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005호(2012. 5. 4. 금요일).
시편 147:1-5.
찬송 46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형도 시인이 쓴 <소리의 뼈>라는 재미있는 시가 있습니다. 소리의 뼈라니, 과연 정체가 무엇일까요? 김 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다. 모두 그 말을 웃어 넘겼다. 몇몇 학자들은 잠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한 김 교수의 유머에 감사했다. 학장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1학기 강의를 개설했다.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장난삼아 신청했다.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 주었다. 참지 못한 학생들이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 각자 일가견을 피력했다. 이군은 그것이 침묵일거라고 말했다. 박 군은 그것을 숨은 의미라 보았다. 또 누군가는 그것의 개념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모든 고정관념에 대한 비판에 접근하기 위하여 채택한, 방법론적 비유라는 것이었다.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김 교수님은 소리의 끝내 뼈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지시 않았습니다. 어쩌면 “너희들은 그렇게 많은 말을 하는데, 거기에 뼈는 있는 거냐?” 침묵으로 물으셨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물으신다면, 그래요. 뼈가 있겠지요. 아니 있었겠지요. 그런데 뼈만 있으면 거기에 무엇인가를 걸치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속성입니다. 이때부터 중요해 지는 건 무엇을 걸칠까? 뼈 따위는 이제 중요하지 않습니다. 김경선 시인은 <옷걸이>를 뼈대에 비유했습니다. “앙상한 뼈대는 가문의 수치/ 무언가 걸쳐야 산다/ 지나가는 바람이라도 붙잡아 널어야 한다/ 계절의 지친 어깨에 받아 걸다가/ 그 무게에 휘청거려도/ 이대로 바닥으로 구를 수는 없다/ 명품을 걸치는 것은 최대의 꿈/ 상류 사회로 가는 지름길은 겉치레에 있다/ 속은 텅 비도 겉은 번드르르/ 한 번도 제 인생을 살지 못한 그들은/ 타인의 얼굴로 산다”
세상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소리부터, 바람만 들어간 소리까지 가득합니다. 뼈는 보이지도 않지요. 내가 내는 소리인지, 남에게 빌려와서 내 것인 양 내는 소리인지. 자기가 말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소리를 내고 있는지 잘 모르고. 남이 말하는 걸 들으면서도 무슨 소리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꾸 더 소리를 낼수록, 서로의 감정은 점점 더 엇갈립니다. 그러니 이럴 때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따를 수밖에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그리고 이해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소리의 뼈 아닐까요? 모든 소리를 훨씬 더 잘 듣게 만드는 소리의 뼈 말이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3월 15일 방송>
2. 신앙생활이 평탄한 대로를 걷는 길이 아니라는 것은, 오히려 좁고 험한 비탈길 같은 것이라는 것은, 우리도 오래 전에 예수님께 들은 말씀입니다(마 7:13-14). 그런데 사도 역시 주님을 대신해서 그 좁은 문 얘기를 항상 했던 모양입니다(4절). 그 까닭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세상과 다른 데서 오는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이런 신앙인들에게 항상 시험하는 자가 있어서, 그들의 신앙을 헛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안티(anti) 크리스천과 같은 존재들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버티고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가족 가운데서도 나타날 수 있고, 친했던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 시험하는 자들이란 한 때 열심히 교회 안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는 데 고민이 깊어집니다. 심지어 목사 출신이며 신학교 교수라는 사람들이 우리 신앙을 흔들고 있는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는 점입니다. 이런 안티들은 다른 시험자들에 비해서 훨씬 더 강력하게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나름 기독교를 비판한 문제들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신행이 불일치한 모습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탐욕과 비민주적 지도력과 심지어 비리들까지도 식상할 정도로 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약점들을 잘 꿰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안티의 내용들이 다양한 듯하지만, 결국 그 중심에는 이 한 가지가 우뚝 서 있습니다. 신앙의 방향성이 아니라, 이성의 방향성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신앙에서 출발했지만, 그들 역시 어느 순간부터 성경을 사람의 글로 이해하려는 이성의 한계에 두게 된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이든 지도자들의 생활 태도는 그리 치명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시대나 그런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은 있게 마련인 때문입니다. 신앙을 생활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가르치는 어리석고 위험한 사이비 지도자들은 항존 하는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신뢰하는 신앙, 그것만이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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