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01호(2023. 7. 22. 토요일).
시편 시 6:1-3.
찬송 44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희망이나 행운을 상징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지개나 네잎 클로버, 흰 사슴 같은 것들인데요. 이처럼 좋은 징조로 여겨지는 것들은 자주 보거나 만나기가 힘든 귀한 존재지요. 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잠시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들 말입니다. 아마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존재에 더 큰 의미를 둘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요. 어쩌면 희망이나 행복을 기대하는 것 역시도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큰 의미 없이 지나가는 날이나 불행한 날들에 비해서, 행복한 날이 훨씬 더 귀하고 드물기 때문에, 더 깊은 의미를 두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멀리 떨어져서야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무지개의 존재처럼 말입니다.
“비 개인 오후 무지개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네. 사랑했던 그 사람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안녕하신지. 앞 산 너머 무지개를 바라보며, 사랑의 추억들을 떠올리네. 사랑했던 그 사람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안녕하신지. 단 하나의 사람을 위하여 아낌없이 몸을 던지던, 저 무지개같이 찬란한 나의 젊은 날의 꿈이여. 목숨 같은 사랑을 위하여 눈물로 피어온 대지의 꽃들이여. 저 추억 속의 무지개가 지나간 후에, 이제야 그대 눈물의,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되었네. 사랑했던 그 사람은, 사랑했던 그 사람은 안녕하신지.”
가지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은,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시인과 작곡가는 바로 그 아련한 마음을 무지개의 존재에 비유했지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더 없이 영롱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내 앞에 있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그 때를 추억하면서 말입니다. 누구에게나 지난 추억은 무지개와 같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마음에 담고 있는 그 추억을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참 아름다웠었다.” 눈감고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러한 존재 말입니다. 차길준 시 임준희 곡 <무지개>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7월 23일 방송>
2.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2(32-43절)”을 읽었습니다. 저도 해골이라는 불리는 언덕을 찾은 적이 있었는데(79, 8), 화산재에서 나온 것인지 기괴한 돌들이 많았습니다. 책장을 눌러줄 돌로 한 개만이라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불법을 감행(?)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음산했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좌 우 양편에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도들 사이에 주님을 세운 것은 주님을 모욕주기엔 충분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십자가상에서 하신 일곱 말씀(架上七言) 중 첫째 말씀과(34절), 둘째 말씀이(43절)이 있습니다. 용서를 비는 말씀이었고, 믿음으로 구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들입니다. 죽어가는 순간에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할까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교우 두 분의 경우인데, 한 분은 조금만이라도 살고 싶다 애원하는 말씀이셨고, 다른 한분은 쉬고 싶다며 그간의 저의 수고에 감사인사를 하셨습니다. 다양하다는 뜻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생명에 집착하는 인간다운 모습이며, 신앙의 삶을 정리하듯 정중하고 품위 있는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용서의 기도를 올리신 것입니다. 너무 감격해서 가슴이 먹먹해 지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저주를 일삼고 끝내는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마음속에는 그들을 하나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지 못한 아쉬움을 표현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정신이어야 합니다. 불교도든 이슬람교도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정상인이든 비정상 인이든 모두가 주님이 사랑으로 품으셨던 인생들이라고 말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크게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편 가르기를 잘 하는 것이 정통신앙이라 주장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의 뿌리는 예수정신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대해서는 일찍이 십자가상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갑론을박 중입니다. 한쪽 강도는 조롱과 비난조로 입을 엽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청을 노랫말로 만든 것이 <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 to your kingdom> 이라는 노래인데, 제가 한동안은 이 노래를 어린 아이들이 설교를 들으러 제단 앞으로 나왔을 때 가르쳤던 노래입니다. 그 강도가 부럽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한(惡漢)이 갑자기 회개할 수가 있을까요? 그는 준비된 회개자였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나 공안사범을 다루는 경찰부서에는, 자발적으로 구성된 신앙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모일 때마다 불우한 학생들을 돕는 헌금을 모아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준비된 회개자들의 일면목일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예수 공로가 아닌 자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이 강도처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 나라에 임하실 때, 이 죄인을 기억해 달라고 말입니다. 진심을 다해 그리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간곡하게 부탁을 드립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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