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72호(2024. 1. 9. 화요일).
시편 시 38: 15-18.
찬송 7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언가를 바라고 기다리는 마음 때문에, 우리의 현재는 괴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것으로 많은 것들이 충족된다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미래라는 것을 위해서 이렇게 현재를 희생하며 살지는 않겠지요. 그렇지만 진짜가 될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한다는 생각부터가 어쩌면 과한 욕심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내 발을 딛고 있는 땅을 내려다보지는 않을 겁니다. 길게 목을 늘이고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고 걸어 나가겠지요.
“해와 달이 흐르듯 내 가슴도 흐르네/ 꿈을 꾸듯 환한 미소 지으며/ 높고 푸른 산과 들을 돌고 돌아서/ 우는 듯 모르게 찾아올 그대여/ 애타게 기다리는 황홀한 그대여/ 그토록 기다리는 황홀한 그대여/ 지금쯤 어디쯤 오고 있을까?/ 지금쯤 어디쯤 오고 있을까?/ 내가 기다리는 황홀한 그대여/ 그토록 기다리는 황홀한 그대여/ 지금쯤 어디쯤 오고 있을까?/ 지금쯤 어디쯤 오고 있을까?”
대상을 알 수 없는 절절한 마음, 그 간절한 기다림이 곡의 분위기를 통해 느껴집니다. 시인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기다리고 있는 그 무언가를 우리가 마음속으로 원하고 바라는 모든 것이라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명예나 지위 우리가 지금 바라는 것은 어떠한 것이든, 시인이 글 안에 지칭한 그대가 될 수 있다고 했지요. 지금 여러분께서 가장 원하는 단 하나, 가장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김 명희 시 이 한삼 곡 <그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년 1월 8일 방송>
2. “만방이 야훼께로 돌아오다(14-19절)”을 읽었습니다. 유대교나 기독교 신앙의 한복판에는 유일무이한 신 야훼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기둥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첫째 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가 흔들리면 다른 모든 계명이 흔들린다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모든 민족이나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들만의 신이 이미 존재했었다는 것으로, 그런 기존의 신을 버리고 야훼 하나님 신앙으로 갈아타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뿌리를 뽑지 못하는 것이 민간신앙인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중국이나 몽골 그리고 베트남에는 강력한 정신적 지도자로 무당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무당과 같은 존재들은 무식한 촌로들에게만이 아니라 최고의 지식인과 권력자들에게도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금 똑똑히 바라보고 있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오랜 전통과 절대적 정신적 배경을 가진 민간신앙은 아니라 해도, 현실적인 삶을 유지하게 하는 힘들, 가령 물질이나 자녀 그리고 지연이나 학연 등의 뒷배를 신처럼 의지하는 현실적인 우상들이 사람들의 삶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이나 자녀를 신처럼 섬기는 것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살고 있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이 우상인 것은 우선순위에서 항상 최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예언자에게 들려준 야훼 하나님의 신탁은, 하늘을 창조하고, 땅을 단단하게 다지시며,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세상을 만드신 분이 유일하게 야훼시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등학생 시절만 해도 저는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우렸습니다. 인체의 신비에 대해서 말하는 의사들의 견해를 통해서, 광활한 우주를 설명하는 과학자들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한낱 100년을 살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을 증명해 보려고 생각했다는 것부터가 난센스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몇 차례 대형 화물차에 들이 박힐 뻔한 경험이나,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원균을 피해서 줄타기 하던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임을 깨우친 것입니다. 이른바 이성이나 논리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육신과 정신이 건강하다고 자신할 때였던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찾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 가진 사람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 누구나 막론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대자에 대한 저마다의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나는 야훼다. 누가 또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나는 옳은 말만 한다. 이루어질 일만 말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야훼 하나님처럼 당당한 절대자를 믿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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