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전화는 되도록 피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은퇴한 늙은이에게 딱히 중요한 전화를 할 정도의 상대는 없을 거라 생각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받기로 했습니다.

"혹시 박성완목사님께서 전화를 받고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스마트 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1974년으로 나를 소환했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중구 예관동에 위치한 임마누엘교회의 전임 전도사로 일할 때 만난 분이었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당시에는 중-고등학생이었는데, 예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나를 찾은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노모인 89세의 어머니의 청을 들어드리려고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1974년 1월 1일부로 전임 전도사가 된 나는 60여명 쯤 되는 교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주일 공동예배는 담임목사님(외국인)이 설교를 하시고 나머지는 다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첫 사회생활이기도 한 교회 생활은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교인들의 수준이 저보다는 모든 면에서 높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위치한 중구의 큰 시장인 중부시장의 대표이사를 비롯해서 

장군의 부인도 출석했고, 교단 총회의 중책을 맡은 이들도 대여섯명이 되었으며, 

사업가들과 미 8군에서 통역사로 일하는 분 등이 계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대학원 공부와 병행하는 목회는 초년생이라는 것 말고도 이런 교우들을 감당하기에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전화를 하신 그 교우 부부는 의정부 쪽에서 약품을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셨는데, 

상처가 나면 제일 먼저 바르는 요드액(빨간약)을 만드시는 사장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남편되는 분이 저를 찾아오셨고, 2-3장 되는 고소장을 들고 오신 것입니다. 

 부인이 교회 여선교 회장으로 심방 등 교회일에 열심이셨습니다. 

고소장에 의하면 집안 일을 등한시하면서 바깥일에 너무 시간과 열정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의처증세까지 보여서 저로써는 상대하기가 너무 거북스러웠습니다. 

 

다행히 그 교회가 중구청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어서 현재 도봉동으로 이전을 추진해서 이사를 하고,

작은 교회당과 사택을 건축하는 것까지 만 2년 2개월을 사역하고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막내 셋째를 가진 만삭의 몸으로 부산으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교우들과도 헤어지게 되었고, 그 집사님 내외분과도 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전화를 통해서 만 45년 만에 옛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전화 속의 따님은 어머니의 말씀이라며 목사님께 많은 신세를 져서 꼭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친은 작년에 소천하셨다고 하시며, 모친은 청각 장애를 갖고 계시다 했습니다. 

인생 경험이 일천하였지만 목회자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감사의 인사를 받을 처지는 아닌듯 했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목회자로 교인들에게 작은 힘이 되어드리지 못한 것이 부끄럽게 생각될 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첫째는 진심으로 들어 주었고, 

둘째는 솔직한 마음으로 나의 의견을 말씀드렸을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권고를 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완성된 인간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대로된 지도자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은 변명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교우들이 생각납니다. 

저의 후임자에게 실망하고, 내가 목회하는 교회로 이명하겠다는 S집사님을 끝까지 뿌리친 일이나, 

잠깐 정신이 나가서 거금을 헌금했는데 그 헌금을 되돌려 받고 싶다며 법석을 떠는 L권사님을 끝까지 설득한 일이나, 

여선교회 지도자들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어주려다 낭패한 일이나, 

교회 재정을 세속적인 이해관계로 접근하는 중직자를 끝까지 거부한 일이나, 

남녀 청년들 사이에 벌어졌던 빗나간 사랑 사건으로 군 헌병대에 체포된 젊은 교우를 구하려고

상대 여자 청년의 부모를 설득하고, 헌병대 중대장을 설득해서 끝내 구해낸 일이나, 

을지로 3가 파출소에서 호출한 전화로 자해공갈단에 걸려든 교회 청년회장을 위해서 밤새 잠을 설치고

이쪽 저쪽을 찾아다니며 최선의 합의점을 찾은 일이나, 

셀 수 없이 많은 사고와 사건들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해결사가 되려던 동분서주했던 그 순수함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는 그 마음은 기특하게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부족하고 부끄러웠던 것만은 사실이다. 

더 좋은 해답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뜻 밖의 천사가 나타나서 문제를 역전시켰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도,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도 진리임에 분명합니다. 

 

카르페 디엠, 어느 한 순간도 허투로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이기에,

명심할 만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카르페 디엠'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0) 2020.09.25
5. 키위를 맛있게 먹는 법.  (0) 2020.06.09
4. I have a dream.  (0) 2019.11.09
3. 마지막 수업 시간에.  (0) 2019.11.08
2. 팝송 <해변의 길손>.  (0) 2019.07.04
Posted by 박성완
,

