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004(2012. 5. 3. 목요일).

시편 146:6-10.

찬송 49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연필을 그다지 쓸 일이 없는데 아직도 굳이 씁니다. 연필로 글을 쓰면 연필이 일하는 소리를 열심히 들려줍니다. 쓱싹쓱싹 사각사각. 저마다 다른 연필이 저마다 다른 종이를 만나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지요. 연필을 들어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 봅니다. 어렴풋한 나무 냄새와 함께 나는 연필심 냄새. 더 진하게 맡고 싶어서 연필을 깎습니다. 연필깎이로 깎으면 편하지만 그러면 냄새가 덜 나는 것 같아서, 굳이 칼로 깎습니다. 연필통에 나란히 누워있는 연필들을 바라보니 뿌듯합니다. 그리고 애잔합니다. 처음에 이곳에 올 땐 다들 똑 같은 키로 쭉쭉 뻗어서 잘 생겼는데, 이제 보니 저마나 다른 키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연필의 생은 세월에 있지 않지요. 주인이 어떻게 깎는지, 얼마나 많이 쓰는지에 연필의 생이 달려 있고, 많이 깎일수록 많이 쓰일수록, 점점 더 닳아지고 작아집니다.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지다, 마침내 몽당연필이 됩니다. 시인이자 사진작가인 민병일의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이라는 책이 있어요. 고릿적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책에는 고릿적 물건들로 가득한데요. 그 중엔 몽당연필도 있었습니다작가의 독일 유학시절, 벼룩시장에서 오드리 헵번과 비슷한 할머니가 골동품을 내 놓고 파는 모습을 봤다고 하지요. 색 바랜 검정 구두와 흰색 블라우스, 장미가 그려진 브롯지, 사발시계 모차르트와 슈만의 LP 몇 장, 낡은 괴테의 책과 그리고 조그만 비닐 한 봉지. 조심스레 비닐봉지에 묶인 끈을 풀고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감탄이 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그 안에는 올망졸망한 몽당연필들이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골동품을 사러갔던 작가는 몽당연필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영원히 사라져 버린 유년시절의 추억을 되찾은 것 같은 뭉클한 마음으로. “색색의 몽당연필을 꺼내 줄을 그으면 희미한 기억이 연필심을 따라 나온다. 할머니는 저 연필을 난쟁이로 만들어가며 생의 무엇을 기록했을까? 삶이란 연필처럼 줄어들어 몽당연필 속에 추억만 남기는 것인지. 연필로 쓴 글씨와 그림에는 아련한 그리움의 흔적이 배어있는 것인지. 작디작은 몽당연필에서 느껴지는 할머니의 생애. 그것은 이성적 사유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쓰고 또 써서 작아진 몽당연필 그것은 그렇게 생이 들어 있습니다. 쓰지 않으면 닳지도 않고 작아지지도 않고 새것처럼 그저 멀쩡하겠지만, 대신 추억과 그리움은 보잘 것 없이 작아져 버리는 인생. 몽당연필은 그런 생을 아마도 부러워하지 않을 겁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39일 방송>

 

2.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유대에 있는 교회나 이방의 있는 교회들이 모두 다 나름대로의 고통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들었기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셨느니라는 말씀에서 그런 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체화(體化) 되어야 합니다. 귀에나 혹은 머리에 머물러버리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고통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첫째는 자신 안에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거짓말의 유혹에서, 악한 성품과 싸우는 내전에서 고통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세상을 쫓는 그들과 다른 몸짓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그런데 저는 또 다른 고통을 짊어지고 갑니다. 축복이 약속된 길을 가자고 권하는 대신에, 먼저 고통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자고 권하니 말입니다. 제 설교에서 그 흔한 환하게 열리는 행복의 문 보다는, 가시밭 길 언덕과 좁은 문이 더 많이 나오니 얼마나 마음이 무겁겠습니까? 그러나 그 가시밭길을 가는 우리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선포하는 게 저의 임무이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의 꿈을 닮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 그리고 자랑하고픈 면류관이 무엇이냐?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 주님 예수 앞에 서 있는 너희가 아니냐?” 예수님 앞에 설 사람으로 가르칠 이유가다름 아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을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까닭일 테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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