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전화는 되도록 피하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은퇴한 늙은이에게 딱히 중요한 전화를 할 정도의 상대는 없을 거라 생각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받기로 했습니다.
"혹시 박성완목사님께서 전화를 받고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스마트 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1974년으로 나를 소환했습니다.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중구 예관동에 위치한 임마누엘교회의 전임 전도사로 일할 때 만난 분이었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당시에는 중-고등학생이었는데, 예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어 나를 찾은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노모인 89세의 어머니의 청을 들어드리려고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1974년 1월 1일부로 전임 전도사가 된 나는 60여명 쯤 되는 교회를 맡게 되었습니다.
주일 공동예배는 담임목사님(외국인)이 설교를 하시고 나머지는 다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첫 사회생활이기도 한 교회 생활은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교인들의 수준이 저보다는 모든 면에서 높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위치한 중구의 큰 시장인 중부시장의 대표이사를 비롯해서
장군의 부인도 출석했고, 교단 총회의 중책을 맡은 이들도 대여섯명이 되었으며,
사업가들과 미 8군에서 통역사로 일하는 분 등이 계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대학원 공부와 병행하는 목회는 초년생이라는 것 말고도 이런 교우들을 감당하기에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전화를 하신 그 교우 부부는 의정부 쪽에서 약품을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셨는데,
상처가 나면 제일 먼저 바르는 요드액(빨간약)을 만드시는 사장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남편되는 분이 저를 찾아오셨고, 2-3장 되는 고소장을 들고 오신 것입니다.
부인이 교회 여선교 회장으로 심방 등 교회일에 열심이셨습니다.
고소장에 의하면 집안 일을 등한시하면서 바깥일에 너무 시간과 열정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의처증세까지 보여서 저로써는 상대하기가 너무 거북스러웠습니다.
다행히 그 교회가 중구청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어서 현재 도봉동으로 이전을 추진해서 이사를 하고,
작은 교회당과 사택을 건축하는 것까지 만 2년 2개월을 사역하고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학원을 졸업하고 막내 셋째를 가진 만삭의 몸으로 부산으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교우들과도 헤어지게 되었고, 그 집사님 내외분과도 헤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전화를 통해서 만 45년 만에 옛 이야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전화 속의 따님은 어머니의 말씀이라며 목사님께 많은 신세를 져서 꼭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친은 작년에 소천하셨다고 하시며, 모친은 청각 장애를 갖고 계시다 했습니다.
인생 경험이 일천하였지만 목회자로써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감사의 인사를 받을 처지는 아닌듯 했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목회자로 교인들에게 작은 힘이 되어드리지 못한 것이 부끄럽게 생각될 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그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첫째는 진심으로 들어 주었고,
둘째는 솔직한 마음으로 나의 의견을 말씀드렸을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권고를 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완성된 인간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대로된 지도자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은 변명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교우들이 생각납니다.
저의 후임자에게 실망하고, 내가 목회하는 교회로 이명하겠다는 S집사님을 끝까지 뿌리친 일이나,
잠깐 정신이 나가서 거금을 헌금했는데 그 헌금을 되돌려 받고 싶다며 법석을 떠는 L권사님을 끝까지 설득한 일이나,
여선교회 지도자들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어주려다 낭패한 일이나,
교회 재정을 세속적인 이해관계로 접근하는 중직자를 끝까지 거부한 일이나,
남녀 청년들 사이에 벌어졌던 빗나간 사랑 사건으로 군 헌병대에 체포된 젊은 교우를 구하려고
상대 여자 청년의 부모를 설득하고, 헌병대 중대장을 설득해서 끝내 구해낸 일이나,
을지로 3가 파출소에서 호출한 전화로 자해공갈단에 걸려든 교회 청년회장을 위해서 밤새 잠을 설치고
이쪽 저쪽을 찾아다니며 최선의 합의점을 찾은 일이나,
셀 수 없이 많은 사고와 사건들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해결사가 되려던 동분서주했던 그 순수함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는 그 마음은 기특하게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부족하고 부끄러웠던 것만은 사실이다.
더 좋은 해답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떤 때는 뜻 밖의 천사가 나타나서 문제를 역전시켰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도,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으면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도 진리임에 분명합니다.
카르페 디엠, 어느 한 순간도 허투로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이기에,
명심할 만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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