해방둥이로 태어난 나는 해방의 여진과 6.25 동란 4.19 학생혁명, 5.16 군사구테타, 유신독재, 5.18 광주사태, 6.10 민주화 선언, 3.10 대통령 탄핵 등 역사의 굴직한 격랑 속에 살았다. 그러나 되돌아 보면 이 모든 역사적 파도들이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 덕분에 나는 극심한 배고픔과 그와 비례하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하게 살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54년 5월 어느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다니던 장계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은 나를 데리고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장계 중학교 음악선생님에게 갔다. 중학교 음악선생님의 바이올린에 맞춰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을 부르게 하신 것이었다. 날 계란을 아침마다 먹을 것을 권해듣고 며칠 후 군()내에 있는 모든 초등학교에서 뽑혀온 실력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군내 초등학교 학술 경연대회의 음악부에 참가한 것이다. 그 때 내 아버지는 유일하게 카메라를 목에 걸고 찾아오셔서 연신 셧터를 누르셨는데, 이사하는 과정에서 그 흐릿한 사진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학술경연대회에서 우리 학교가 거둔 성과중 하나는 내가 성악부 1등을 한 것이었다. 난리가 났다. 첫째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이 우리 집에 모였고, 내가 방 한쪽 구석에 서서 1등을 한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학교 운동장에 모인 전체 학생 아침 조례시간에 교단에 올라가서 그 노래를 부른 것이다. 작은 우리 마을에서는 소문이 쉽게 퍼져나갔고, 교회를 비롯해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내가 받은 1등 상은 노트 20권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나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변성기가 일찍 찾아온 내 성대를 너무 혹사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뭇군이 나무를 질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대요. 강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사공이 배를 젓다 잠이 들어도, 저 혼자 나룻 배를 저어간대요." 그 당시는 그 노랫말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했는데, 지금 곱씹어 보니까 참 좋은 노랫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신앙적으로도 얼마나 귀한 깨달음을 주는 노랫말인지 모른다. 새삼 노랫말을 지어주신 윤석중선생님과 곡을 붙여주신 박태현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종종 혼자 사는 세상인줄로 생각할 때가 많다. 아무리 부모님 사랑 선생님 은혜를 얘기하다가도,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불평 불만의 본색을 드러낸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가?"하고 말이다. 젊은 시절에는 참 많이 했던 불평불만이었다. 그런데 이제 팔십줄을 눈앞에 둔 이즈음에야 그런게 아니었음을 제대로 배우고 있다. 나뭇군 경험이 있는 나 또한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어느 날 쓰러진 통나무를 리어커에 싣기 알맞도록 톱질을 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 나무 밑에서 거꾸로 톱질을 하다가 그 톱으로 이마를 찍어서 피를 많이 흘린 일이 있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던 3살 어린 동생이 달려와 제 셔츠를 찢어 이마를 감싸 동여매 주었기에 망정이지, 이마에 큰 상처를 남길 뻔 했던 추억이 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이 "나 죽네. 나 죽네."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나무를 리어커에 싣고 집으로 오는 길에서 시원한 바람을 만났었다. 피투성이가 된 몰골임에도 그 바람이 얼마나 시원했던지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혼자 살아가는 인생살이가 아니라는 것을 배운 것은 그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라는 것이다. 뒤늦긴 했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아마도 내가 대학 시험에 낙방하고 집에 머무르던 때였을 것 같다. 

 

시원한 바람이 없다면 우리네 인생살이는 얼마나 팍팍할까? 고단한 삶에서 알게 모르게 이런 시원한 바람은 언제나 불어왔던 것이다. 대학에 입학만 하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다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겨우 겨우 친척 식구들의 푼돈을 긁어모아 입학금을 내고나니까, 당장 거처할 방 한칸이 필요했고, 그게 해결되기가 무섭게 다음 학기 등록금이 걱정되었다. 어느 봄 날 가정교사로 2팀을 돌보고 다시 학교 도서관에서 문을 닫는 11시까지 숙제를 마치고 백양로를 걸어나오는데 하늘에 별들이 총총하고,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참 시원하고 고마운 바람이었다.

 

첫 목회지로 부산을 향해 떠났는데, 그때만 해도 교단 이름이 낯선 때문인지, 도무지 어른들이 교회를 찾지 않았다. 서너 달 교회가 위치한 개금 아파트에서 내려오는 직장인들을 상대로 전도지를 나눠주었지만 한 사람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다행히 아는 분을 통해서 교회 반주를 하고 싶다는 음악학원 선생이 오셨고, 교회 윗 마을에서 그 학원 선생과 또래인 처녀 한 분이 동생 서넛을 데리고 오셨다. 그래서 전도 대상을 노인과 어린이로 잡고, 노인정 두 곳을 집중적으로 찾아서 정보를 수집하는데, 그때 배운 것은 노인들은 고집 불통이라는 것이었다. 사탕과 우유를 사들고 찾아가서 마을을 위해서 그리고 노인들 자신을 위해서 뭔가 할 일을 찾아보자고 설득했지만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교사 자격증을 가진 덕분에 어린이 집을 쉽게 설립할 수 있었고 기대보다도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어 작은 교회당은 매일 북적거렸다. 그런데 그때만해도 교회들이 자동차가 없던 시절이라, 30여명의 아이들과 학부모를 데리고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야외 학습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우리 내외가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통에 아들 녀석이 대열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아내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아이를 찾아나섰는데, 해수욕장을 몇 바퀴나 돌았는데도 이 놈이 보이지가 않았다. 파도치는 물결을 바라보면서 행여 아이가 그물결에 휩쓸려 떠올라올까 눈물을 쏟으며 뛰고 뛰었다. 아마 1시간 이상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을 것이다. 다행히 미아보호소에서 얼굴에 온통 눈물자국과 모래를 뒤집어 쓴 아들을 발견했다. 그때 그 아이의 볼을 비비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아이 손을 잡고 아이들 곁으로 돌아오는데 파도를 가르고 바닷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었다. 얼마나 시원하고 고맙고 아름답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고마운 바람이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고비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때마다 시원하고 고마운 바람은 항상 내게로 불어왔다. "산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아마도 열심히 달리기를 한 사람이나, 땀으로 온 몸을 적신 사람들은 이 바람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힘든 인생살이를 살고 있는 사람만이 산위에서 그리고 강위에서 부는 바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버거운 삶이라 하더라도 산위에서 그리고 강위에서 시원하고 고마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Posted by 박성완
,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오고 있다 합니다. 

