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047호.
시편 시 50:7-11.
찬송 12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수님들을 찾아가,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봤습니다. 그들은 다들 고개를 내저으며, 내가 장난이나 치고 있다는 듯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나무 아래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서 맥주통과 손풍금을 곁에 둔 한 무리의 헝가리 인들을 보았습니다.” 칼 샌드버그가 남긴 말입니다. 1878년부터 1967년까지 89년을 살다가 샌드버그는, 미국의 시인이자 역사학자, 그리고 소설가이자 민속학자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는 교수님들을 찾아가 행복이 무엇인지 물어봤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이 말 속에는,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묻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담겨 있습니다. 샌드버그는 11살 때부터 이발소 급사, 우유 배달 차 운전수, 벽돌공, 밀 농장의 일꾼 등, 어렵고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힘들었던 어린 시절은 [언제나 어린 이방인]이라는 자서전으로 태어나, 그의 이름을 톡톡히 빛내주기도 했지요. 또한 그가 시인이 되는데도 한 몫 거들었습니다. 샌드버그가 좋은 반응을 얻어냈던 <시카코> 라는 시는, 백정, 연장제작자, 밀을 쌓는 사람, 철도주식 투기뿐, 짐꾼을 그려낸 시였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은 그에게 이런 식으로 보답을 주었고, 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내는 말을 남기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의 고단했던 삶이 빚어낸 말들 중에 이런 것들도 있습니다. “꿈이 없다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돈은 권력, 자유, 휴식 그리고 모든 죄악의 뿌리이며 축복의 합계이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6년 11월 28일 방송>
2. 대림절 마지막 주일의 복음서의 말씀은 마리의 찬가(Magnificat)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성모(聖母)로 부르는데, “구별된 어머니”라고 이해한다면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예언의 대답으로, 저 유명한 마리아 찬가를 부릅니다. 착한 여인의 노래치고는 너무도 심각한 내용이며, 왜 이 노래가 찬가로 불릴까요?
하나님만이 찬양을 받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46-50절).
성탄절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거리이며, 독일에서는 산타클로스 없는 거리를 만들자는 안티 산타 운동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성탄절의 의미가 장사꾼들의 상술에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성탄절은 세상에 오시는 구세주를 환영하는 행사일 뿐, 다른 목적이 개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차가운 세상에, 하나님께서 사랑을 가져다 주셨고, 생명이 소생하도록 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하사님께서 하시려는 일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위대하다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주 보잘것없는 자신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말입니다. 무명의 시골뜨기인 자신을 역사의 한 복판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음을 깨닫는다면, 노래를 부를 수 밖일 겁니다.
하나님만이 세상 질서를 바로 세우시는 때문입니다(51-53절).
엊그제 대통령의 연설에서 마리아 찬가의 한 구절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고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되었다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은 없느냐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런 권력이나 특권을 누리는 자리는 거들먹거리는 자리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섬기고 봉사해야 할 자리라는 말입니다. 정말 대통령이 이런 의도에서 말씀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우리 시대의 세상은 거들먹거리는 꼴사나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 질서를 바로 세우실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교만한 자들”은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는 그 자리에서 내리치셨으며, 부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시겠다”고 말입니다. 왜 이렇게 하셔야만 합니까? 권세를 준 것은 약하고 여린 사람들을 돌보라는 것이며, 재물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라는 것이었는데, 그걸 안 했으니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때문입니다(54-55절).
마리아의 노래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눈을 고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들, 아브라함이 가졌던 그 믿음을 물려받는 믿음의 자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온통 사랑하는 자기 자녀들에게 붙들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함없는 사랑과 연민을 베푸실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인 때문입니다. 그들은 명목상의 신자가 아닙니다. 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목사나 장로 같은 교회 직분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밖에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던 거지 나사로를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인생에서는 성공자들이 아닐 수도 있고, 유명인사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들은 하나님만 사랑한 사람들이고, 하나님과 함께 죽고 싶어 했던 사람들입니다.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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