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009호(2012. 5. 8. 화요일).
시편 148:1-5.
찬송 20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녀가 불쑥 찾아왔습니다. 첫 눈에 반했던 얼굴인데, 하도 오랜만이라서 첫눈에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남자가 왜 찾아왔느냐고 묻자, 여자는 집을 지어달라고 합니다. 이 용주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쓴 영화 <건축학 개론>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온 이유가, 여자 말대로 집 때문이라고 믿는 관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이 애인 사이였던 것도 아닙니다. 여자는 남자를, 그것도 15년 만에 왜 찾아왔을까요? 살다보면 불쑥 명치끝을 묵직하게 울리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일하게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춰 버린 그 순간들. 내 기억 속에서 과거의 모습으로만 머물러 있는 그 사람이,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어떤 모습이 돼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궁금한 건 그 사람의 현재가 아닐지도 몰라요. 영화 중간에 다소 생뚱맞은 장면이 있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던 남자가 여자에게 “혼자 산다며?” 그럽니다. 그러자 여자가 남자에게 갑자기 욕을 퍼붓지요. 남자는 술주정이라고 여기고 당황하는데, 여자는 계속 욕을 하면서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건 남자 생각처럼 단순한 술주정이 아니었습니다. 짧은 그 장면이 가슴을 울리는 건, 여자가 남자를 찾아온 그 이유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 때 너랑 이루어졌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왜 그 때 우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정말로 궁금한 점은 너의 현재라기보다, 너와 함께 했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나의 또 다른 현재일지도 모릅니다. 그 현재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 줄은 나도 압니다. 첫사랑을 망가트려버린 그것이 오해였는지 사실이었는지도 중요하지 않지요. 어차피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깨졌을 테니까요. 스무 살 무렵의 첫사랑이란 대부분 사소한 오해와 알량한 자존심으로 얼룩져 비겁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져서, 제대로 사랑을 하지 못했고, 마무리도 제대로 되지 않아 미련이 남습니다. 그런 아쉬움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궁금합니다. 첫사랑의 현재와, 첫사랑이 이루어져서 또 다르게 펼쳐졌을 나의 현재가. 하지만 어느 한 시기, 아름다운 추억으로 갈무리해야 할 시점이 오기 마련이지요. 그 때가 되면, 이런 인사를 건네도 좋겠지요? “이제는 정말로 너의 행복을 바란다.”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몰라서, 인사하고 싶어도 못한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인사는 분명히 그 쪽에 가 닿을 겁니다. 김상운의 [와칭]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 글 처럼요. “단 한번이라도 인연을 맺은 미립자들은, 바로 곁에 있든 우주 정반대편에 떨어져 있든 아무 상관없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영원히 서로를 주고받는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3월 20일 방송>
2. “깨어 있는 생활”이라고 제목을 잡아도 무방할 말씀입니다. 까닭은 누구도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을 제대로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지난 달 저는 한참 열심히 살아야 할 한 젊은 부인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젊은 남편과 두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이런 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예외이겠습니까? 우리 인생이란 시간 속에 살도록 운명 지어졌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매일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역시 이런 인간의 문제를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이를 줄을 앎이라.”고 했는데, 인간의 죽음은 곧 주님의 날과 연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권면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처럼 깨어 있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눈만 뜨거나 숨만 쉬는 것은 아니지요. 거짓과 불의를 밤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믿음과 사랑의 가슴을 가지고, 구원의 소망을 목표로 삼고, 함께 사는 동료 인간들에게 덕을 세우며 사는 것을, 낮에 속한 사람, 깨어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삶의 목표는 소유나 명예나 권세가 아니라, 그것들을 가지고 함께 사는 이웃들과 신뢰와 사랑을 나누며 피차에 유익을 주고받는 그런 도타운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단을 목표로 착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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