솔직히 저는 그닥 큰 차이가 없는 변함없는 일상을 살고 있지만 말입니다. 

잔디밭의 잡초가 매년 다른 종들로 덮여서 연구해볼까도 생각하지만, 

우선 잡초 제거하는 일이 일순위이고, 

아침 저녁으로 채전에 물 주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카네이션에서 몇 개의 꽃 망울이 올라와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봄 꽃 중 라일락이 꽃색깔을 바꾸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 밖에 함박꽃과 꽃 양귀비와 둥글레 꽃 그리고 요즘은 달맞이 꽃이 아침과 낮이 사뭇 다릅니다. 

올해는 감꽃과 모과 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집을 비운 탓입니다. 

무엇보다 슬픈 것은 관상용 사과나무가 지난 겨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 삶에 찾아온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키위를 맛있게 먹는 방법을 터득한 일입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1986년 겨울학기에 예배학을 공부하러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루터교 신학교에 머물 때입니다.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당엘 가면 항상 마주치는 한 털보 학생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이른 시간에 가도 그 학생은 항상 식당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언제나 와플에 미제 꿀을 발라서 먹곤 하였습니다.

함께 자리를 할 때는 그의 식사하는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그 대학에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직장을 찾고 있다 했습니다.

훗날 소문으로는 어느 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떠났다고 합니다. 

그런 그 박사 취준생이 와풀에 꿀을 바르는 그 자세가 너무도 정성스러웠습니다. 

와풀의 패인 골짜기들을 하나 하나씩 꿀로 채워가는데 그의 시선과 손놀림이 진지했다는 말입니다.

먼저 가운데 칸부터 매꿉니다. 

그리고 차츰 가장자리까지 빈틈없이 숙제를 하는듯 꿀을 바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채워지면 그는 나이프로 한 조각 한 조각 잘라서 입으로 투척을 합니다.

입에 넣고 씹는 순간도 행복으로 충만합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그때 저는 갈라디아서 주석도 한 과목 신청해서 듣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단어의 변화를 계속 물으십니다. 

아무리 단어와 문장 공부를 해도 그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모르니 망망대해입니다.

그런 사람 옆에서 너무도 한가롭게 와풀에 꿀을 채워넣는 그는 화성에서 온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키위를 어떻게 먹으면 맛도 있고 행복한지 배웠습니다. 

먼저 키위의 윗 부분을 칼로 티스픈 사이즈로 자릅니다. 

그리고 얇은 껍질을 왼 손가락으로 받친 후 천천히 키위의 모양새를 따라 티 스푼을 움직입니다. 

한 바퀴를 돌리고는 가운데서 티스푼을 넣어 껍질이 다치지 않도록 반쪽씩 떼어내 입으로 가져갑니다.

가끔씩 고여있는 키위의 물기를 왼손으로 들어 마셔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티스푼을 조심스럽게 또 정성으로 왼손가락의 협조를 받아 움직입니다.

아마 밑부분 꼭지가 있던 부분에 오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생기지만

사실 이 때가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달걀 모양으로 껍질만 남도록 하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키위의 속살을 다 꺼내서 먹고, 남는 것은 정말 달걀모양의 껍질 뿐입니다.

저는 그렇게 최대한 얇게 껍질만 남도록 하는게 키위에게 행복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잘 먹어준다면 그 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까르페디엠, 현실에 충실하라. 

와풀에 꿀을 바르는 미국의 구약학 박사 취준생처럼,

키위를 달걀처럼 껍질만 남도록 신중과 정성을 다해 속살을 파들어가는 저 처럼, 

모든 우리의 삶을 그렇게 정성을 다하고 사랑을 다해서 접근해 가는 것이야 말로,

삶을 제대로 살아가는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와풀을 먹듯, 키위를 먹듯,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하루하루를 채워가기를 바랍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란 와중에도 행복할 수 있는 순간순간이 가능함을 배우고 있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

나는 노래든 책 읽기든 한번 꽂히면 오랫동안 그 속에서 헤매곤 한다.

특히 찬송가나 가곡 등 노래는 더욱 그래서, 몇날 며칠을 흥얼거리며 산다.

