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959호(2012. 3. 19. 월요일).
시편 135:15-18.
찬송 36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운명적인 사랑 앞에 이 말이 빠질 수 없지요. “첫 눈에 반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랬듯,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그랬듯, 처음본지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반해 버립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이몽룡이 성춘향에게 반한 것도, 나무꾼이 선녀에게 반한 것도, 아마 단 몇 초 사이에서였을 겁니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세상이 뒤집히는 기적이 벌어지는 일생일대의 사건, 첫눈에 반하다. 그것은 상대방이 내뿜는 빛에 사로잡히는 일입니다. 반하다의 옛날 말은 번하다, 여기에서 번은, 번개 번쩍과 어원이 같아서, 상대의 빛에 이끌려 홀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드라마틱한 일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데요. 20세 이상 미혼 남성을 대상으로 첫눈에 반한 적이 있느냐고 설문 조사를 했더니, 전체 응답자 중에서 남성은 10명중 8명이, 또 여성은 10명중 6명이, 짧게는 만나지 몇 초 만에 길게는 하루 만에 사랑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왜 첫 눈에 반했느냐는 질문에는, 알 수 없는 끌림이나 느낌이 라는 답이 가장 많았고요. 흥미로운 점은 첫눈에 반했다는 고백이, 남녀 모두에게 효과적이었다는 겁니다. 왜 첫 눈에 반했다는 고백이 효과적일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다니, 하는 감동 때문이 아닐까요? 알랭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랑의 최초의 움직임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상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건, 오로지 자신의 느낌뿐이지요.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맙니다. 이럴 때 첫 눈에 반한 상대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비트켄슈타인의 그림과 같지요. 알랭드 보통은 계속 말합니다. “비트켄슈타인의 그림에서는 보는 사람의 태도에서 많은 것이 달라진다. 상상력이 오리를 찾으면 그는 오리를 보게 될 것이다. 상상력이 토기를 찾으면 토끼가 나타날 것이다. 그림에는 두 가지 근거가 다 있음으로.” 중요한 것은 보는 사람의 경향 정신적 태도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반한다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모습이 상대방의 모습에 반사돼 있다는 뜻도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에 유일한 것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고요.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첫 눈에 반한 그 에너지 넘치는 짜릿한 느낌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하는 이유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겨둔 채 작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첫 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자신이 뛰어드는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나서야 그 물에 빠진다.” 이철한 작가도 [눈물은 힘이 세다] 라는 책에서 말했지요. “깊이가 없는 높이는 높이가 아님을 끝끝내 잊지 않을 것이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2월 14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야곱이 임종 시에 자식들의 머리에 일일이 손을 얹고(창 48:17-20) 유언이면서 동시에 축복하는 내용 입니 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언의 순서가 레아에게서 낳은 자식들 6명을 시작으로, 두 첩에게서 난 자식들 4명과 마지막으로 라헬에게서 난 두 아들로 진행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예언하고 있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비록 늙고 병약한 야곱이었지만, 그의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마음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었던 하나님의 구속사적 신앙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것은 각 각의 자식들이 행한 대로 선 악간에 복과 저주를 포함하고 있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신앙인들이 자신의 자녀에게 손을 얹고 축복하는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성찬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물론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어린 아이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 없지만, 목사의 축복의 손길을 기대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혹은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실 지어다.” 라는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축복권은 부모에게도 이미 주어진 것임을 알고(창 27:4) 행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함께하는 자리에서나 혹은 없는 곳에서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도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이고 힘이 되는 것은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에서처럼, 축복(복을 빎)은 선 악간에 복과 저주가 있다는 중간 심판(평가)의 성격도 있으니, 자녀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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