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985호(2012. 4. 14. 토요일).
시편 141:4-7.
찬송 16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 육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을 갖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우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로 들어 설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은 육체의 연약함과 문제투성이를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생긴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몸으로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으며, 또한 몸으로 다시 재림하실 것을 약속해 주셨음을 기억한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말입니다. 거듭남과의 관계가 남은 최후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만, 거듭났을지라도 육체에 매여 있는 한 온전한 존재일 수도, 온전한 새로움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의 죽음과 그 다음 단계인 부활이 우리들 신앙인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기대되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게 흥미를 끄는 구절은 4절입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탄식”이라는 말은 비관주의자나 염세주의자들이 말하는 자포자기나 절망적인 의미가 아니라, 육체의 한계나 무력감에서 벗어나 영원한 삶에 대한 강한 희망과 기대감을 뜻하는 것이며, “벗고” “입고”의 의미는 공동번역처럼 육체의 옷을 벗어서 “벌거숭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의 뜻으로,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연상해서 나온 말입니다. 그리고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는 구절은 주님께서 부활하실 때, 죽지 않고 영화로운 부활체로 영광에 이르고 싶다는 소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우리 역시 새로운 생명이며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될 부활한 몸에 이르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런 부활신앙을 통해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생각해 볼 따름입니다. 저 역시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기를” 기도합니다만, 그래도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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