 

2009년 3월 31일부터 4월 4일을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그날 중국 공안에게서 쫓겨 내몽고 만주리까지 도망쳤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22번째 중국 선교에 나섰던 때인데, 

현지 멘토와 현지에서 태어나 해방 전에 귀국해서 목사님이 되신 다른 한 분과 제가

오랜 계획 끝에 현지에 성경학교를 세우고 그 첫 개강 예배를 드린 날이 3월 31일 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세 사람이 가칭 <학성복음 성경학교>의 후원자가 되어 

1년에  3개월짜리 두 학기 강의를 하는데, 4차례는 내가 5일간 강의를 하기로 되었다.

그리고 후원금은 세 사람이 1년에 1,200만원씩 합계 3,600만원을 준비해서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 첫걸음을 띄는 개강 예배날에 학교를 찾은 것이다. 

대 강의실 하나, 예배실 하나, 도서관 하나, 상담실 하나, 화장실 2개, 식당과 주방 하나로 구성된 시설이었다. 

그리고 차량 봉고 12인승 하나가 준비되었다. 

 

개강 예배를 마치고 학생 전원에게 체육복 한 벌씩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이미 새벽 기도회를 마친 후 학생들은 체육복을 입고 마을 한 바퀴를 구보를 했다고 한다. 

청색 체육복에는 <학성 복음 성경학교>라는 하얀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신약 개론>을 강의하려고 이미 중국어로 강의 초록을 준비해서 학생들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 이 노래를 먼저 가르쳤다. 

가사를 이해하도록 한 구절 한 구절 중국말로 알아듣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들의 형편과 처지에서 이 가사가 얼마나 절실하게 어울리는 말인지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 가사는 이렇다. 

I have a dream. 

1. I have a dream, a song to sing    나는 꿈, 부를 노래가 있다네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내가 어떤 일이든 감당해 내도록 도울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만일 당신이 요정의 얘기에 경이로움을 보게 된다면,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당신이 실패하게 되더라도 미래를 얻을 수 있지요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를 믿어요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내가 보는 모든 것에서 뭔가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를 믿어요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그 시간이 내게 적절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나는 개울을 건너게 되는 꿈을 꾼다네

 

2. I have a dream, a fantasy            나는 환상이라는 꿈이 있다네
To help me through reality            실제를 통해 나를 도울
And my destination makes it worth the while  그리고 내 목표는 그러는 동안에 가치가 생기지
Pushing through the darkness still another mile  또 다음 길을 갈 때까지 어둠을 몰아낼 거라고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를 믿어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내가 보는 모든 것에서 뭔가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를 믿어
When I know the time is right for me  시간이 내게 적절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나는 개울을 건너게 되는 꿈을 꾼다네

3.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나는 개울을 건너게 되는 꿈을 꾼다네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나는 개울을 건너게 되는 꿈을 꾼다네
I have a dream, a song to sin            나는 꿈, 부를 노래가 있다네
To help me cope with anything          내가 어떤 일이든 감당해 내도록 도울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만일 당신이 요정의 얘기에 경이로움을 알게 된다면,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 당신이 실패하게 되더라도 미래를 얻을 수 있지요
I believe in angels                            나는 천사를 믿어
Something good in everything I see    내가 보는 모든 것에서 뭔가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I'll cross the stream, I have a dream    나는 개울을 건너게 되는 꿈을 꾼다네

그런데 우리가 감동에 젖어 노래를 부르고 있는 시간에 

중국 공안원 6명이 두 대의 차에서 내려 강의실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밖을 내다보던 저의 통역 중 한 분이 내게 사인을 보냈다. 빨리 강단에서 내려오라고. 

내가 서둘러 맨 뒷 자리로 옮겨 앉았을 때 나의 또 다른 통역자가 갑자기 음성을 바꿔 학생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짐작했고, 공안들은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한 사람은 커다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앞 자리부터 학생들을 하나씩 찍기 시작했고,

무슨 말인지 한 사람이 야단을 쳤다. 

그리고 학생 3 사람, 목사 한 사람, 통역 한 사람 그리고 전도사 한 사람을 연행해 갔다.

 

나는 서둘러 피신하라는 멘토의 전화를 받고, 

안내원과 노인 목사님과 함께 내몽고의 끝자락에 있는 만주리로 밤 기차를 탔다. 

2층 침대칸에서 추운 4월 초하루의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고,

동이 트는 아침에 만주리에 도착 역 주변의 한 선술집 비슷한 곳에서 중국식 아침을 먹고

최근에 이사를 했다는 조선족 교회를 방문한 후 가지고 간 3,000위안화를 헌금하였다. 

그 교회는 새 교회당에 치뤄야 할 잔금 3,000위안화가 없어서 SOS를 쳤었다고 전해 들었다. 

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묘하고도 놀랍다.

우리 돈 100만원을 그 교회 입주금으로 준비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지금도 압바(Abba)의 이 노래 I have a dream 를 듣거나 부를 때마다

지금 그 학생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이 되겠다고 다짐을 하던 그들은 같은 길을 걷고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제발 그들이 꾸었던 꿈을 잊지 않기를.

