날에, 어머니의 태중에서 죽게 되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날이 저주받은 날이었기를 되풀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는 말은 자신의 부모를 원망하는 의미이며, 한 단계 더 올라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사탄의 겨루기는 사탄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습니다. 더 없이 확고한 야훼 하나님 신앙을 가진 욥이었지만, 그에게 몰아닥친 극심한 고통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욥의 경우만이 아니라, 우리들 역시도 이보다 훨씬 더 약한 시련에도 하나님을 원망하며 신앙의 길에서 떠나곤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갈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을 놓아주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시련과 역경은 물론이고, 우리들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기만 해도,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돌아서기를 잘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련의 시절이 지나간 후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되돌아보았을 때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때까지도 우리를 붙잡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신비롭기까지 한 사실이 바로 <발자국/Foot print>라는 시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린 후에도, 하나님의 발자국은 끝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지요.

 

3. 오늘은 묵상식구 박진철 집사님께서 따님을 시집보내신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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