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13(2024. 5. 29. 수요일).

시편 시 68:19-21.

찬송 53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누리 교수는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pp.31-35에서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를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대해서 매우 슬퍼하고 절망하기까지 합니다. 더구나 광장에서 일상으로 연결되어야 할 민주주의가 따로 국밥처럼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인들은 이를 두고 멋진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고 환호하는 것을, 못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개탄합니다. 광화문에 모이면 별 볼일 없던 개인도 뭐나 된 듯한 우쭐함이 목소리를 내지릅니다. 저는 이런 모습을 우리 개신교회의 부흥회에서 오랫동안 보아왔습니다. 눈물 콧물 흘리는 것조차 부끄러워하지 않고 목청을 돋우어 회개하고 또 찬양하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한국사회가 크게 변화할 것을 기대했었는데, 교회당을 나오는 순간 그 모든 결심과 각오는 싹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박성완, 24. 5. 28.

 

2. “이 세대를 비유로 말씀하심(16-19)”저주받은 도시(20-2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깨우침이라는 용어는 종교에서나 일생생활에서나 매우 중요한 단어라 하겠습니다. 그 깨우침으로 인해서 한 개인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하고, 일생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세례자 요한을 염두에 두고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어떤 시대사조에 대한 현상적/現象的인 깨우침만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밖으로 드러난 어떤 통찰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본문에서 지적하듯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는 이가 없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며 우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금식을 하자 아예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하면 이번엔 인자가 세리와 죄인의 연회에 참석 같이 먹고 마시니 아예 세리와 죄인의 친구 짓을 한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소위 유대인 중 지식인이요, 학자요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리는 현상만을 바라보고, 설레발을 치고 있을 뿐, 그 현상의 깊은 중심점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유튜브라는 매체에서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논객들이 나와서 세상의 흐름을 그 바탕에서 보려고 하지 않고 잠정적인 정치인이라도 하려는 양 억지 논쟁으로 사람들을 이간질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파 논객인 정규재, 조갑제, 전원책의 논조를 흥미 있게 시청했습니다. 물론 좌파 성향의 CBS의 김현정, 유시민과 김어준의 논조도 즐겨 찾아봤습니다. 아무튼 제 생각으로는 정규재와 유시민과는 대화가 가능한 논객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분들은 문제의 겉만이 아니라, 그 심층을 찾아보려는 일말의 자세가 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심층적인 문제란 무엇인지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우선 장터의 각설이 품바들의 얘기를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부는 피리는 예술적 심미적 감흥을 돋우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피리소리나 가슴을 치는 애곡소리조차 따라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그 깊은 의미와 시대사조에 대한 비판은 아예 운도 떼지 못한 것입니다. 하물며 세례자 요한의 금식이 보여주고자 하는 의미는 처음부터 무시되었고, 오히려 미친 짓으로 매도당한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마치 선한 사람들을 찾아오신 흔해빠진 종교인 행세를 하지 않고, 정반대로 가르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비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언제쯤이면 사람들이 구름 너머의 의미를, 고통 너머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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