그래서 언젠가 그 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카르페 디엠'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0) 2020.09.25
5. 키위를 맛있게 먹는 법.  (0) 2020.06.09
3. 마지막 수업 시간에.  (0) 2019.11.08
2. 팝송 <해변의 길손>.  (0) 2019.07.04
1. 보고 싶은 석미섭 양.  (0) 2019.07.03
Posted by 박성완
,

2004년 가을 학기에도 3, 4과목을 가르쳤다. 

그 중의 한 과목이 <로마서 주석>이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수업 시작 후 5분간의 짧은 묵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과 같이 부른 <케세라 세라-Quesera Sera>였다. 

 

나는 그해 강의를 끝으로 더 이상 가르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아직 교수 정년까지는 5년이 남은 60세의 일이다.

지역 교회 담임목사, 신학대학교 교수, 베델성서연구원 전임교수, 중국 선교사 등의

여러 가지 일을 하는 때문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대학교수 직은 내려놓고 싶었다. 무려 25년이나 근속했으니 말이다. 

나는 나름 일의 시작과 일의 끝은 어떤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의 시작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것이고, 

일의 끝은 바로 그 일을 마치는 것으로 만족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를 맡는 것이건, 교수가 되는 것이건, 베델성서연구 강사가 되는 것이건, 선교사가 되는 것이건,

내가 기를 써서 맡으려고 노력하지 말자는 것이다. 

소명에 따른 것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내 소원대로 되었다.

그리고 담임 목사는 그 교회에서 설교를 마지막으로 하게 되는 날로 임기를 마치고, 

교수직은 강의를 마치는 날이 끝이며, 

선교사는 선교지 강의를 끝내는 날로 하자고 말이다. 

그래서 내 소원대로 되었다. 

별도의 은퇴식이란 특별 행사 같은 것을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케세라 세라>는 어떤 범주에 드는 노래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유행가쯤으로 분류되는 노래임에는 틀림없는 때였다.

그래서 마지막 <로마서 강의>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가르칠 때는 학생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가사를 칠판에 썼다.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1. 내가 어린 소녀 였을 때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지 I asked my mother, what will I be
내가 예쁠까? Will I be pretty
내가 부자 일까? Will I be rich

어머니가 나에게 한 말은 이랬지 Here's what she said to me

케세라, 세라 Que será, será
되기로 정한대로 될 것이다 Whatever will be, will be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없단다 The future's not ours to see
케세라, 세라 Que será, será
되기로 정한대로 될 것인가 What will be, will be

 

2. 내가 자랐고 사랑에 빠졌을 때 When I grew up and fell in love
나는 내 연인에게 물었지 I asked my sweetheart, what lies ahead
무지개가 있을까요? Will we have rainbows
연일 Day after day

내 연인이 말한 것은 이랬지 Here's what my sweetheart said

케세라, 세라 Que será, será
되기로 한대로 될 것이다 Whatever will be, will be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The future's not ours to see
케세라, 세라 Que será, será
되기로 한대로 될 것인다 What will be, will be

 

3. 이제 내 자신 아이들이 생겼는데 Now I have children of my own
그들이 어머니에게 물었지 They ask their mother, what will I be
멋쟁이가 될까? Will I be handsome
부자가 될까? Will I be rich

난 그들에게 다정하게 말한다네 I tell them tenderly

케세라, 세라 Que será, será
되기로 한대로  될 것이다 Whatever will be, will be
미래는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The future's not ours to see
케세라, 세라 Que será, será
되기로 한대로 될 것이다 What will be, will be
케세라, 세라 Que será, será

 

어느 때나 젊은이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설레임과 함께 불안과 두려움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 그들에게 이 노래 케세라 세라는 큰 위안과 격려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음악가는 케세라 세라를 스페인 노래가 아니라 모나코 노래라고 하면서 독특한 해석을 하였다.

단순히 될대로 되리라는 운명적이고 자포자기 식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대로 될 것이다는 뜻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도 내 학생들에게 그 말을 해 주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얼마든지 힘을 내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비록 한 발 두 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걷고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길을 걸어가고 있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매일 매일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아가라고. 

 

나는 지금도 같은 마음이다. 

나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간다고. 

그래서 오늘도 케세라 세라를 큰 소리로 들을 수 있도록 볼륨을 높였다. 

'카르페 디엠'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0) 2020.09.25
5. 키위를 맛있게 먹는 법.  (0) 2020.06.09
4. I have a dream.  (0) 2019.11.09
2. 팝송 <해변의 길손>.  (0) 2019.07.04
1. 보고 싶은 석미섭 양.  (0) 2019.07.03
Posted by 박성완
,

   도봉산 산책은 은퇴 후에 생긴 나의 새로운 생활이 되었다. 도봉산 안내소에서 출발 왼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 조금 오르면 황금 칠을 한 연화사가 나오고 절을 오른 편으로 끼고 조금만 더 오르면 내가 이름붙인 제1쉼터가 나온다. 벤치가 5개가 전부이지만, 나처럼 나이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차를 마시며 얘기꽃을 피우는 곳이다. 그리고 조금 더 오르면 천년 고찰 도봉사가 나오고 거기서 조금 오르면 갈래길이 나오는데 왼쪽은 더 범위가 넓은 둘레길이 오른 쪽으로는 내가 걷는 제일 짧은 둘레길이 나온다. 그리고 조금 더 오르면 제2쉼터 정상 약수터가 나오는데, 거기서 다시 멈춰서 차를 마시거나 싸 들고 간 과일을 먹는다. 그리고 한참을 수다를 떨거나 다른 팀들의 수다를 듣다가 일어서서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고 냇물을 건너서 아랫길로 내려오면 도봉 서원이 나오고, 조금 더 내려오면 쌍줄기 약수터 앞에서 줄을 서서 물을 떠가거나 마시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내려오면 새로 지은 절간인 광륜사가 나온다. 그리고 내가 도봉산에 갈 때마다 들리는 식당 <바숲>이 환영하는 노래를 큰 소리로 불러준다. 바숲은 바람이 숲을 깨운다는 뜻이란다.

 

오늘(2019. 6. 26) 나는 점심을 먹으러 <바숲>에 왔는데, 스물 세 살의 내가 육군 기갑학교 교육대대에 복무할 때, 기갑학교 병사 노래대항전에 나가서 불렀던 팝송 <Stranger on the shore>가 흘러나왔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주인에게 이 노래를 듣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다시 그 곡을 마치 신청곡을 들려주듯 틀어주는 게 아닌가? 그 노래는 당시로써는 고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내게 엄청난 힘과 용기를 준 노래였다. 나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나도 몰래 눈물이 핑 돌았다.

 

어떻게 해서 내가 그 병사를 위한 노래대회에 나가게 됐는지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아무튼 교육대대 작전정보과 교육사병으로 근무하던 내가 무대 위에 섰다. 물론 피아노 한 대도 없는 텅 빈 쓸쓸한 무대였고,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음원을 들으며 하는 노래도 아니었다. 무반주로 부르는 노래여서 오롯이 내 목소리 하나만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더 효과가 만점이었는지 모른다. <해변의 길손>은 내 성량에도 그리고 내 음색에도 잘 어울렸다. 가락과 가사가 나뿐만 아니라, 함께 복무하고 있던 병사들 모두에게도 딱 어울리는 거였는지 모른다.

 

여기 영어 가사와 번역 가사를 옮긴다.

 

Here I stand, watching the tide go out. So all alone and blue, just dreaming dreams of you.

I watched your ship as it sailed out to sea, taking all my dreams and taking all of me.

the sighing of the waves, the wailing of the wind. The tears my eyes burn, pleading, “my love return”

why, oh why must I go on like this? Shall I just be alonely stranger on the shore?

why, oh why must I go on like this? Shall I just be alonely stranger on the shore?

 

나 여기 서 있다네, 조수가 빠져 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혼자 아주 우울하게 너에 대한 꿈만 꾸면서.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네 배를 지켜보았지. 내 모든 꿈을 싣고 내 모든 것을 싣고 가는.

파도의 한숨, 바람의 통곡. 불타는 내 눈의 눈물이 내 사랑아 돌아와라고 애원해.

왜 난 이렇게 지내야만 하나? 난 단지 해변의 외로운 길손일 뿐일까?

왜 난 이렇게 지내야만 하나? 난 단지 해변의 외로운 길손일 뿐일까?

 

마지막 후렴부, “왜 난 이렇게 지내야만 하나? 난 단지 해변의 외로운 길손일 뿐일까?” 라는 물음이 당시의 나의 현실을 남김없이 투영하는 것 같았지만, 나를 슬픔의 계곡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내 안에 잠자는 가능성과 희망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입대하게 되었을 때, 솔직히 나는 내게 실패만 가져다주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기에 이런 세상으로부터 도망이라도 가듯 몸과 마음이 너무 가벼웠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충분히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열심히 훈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직접적으로는 멋진 논산 훈련소 25연대 우리 구대장님의 새벽 조회 시간에 하신 한 마디 너의 조국은 춥다고 가슴을 움츠리고 손을 주머니에 넣는 패배자가 아니라,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활개 치며 걷는 용사를 원하고 있다.” 이었지만, 벌써 내 마음 속에서는 꿈틀 거리는 새 삶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로써는 아직 그런 용어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나, 군대생활 3년은 결코 내 인생 여정에서 지울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는 각오가, 카르페디엠을 따라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탱크 병사가 받게 되는 기갑학교 14주 교육을 받는 동안, 차량술, 통신술, 화기술 세 가지 분야 모두에서 최상위급 점수를 쌓아서 마침내 1등으로 졸업할 수 있었고 그해 첫 기갑 장군이 되신 장봉춘 준장의 우등 졸업표창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로 나는 매년 상무대 내 교육학교 대항 암호 풀이 경연대회에도 나가 매번 우승하고 부대 상을 받아 기갑학교장에게 바쳤다. 나는 2급 비밀을 내 조수는 3급 비밀을 풀었는데, 우리 둘은 찰떡궁합으로 잘 외웠고, 순발력을 발휘해서 잘 풀었다. 이런 저런 우승과 공훈으로 나는 매년 기갑학교 교장으로부터 공로패를 받았다. 그리고 포상 휴가도 몇 차례 다녀올 수 있었다. 내가 복무한 11전차 대대는 기갑학교 소속 교육 대대로, 전차 장교, 전차 하사관, 그리고 전차 병사들에게 실기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는데, 우리 부대에는 3개 중대와 본부 중대가 있었는데 내가 일하는 작전 정보과는 이런 교육을 직접 관할하고 있었고, 중대별 교육 평가를 내가 맡았는데, 이 때문에 낮은 점수를 받는 중대장들의 미움과 아첨을 동시에 받곤 하였다. 그러나 항상 성적대로 정확하고 정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때 우리 작전 정보과의 과장은 절대적으로 나를 옹호해 주었고, 모든 외풍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과장님은 부대대장과 계급이 같은 소령이었고, 작전관에는 대위 그리고 교육관은 중위가 맡았는데, 나중에 정보관이 한 분 더 왔는데 그 분은 소위였다.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장교들이 외국어 대학 출신 학군단 장교들이어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내게는 우호적이었고, 특히 과장은 나를 아끼고 사랑하셨다. 그분들 덕분에 내 업무가 끝나면, 언제든 사무실 안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지금도 <해변의 길손>의 잔잔한 멜로디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에서는 거친 숨결이 느껴진다.

 

 

사족 : 가끔 전화도 주시고 도봉산이며, 실버 극장 등에서 만나기도 하는, 나보다는 열다섯 살 연배이신 한 지인 장로님이 내게 여러 번 부탁하셨다. 내 얘기가 참 흥미롭다며, 글로 남기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그러나 내 딴엔 한 점 거짓 없이 써 보겠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부정적이거나 어두운 역사는 쓰지 않을 생각이다.

'카르페 디엠'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0) 2020.09.25
5. 키위를 맛있게 먹는 법.  (0) 2020.06.09
4. I have a dream.  (0) 2019.11.09
3. 마지막 수업 시간에.  (0) 2019.11.08
1. 보고 싶은 석미섭 양.  (0) 2019.07.03
Posted by 박성완
,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마흔을 막 넘긴 어느 날이었다. 나의 현역 시절은 설교를 준비하거나 심방을 하는 일이 일과인지라, 굳이 출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을 이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10시가 조금 넘거나 아니면 오후 서너 시쯤 해서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서 서점이나 시장을 보러 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늦은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녀를 만난 것이다. 후에 알게 됐지만 나이는 나보다 아홉 살이 어린 그녀는 매일 이른 아침에 남대문 시장에 나가서 업무를 마치고, 오후 6시경 땅거미가 드리울 때 집으로 돌아오곤 하는데, 언제나 내가 사는 옥수동루터교회를 종점으로 하는 버스를 이용하였다. 내가 처음 미섭 양을 만났을 때는 버스가 종점에 닿았고 손님들이 내리는 중이었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천천히 내리고 있는데, 내 바로 앞에 있던 미섭 양이 목발을 짚고 버스 계단을 내려오는데, 매우 힘들어 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우리처럼 발바닥을 딛는 게 아니라, 발가락으로 딛고 두 목발에 의지해서 한 발 한 발 힘겹게 걷고 있었다.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발가락으로 걷고 목발에 의지해야 하니까 넘어지는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측은지심이 생겼고, 목사라는 내 신분에 맞게 그녀를 엎는 것이 맞다 생각하고 엎이라고 채근했다. 몇 번을 사양하던 그녀는 내 등에 엎여서 우리 집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그녀가 살고 있는 <정양원>이란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 일이 있고나서 맞는 추석에 내 성경공부 반의(1984년 현대그룹 본사에 성경 반을 개설 나를 강사로 초청했다) 학생 중 하나인 중앙정보부 과장쯤으로 일하는 분이, 어려운 학생을 도와달라는 부탁으로 한 학생을 분기별로 학비를 전해주고 있었는데, 그해 추석은 어려운 가정을 도와주면 감사하겠다고 7만원을 내게 맡겼다. 그 돈을 받아든 나는 먼저 석 미섭을 떠올렸다. 심방 겸 찾아가서 그녀의 사정을 알아보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그녀가 남대문 시장에 일하러 나간 틈을 이용하였는데, 그녀는 남대문 시장에서 껌을 팔고 있다고 했다. 서른한 살이나 된 숙녀가 목발에 의지해서 껌팔이를 하고 있다는 얘기를 모친으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내민 70,000원을 한사코 거부하는 것이다. 거지도 자존심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돌아서서 나오는 내 등에다 비수를 던지는 한 마디를 했다. 명절을 맞아 광고용으로 선행을 하고 얼마나 우려먹을 것이냐는 것이다. 화가 났다. 성큼 손을 내밀고 감사합니다 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내민 손이 부끄러울 뿐 아니라 쫓기듯 나오게 되었으니, 나도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다. 그래서 되돌아섰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그러자 그 모친은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풀어 헤치기 시작했다. 저 불쌍한 년을 계속 남대문 시장에 내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런 장애자에게 걸맞는 일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였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녀에게 알맞은 일터는 토큰 판매대를 길가에 하나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노력하기로 약속한 후 겨우 위문금을 전하고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동 사무소, 구청 등으로 토큰 판매대를 알아보려고 많이 뛰어다녔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88올림픽을 앞두고 장애인이 시장에서 구걸하는 행위를 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지 않으냐는 취지로 구청장에게 호소문을 보낸 후였다. 그런데 결국 돌아온 답은, 토큰 판매대가 길거리에서 가게 안으로 옮기는 중이어서 가게를 하나 얻으면 힘써보겠다는 내용이었다. 미섭이네 형편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85년 시절에 길가에 그것도 버스 정류장 부근에 가게를 얻어줄 수 있다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미섭이 가정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모친과의 많은 대화 끝에 미섭이 아버지가 의병제대를 했는데, 아직도 대퇴부에 총알이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보훈 가족으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훈대상자가 된다면 국가가 집도 마련해 주고 최소한의 생활비도 보조해 준다는 말을 들은 터라, 그래서 보훈가족 만들어주기 작업을 시작했다. 먼저 탄원서를 냈다. 정부 종합청사 민원실에 낸 것이다. 한 일주일 쯤 되어 반가운 답신이 왔다. 해당 부서에 공문을 내려 보냈으니 일주일 안에 연락이 올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사흘이 안 되어서 미섭이 모친이 나를 찾아왔다. 서울 보훈청에서 직원이 전화를 해 왔는데, 왜 목사를 끼고 탄원서를 냈냐는 질책이었다고 한다. 지금 순서가 되지 않아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되는데, 그걸 못 참고 난리 법석을 떠느냐는 전화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다친 지가 30년이 넘었는데도, 지금까지 아직 순서가 밀려있다는 말만 되풀이 해온 서울 보훈처에서, 조용히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래서 내가 화가 났다. 곧 바로 서울 보훈청장에게 항의성 공문을 만들어 내용증명으로 보냈다. 나는 일개 목사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교회 공문서식을 이용해서 호소문이나 탄원서를 보내곤 하는데, 그것이 일종의 압력을 느끼는 수단이 됐던 모양이다. 내가 보낸 항의서를 받은 그들은 곧 바로 건강 검진을 받게 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사천리로 보훈가족 만들기에 돌입해서 불과 한 달도 안 돼서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일산에 보훈가족 아파트가 완성되면 한 채를 줄 것이고, 다음 달부터 보훈 연금을 받도록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한 보훈가족을 도울 수 있었는데, 그것으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확히 <88 서울 올림픽>이 있기 전에 그 가족은 보훈연금을 받게 되었고, 아파트 분양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석미섭 가정에는 은행에 다니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가족 부양 능력이 있는 자녀가 있으면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규정이 있다고 했다. 물론 보훈처는 크게 잘못했다. 이 규정 하나만을 이유로 30년을 기다리게 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섭이 부친보다 훨씬 경증(輕症)인 사람도 벌써 보훈가족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는데, 미섭이 부친이 바보 천치가 돼 있어서 그걸 기화로 무시한 것이었다. 육군 대위로 의병 예편했다는데도, 말도 어눌하고 걸음은 대퇴부에 박힌 총알 때문에 굼떴다. 그러니 자기주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보훈 가족이 되고 나니 여러 가지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하나가 잠실 종합 운동장 건너편에 위치한 강남 병원에서 미섭이가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발가락과 발바닥 치료를 시작했는데, 시간은 걸리지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낭보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몇 달 뒤에는 미섭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는데, 병원 치료를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보훈 가족 중 재산을 가진 사람은 보훈가족에게 주는 병원 치료 혜택을 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자신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모친이 전화를 걸어왔다. 미섭이가 껌을 팔아 신림동에 8평짜리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있어서, 자신들이 보훈가족 아파트를 가지려면 미섭이가 가진 집 때문에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차선의 방법은 미섭이를 가족에서 떼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마치 시집 간 것처럼 주민등록부상에서 동거인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섭이는 가족에게 제외되었고, 그때부터 미섭과 가족들 사이에는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무엇이라고 조언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미섭이를 부추겨서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은행에 다닌다는 여동생이 전화에 대고 눈물로 호소하였다. 그리고 말미에는 저희 가족을 도와주신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이제는 빠져달라고 간곡히 호소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제는 보훈 가족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이 그 8평짜리 주택의 소유권 때문이었다. 미섭이는 한사코 그 집을 팔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그 가족은 일산 어론가 이사를 갔다. 그리고 몇 차례 더 전화연락이 있은 후 지금껏 아무 연락을 못하고 있는 중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참 보람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항상 보람만 있는 것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배신감도 느끼게 되고, 듣지 말아야 할 욕도 숱하게 먹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가끔은 미섭이가 생각난다. 지금 살아 있다면 예순 여섯이 되었는데, 비록 목발을 짚을 지라도 발바닥을 땅에 붙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간절함으로 미섭이를 위해 기도한다.

 

'카르페 디엠'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0) 2020.09.25
5. 키위를 맛있게 먹는 법.  (0) 2020.06.09
4. I have a dream.  (0) 2019.11.09
3. 마지막 수업 시간에.  (0) 2019.11.08
2. 팝송 <해변의 길손>.  (0) 2019.07.04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